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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72화 (148/280)

172화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허.”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렸다.

워낙 초현실적인 얘기가 튀어나와서 이거 뭐, 어떻게 리액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잘 이해도 안 된다.

미네르바한테 수호자 업무 인수인계 받을 때 딱 이런 느낌이었지.

‘일단 내가 이해한 대로면….’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눈앞의 백발 남자가 범세계급 미친놈이었다. 내가 감당할 양반이 아니다.

“적랑님. 국가 전복 같은 걸 꾀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계 전복을 꾀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어떡하냐. 곱게 미친놈인줄 알았는데 찐퉁 미친놈이었네.

아무리 생각해도 라인 잘못 탄 거 같은데. 내가 왜 마녀사냥 같은 걸 한다고 했을까. 졸라리 후회된다.

나는 후회막심한 한숨을 흘리며 멸망의 대검을 퍼뜩 등 뒤로 숨겼다.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지금부터 해줄 얘기는 전세계를 통틀어 나만이 알고 있는 것들이니, 어디서 떠들진 말아주게.”

적랑은 눈썹을 비틀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애매한 반응을 보여줬다.

“안 떠듭니다. 떠들어봐야 미친놈 소리만 들을 거 같은데요.”

“그게 사실이지. 그래서 나도 지금껏, 마녀사냥꾼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네. 사리사욕에 찌든 돼지새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을 주워섬기는 적랑의 입가에는 지독한 고독감이 엉켜 있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지체없이 질문하게. 그게 이해시키는 데 빠르겠군.”

적랑이 눈썹을 튕기며 내게 바통을 넘겼다.

고딩 때도 난 질문시키는 선생이 제일 싫었다. 골치가 빠개지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 적랑님. 일단 마녀가… 세상을 왜 지켜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그 마녀 잡으라고 여기 소환됐는데?”

마녀 디아나가 사실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마법소녀 디아나☆에스파다’였으면. 우리는 그런 기특한 여자를 쳐죽이려 드는 이세계 테러리스트 군단이다.

적랑의 방금 발언으로 미네르바는 오사마 빈라덴이 됐고. 나는 IS나 알카에다, 소말리아 해적단원 언저리가 돼 있었다.

이이잉 앗살람알라이쿰.

“아신들은 마녀가 아니라 마왕과 마족을 잡으라고 우리를 소환했지. 마왕 토벌과 마녀사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세. 정용 군.”

그렇다고 한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곧장 이의를 제기했다.

“마녀가 만들어낸 게 마왕이잖아요. 크게 보면 같은 얘기 아닙니까.”

“모든 마왕이 마녀가 원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마왕들은 마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일종의 사생아들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적랑의 얘기를 경청했다. 적랑은 농담기 전혀 없는 말투로 계속 말했다.

“내 말했잖나. 가만히 내버려둬도 이 세상은 조만간 멸망하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일은 빡센데 사내복지 족같다고 마녀가 노조 꾸려서 파업하나 보죠 X바….”

“비슷하네. 대충 그렇게 알아도 무방해.”

“뭐시기요?”

내가 대충 던진 농담에 적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눈깔 동그랗게 뜨고 적랑을 직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미친놈 지금 진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만간 어쩔 수 없이 마녀가 기둥의 역할을 포기할 걸세.”

적랑이 경악하는 내 면상을 보더니 슬쩍 보충했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쩔 수 없다고요?”

“마녀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네. 세계의 붕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거지.”

“… 아하.”

“국빈회의에서도 매년 나오는 안건이지만. 최근 30년 들어 마왕의 출현 빈도가 급격하게 늘었네. 마녀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그것이다.”

적랑은 내 옆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돌처럼 굳은 거대한 심장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봤다.

그러다가 의미심장하게 벼린 눈빛을 내게 향했다.

“마녀가 마왕을 만드는 것은 맞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검은 마력을 사용하다가 발생하는… 일종의 흑마법 찌꺼기 같은 것일세. 그녀의 의지가 아니지.”

“허어.”

“불순물이 점점 많이 나온다는 것은, 세계를 유지하는 그녀의 힘이 약해졌다는 반증이다. 더 이상 붕괴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게지. 알기 쉽게 설명하기가 힘들군. 이해하겠나?”

“아 예. 이해는 했습니다.”

마왕은 일종의 지우개똥이다.

디아나의 지우개가 오래되다 보니 품질이 구려져서, 빡빡 문질러도 글씨는 안 지워지는 주제에 지우개똥은 오지게 나온다고 한다. 접수.

지우개를 몰라서 저렇게 어렵게 설명하는구나. 개탄스럽다 X발.

“사실 마녀가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 지켜주는 착한 년이었다. 예 뭐, 반전 좋네요. 여기까지는… 이해했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적랑을 마주봤다.

이해는 했지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 더더욱 말이 안 되네요.”

“어떤 부분이 말인가.”

“그런 착한 마녀를 왜 죽이려는 겁니까. 죽여도 멸망, 안 죽여도 멸망할 거면 그냥 조금이라도 오래 살도록 냅둬야죠. 굳이 지금 세상을 둘로 쪼개려 하는 이유가?”

그렇다. 전말을 들어도 여전히 검림의 말대로다. 적랑은 미친놈이다.

마녀를 죽인다는 건 결국,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소리가 된다.

“뭐 그런 겁니까? 소중한 사람이 마왕한테 죽었는데. 마왕을 죽여도 분이 안 풀리니 그 원흉인 마녀라도 죽여야겠다? 그녀가 없는 세상 따위 X팔 개나줘. 그런 느낌?”

“…….”

“그건 쪼끔 이기적이죠. 땡깡 피우는 스케일이 너무 크잖습니까?”

“부정하진 않겠네. 그런 의도가 완전히 없진 않아.”

부정하라고. 나 지금 당신을 못 믿겠다니까?

적랑은 성큼성큼 석판 쪽으로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까딱여 나를 불러들였다.

나는 투덜대면서도 퍼질러 자고 있던 루시를 업어들었다. 그리고 순순히 적랑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세계가 그렇게 끝나지 않기 위해서, 마녀가 준비한 것이 바로 자네와 루시 양. 고대 성녀의 마지막 예언에 기록된 인도하는 까마귀와… 하얀 그릇이다.”

적랑은 그런 말과 함께 거대한 석판의 뒤쪽을 가리켰다. 나는 시큰둥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석판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숨을 삼키고 거기에 있는 것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대부분의 마왕은 마녀의 의지로 탄생한 게 아니지만. 극히 일부, 역사상 가장 강했던 네 명의 마왕들은 달라.”

알 수 없는 꼬부랑글자가 가득했던 석판의 앞면과 달리. 뒤쪽은 그림으로 가득했다.

마치 어린이가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듯한, 조악하면서도 뚜렷한 특징이 있는 그림.

나는 한동안 그 그림에 홀린 듯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미 죽은 자, 아직 살아있는 자. 행방조차 묘연한 자도 있지만. 4마왕만큼은 확실히 마녀가 의도하고 만든 자들일세. 마녀의 자리를 계승할 하얀 그릇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며 적랑은 조악한 그림의 중앙을 가리켰다.

시커멓게 칠한 구멍 안. 하얀 머리의 꼬맹이가 하나 있다. 하얀 그릇을 물고 날아오는 까마귀를 보며 뛸듯이 기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녀를 계승할… 하얀 그릇이요?”

하얀 그릇.

퍼뜩, 등에 업고 있던 루시에게 시선을 던졌다. 적랑의 핥는 듯한 시선도 루시에게 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루시를 보호하듯, 조금 뒤쪽으로 발을 물렸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하얀 그릇을 완성시키는 데는 총 세 개의 의식이 필요하다.”

내가 그러든 말든.

적랑은 석판 왼쪽의 새빨간 덩어리 같은 그림을 턱. 가리킨다.

“첫 번째 의식에서 마녀의 심장. 마왕 아스타르트를 살해한다.”

적랑이 석판 아래쪽에 자리한 초록색 안개 그림을 턱. 가리킨다.

“두 번째 의식에선 마녀의 기억. 마왕 자드키엘을 살해한다.”

마지막으로 적랑이 석판 오른쪽의 갓난 아기 그림을 턱. 가리킨다.

“세 번째 의식에선 마녀의 탯줄. 마왕 샤키엘을 살해한다.”

그렇게 석판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돌았던 적랑의 손가락은 다시금 턱.

중앙의 시커먼 구멍으로 돌아와, 기뻐하는 하얀 머리 꼬맹이를 가리켰다.

“그러면 마녀에게 향하는 길이 열린다. 완성된 그릇을 가지고 까마귀는 마녀를 찾아간다. 마녀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잘라 그릇에 넣고, 검은 기사님과 영원한 잠에 빠진다.”

… 만약, 루시가 저 예언에 나온다는 ‘하얀 그릇’이면. 어째서 마녀는 루시에게 ‘이 세계를 지켜라’ 같은 명령을 내려놓은 건지 이해가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던 대부분의 것들이, 대충 납득된다.

“이것이 엘프리데가 해석해준 예언을 바탕으로, 내가 재구축한 마녀 살해의 계획이자. 동시에 마녀 디아나가 수백 년 전부터 준비한 세계 유지의 계획일세.”

희번득거리는 적랑의 눈빛이 눈에 밟힌다.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세기의 대발견을 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얼굴이다.

뭐… 지금 적랑이 해준 말들이 모두 사실이면. 매드사이언티스트는 아니어도 세기의 대발견인 건 맞긴 하다.

―으흐흐흐.

문득 허리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호 형님의 목소리였다.

―진짜 다시봤다, 백발 아재. 거의 비슷해. 오차범위 5%. 마녀사냥꾼 자청할 만하네.

손이 달려 있었다면 박수라도 쳤을 것 같은 대견한 목소리다. 실제로 적랑 스스로도 꽤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행색이긴 하다.

나는 그 자신만만한 면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마지막 질문을 했다.

“… 그러면. 아신들이 근래 미친 듯이 용사들을 싸질러놓는 이유는….”

“까마귀의 적합성을 지닌 이계인을 색출하기 위해서지. 최근 30년 동안 소환량이 급격하게 늘었던 건 그만큼 아신들도 급해졌다는 뜻이다.”

적랑이 질문을 잘라먹고 즉답했다.

고구마 한 박스 목구멍에 쑤셔 넣은 양 깝깝해졌다. 1억 6천만이 넘는 용사들을 이 땅에 소환한 목적이, 나 하나 때문이라는 소리니까.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입이 바싹 마른 나는, 이걸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녀가 죽으면. 그, 소환됐던 용사들은… 어떻게 됩니까.”

전에 적랑과 했던 대화가 불현 듯 뒷목을 스친다.

그 때 적랑은 모든 것을 각오한 듯했다. 산채로 가죽이 벗겨진다.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적랑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 아신들의 정확한 목적이나, 마녀가 죽은 뒤의 미래까진 예언에 나와있지 않지만. 이 정도는 추측할 수 있지.”

적랑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출구를 향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쫓았다.

어째 들어올 때보다 더 긴장이 됐다. 왠지… 적랑이 내뱉을 용사들의 말로가 대충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가 죽으면 한동안 세상에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닥칠 걸세. 세계의 안정을 유지하던 검은 마력이 폭주하며, 각종 자연재해와 수많은 마왕들이 일거에 쏟아진다고 하네. 거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걸세.”

“네. 그리고?”

“그 마왕들이 전부 토벌되고, 하얀 그릇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면. 어둠은 물러가고 파라이소 대륙에는 다시금 안정기가 찾아온다.”

“… 엥? 그게 끝?”

마침 우리 앞에서도 칠흑 같던 어둠이 끝나고. 멀리 천장에 난 구멍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이었다. 적랑과 나는 달려가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거의 동시에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간만에 마시는 맑은 공기에 심호흡을 하는 순간. 적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왕이 없으면. 아신들이 막대한 힘을 쏟아가며 용사지원 시스템을 유지할 이유도 없지. 시스템이 폐기되고 모든 용사들이 얻었던 힘을 일거에 몰수당할 걸세.”

그 의미를 가만히 반추해보고 있자니. 적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현재의 용사 중심 지배구조에 대혁명이 일어나고. 억압받던 원주민은 힘이 없어진 용사들을 탄압한다. 국가 간의 알력다툼이 쏟아지겠지. 용사의 의존도가 심한 마르크트레스와 미텔란트는 용제국과 운터란트에게 피로 물들고. 가장 먼저 망할 것이다.”

내 눈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적랑은 내리쬐는 아침의 태양을 응시하며 뒤틀린 조소를 머금었다.

“마왕이 창궐하던 시절조차 유래없던 살육과 학살의 시대. 용제국과 운터란트, 그리고 용사들의 연합을 중심으로 대전쟁이 대륙을 뒤덮는다.”

그래. 내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럴 거 같다.

공공의 적이 없는 세상에선 인간만이 인간의 적이다.

지구가 그렇듯이.

“이제 알겠나? 내가 왜 다른 용사들에게… 마녀사냥꾼에게조차 이 사실을 함구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적랑.

나는 대꾸 없이 그 뒤를 쫓아갔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같아도 안 도와주겠네요. X바.”

세상 누가 부귀영화 권력, 자기 목숨까지 포기하면서 세계평화를 지키고 싶겠는가.

차라리 수십 년 떵떵거리다 다 같이 죽고 말지. 운 좋게 마녀가 열일해주면 나 뒤질 때까지 멸망도 안 할 텐데. 나 같아도 그러겠다.

여기저기서 헥터 카사스처럼 견제나 안 쑤시면 다행이겠다.

‘… X발.’

지금 내가 가장 족같고. 구역질나는 게 뭔줄 아는가?

헥터 카사스가 한 발상이 대충 짐작되었고. 그것에 어느 정도 공감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놈은 사리사욕으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다.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사와 마왕 간 평형 상태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아무도 진실에 다가가지 않도록. 이 유리 위의 가짜 평화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도록.

“X발…!”

나는 결국 육성으로 욕지기를 씨근거렸다.

마녀를 죽여서 전례 없던 혼란의 시대를 초래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시한부인 현재를 지키는 게 옳은지. 솔직히 나로서는 모르겠다,

‘일개 막노동꾼 새끼가 감당할만한 일거리를 좀 줘라. 이 X같은 마녀야.’

그렇게 중얼거리려 했지만.

마녀 골수 빠돌이가 내 허리춤에 있는지라.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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