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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70화 (146/280)

170화 킬 더 위치 (KILL THE WITCH)

기분 끝내주는 루시와의 재회를 마친 나는, 일단 그녀가 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혔다. 그 뒤로는 곧장 정신교육에 들어갔다.

진실의 방을 대략 세 시간 코스 조지고. 사죄의 정권지르기 1만 번 정도 시키고 나니 전과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으그극…! 저, 저는 버러지입니다… 닷씨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파, 팔이 너무 아파아…! 아 씨 죄송하다고요 쫌!”

원래는 나를 잊어버린 게 하도 괘씸해서 한참을 더 괴롭힐 생각이었지만.

나 때문에 죽은 루시가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져서 더는 못 하겠더라.

‘… 어차피 알아낼 건 다 알아냈고.’

정신교육 겸 심문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아낸 게 있다.

루시는 지금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확실히, 싸그리 말소됐다.

―전생의 기억이 이렇게나 희박한 건 처음이다! 나, 나도 당황스럽다!

그래서 사실상 전생에서 있었던 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 했던 게 기억날라 치면, 거기서 나라는 존재가 불쑥 끼어든다.

그러면 다른 기억들까지 안개 속으로 흐려지고. 관련된 모든 기억이 뭉개지며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 그만큼, 나의 기억이 많은 용량을 차지했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맹랑한 루시도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궁시렁거리며 어깨를 주무르는 루시를 멀거니 쳐다봤다.

루시가 나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좀 물어나 보자… 요.”

“뭐 왜.”

“내가 네놈을 어떻게 부르면 좋냐… 요.”

그런 걸 물어온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한 마디 뱉었다.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한 박정용님이라고 불러라.”

“뭐야? 그, 그게 뭐냐 대체.”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은걸.”

“정신 나갔나 이거….”

전생의 루시는 저런 거 안 물어봤다.

그냥 ‘시종은 안 된다 하고, 이름 불러주긴 싫으니. 대충 용사로 하자.’라고 제멋대로 정하더니. 그 뒤로 그냥 ‘용사’라는 명칭으로 고정됐다.

그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음. 그럼 시종은 안 된다 하고, 이름 불러주긴 싫으니. 대충 용사로 하자… 요.”

루시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눈을 부릅뜨고 루시를 빤히 쳐다봤다.

루시는 자기가 뭘 잘못한 줄 알고, 몸을 흠칫 물리며 양팔로 정수리를 가렸다.

“아니! 요, 용사님으로 할까… 요?!”

유난쩍은 반응. 나는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니 알아 하십쇼. 그리고 존댓말은 안 해도 된다.”

“으아각! 머, 머리 마음대로 만지지 마라! 이 무례한 용사!”

루시가 곧장 항의해왔지만. 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적랑과의 약속장소로 곧장 향했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루시는 역시 루시군.’

내가 알던 루시는 그 때 확실히 죽은 게 맞다.

하지만 기억이 없는 루시도 역시 루시였다. 그걸 실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신의 성전 가도를 걷고 있자니. 옆에서 루시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근데 용사.”

“왜.”

“내 이름을… 왜 루시라고 부르느냐?”

“…….”

“나는 루스티카다.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지금껏 루시라고 불렸던 적은 한 번도 없느니라. 어떻게 줄이면 루시가 되냐.”

걸어가면서 루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루시도 빤히 나를 마주본다.

나는 한참 후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뿔을 잡고 마구 뒤흔들었다.

“너랑 닮은 사람이… 그 이름이었다.”

* * *

“… 불사의 마왕도 함께로군. 정용 군.”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약속장소인 대나무숲에 도착했을 때, 적랑은 같이 온 루시를 보며 낮은 침음을 흘렸다.

역시 그냥 집순이나 시킬 걸 그랬나. 부활한 직후라서 웬만하면 혼자 두고 싶진 않았던 건데. 나는 혀를 차며 루시를 흘깃 쳐다봤다.

“뭐, 상관없네. 그녀야말로 오늘 화제의 주인공 격이니. 오히려 환영일세.”

그러나 적랑은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곧장 눈썹을 튕겼다.

“… 예?”

“따라오게. 장소를 좀 옮기지.”

“아, 예에.”

적랑은 내 의문에 답해주는 대신 성큼성큼 대숲을 가로질렀다.

아직 어둑한 아침의 대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서늘한 공기와 지저귀는 새 소리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문득 적랑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군. 잠시 기다려주게.”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대숲의 한 가운데. 적랑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일정한 방향, 그리고 일정한 수순으로 대나무 몇 개를 두들기나 싶더니. 이내 우르릉, 땅이 울렸다.

“으엑?”

루시가 휘청이며 당황 어린 탄성을 흘렸다.

쿠구구구. 부엽토가 쌓였던 지면이 요동친다. 이내 흔들리던 땅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건….’

진짜 땅이 반으로 갈라진다기보다는, 신기루처럼 환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내 우리 앞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등장했다. 인위적인 느낌이 다분한 돌계단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 변신로봇 비밀기지라도 숨겨놨습니까?”

사실 마녀를 죽일 결전병기 파일럿들이 필요했다. 뭐 이런 거 아니겠지?

이미 머신건이나 강화 골격 슈트까지 나온 마당이다. 운터란트의 세계제일 과학력을 알고 있는지라 반은 진심이다.

다행히 적랑은 고개를 가로저어 내 말을 부정했다.

“청염의 동굴로 이어지는 비밀통로일세.”

다만 튀어나온 대답이 예사로 흘릴 내용은 아니었다.

솨아아―. 침묵에 잠긴 대숲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나는 미간을 가늘게 좁혀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 비밀통로라니. 다른 카발리어들도 모르나요?”

“마녀사냥꾼 중 남은 카발리어가 나뿐이니. 모르는 게 맞겠군.”

청염의 동굴은 현재까지 고레벨의 몬스터와 마족이 쏟아져 나오는 극히 위험한 장소.

카발리어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있다는 그 던전의 비밀통로를… 정작 카발리어들이 모르고 있다고?

‘대체 무슨 속셈으로 함구한 거지….’

적랑은 내가 질문할 짬도 주지 않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와 루시도 황급히 적랑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어두워지는 사위. 나는 벽을 짚고 더듬더듬 앞으로 나가며 물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겁니까. 이 통로는.”

“청염의 동굴 가장 깊은 심장부. 동굴의 핵이 있는 곳일세.”

…… 뭐라고?

나는 퍼뜩 적랑의 뒤통수에 시선을 박았다.

때마침 루시가 내쪽으로 바짝 가까이 왔다. 내 옷소매를 꽉 붙들고 내 등 뒤로 숨는다.

뭐랄까. 그녀치고는 드물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용사. 굉장히, 기분 나쁜 냄새가 저쪽에서 난다. 나랑 비슷한 느낌인데… 뭔가 달라. 이상한 홀애비 냄새…? 아니. 시체 썩은내 같은 게 나.”

시체 썩은내. 하지만 나는 딱히 냄새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왕인 그녀만이 느끼는 시체 냄새라니. 지금 향하는 장소에 대한 의문이 폭증한다.

“역시 불사의 마왕. 힘을 잃었어도 감은 살아있군.”

적랑은 시기적절하게 반응했다.

“불사교도들이 틈만 나면 살려내려 하는 아스타르트 파편의 모체. 그리고 이 동굴이 마물을 쏟아내는 원동력이기도 한, 아스타르트의 유해(遺骸)가 이 끝에 있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발소리가 멎자 적랑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나는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적랑의 눈동자를 가만히 노려봤다.

“그런 터무니없는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라고요? 그런데… 왜, 다른 카발리어들한테 알리지 않는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내가 적랑을 바라보는 눈빛엔 의심이 잔뜩 끼어있었을 것이다.

적랑은 알만하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군.”

적랑의 눈꼬리가 뒤틀린 호선을 그린다.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는 말했다.

“그런 통로를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 최소한 그 아스타르트의 유해를 부쉈으면 무의미하게 인명이 죽어나갈 일도 없지 않았겠나. 입 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의도가 무엇인가. 국가 전복이라도 꿈꾸는 것인가.”

“… 아뇨. 거기까진 생각 안 했는데… 피해망상 2주 압수해도 될까요.”

이 양반이 국가전복 나부랭이엔 관심없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증오와 애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이 양반은 그냥 찐퉁 골수 마녀 십덕이다. 마녀사냥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지.

‘이유가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힘을 가진 자의 의무를 설파하며, 칠마존을 싫어한다고 단언했던 적랑이다.

그런 사람이 왜 그런 중요한 것을 보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카발리어에 알리지 않은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일세. 쓸데없는 혼란만 가중될 뿐이겠지.”

적랑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어둠 속을 전진했다. 나는 뒤따르며 곧장 되물었다.

“의미가 없다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스타르트의 유해를 파괴하는 걸, 내가 시도해보지 않았을 것 같나?”

“…!”

“당시의 마녀사냥꾼은 지금보다 훨씬 거대했네. 유해를 파괴할 충분한 힘이 있었지. 당연히 나는 모든 마녀사냥꾼을 동원해 유해를 파괴하려 했다.”

저벅저벅. 유난히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나는 한동안 입을 닫고 있다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시도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전례없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네.”

“…….”

“물론 마녀사냥꾼들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는 있었네. 대가는 아주 컸다. 무수한 마녀사냥꾼이 죽고, 지금의 조촐한 멤버만 남았지. 그나마도 반은 배신자였지만.”

… 역시나 적랑이 괜히 입을 닫고 있었던 건 아니었군.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적랑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엘프리데 덕분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네.”

“… 결론이요?”

“유해가 있는 방에는 커다란 석판이 있었네. 우리가 파괴를 시도한 그 순간, 정신차려보니 솟아난 석판. 거기엔 고대 신성국 슈엘츠의 예언이 쓰여져 있었네. 엘프리데가 각고의 노력 끝에 해석해줬지.”

“오호. 그 여자가….”

하긴. 엘프리데는 적랑이 부탁하는 거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을 테지.

눈에 불 켜고 고대어를 해석하는 그림이 그려져서 쓴웃음이 나왔다.

“거기엔 아스타르트의 유해를 소멸시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

“조건. 요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아스타르트를. 모든 마왕의 소환을. 그리고 마녀를… 완전히 잠재울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조건, 요소라는 말을 주워섬길 때. 적랑은 나와 루시를 스윽 훑어봤다.

그는 이내 비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거대한 공동으로 진입했고. 우리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 못박혀 섰다.

“들어오게. 이곳이 바로 아스타르트의 유해가 잠든 곳이다.”

나는 루시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천천히 적랑이 기다리는 공동으로 진입했다.

공동의 중앙. 거대한 물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눈에 담고 순간 넋을 잃었다.

“저게… 대체.”

심장이었다.

묘하게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아니.

‘루시를 닮았다.’

루시에게 시뻘건 점막과 혈관을 둘둘 씌워놓은 것 같은, 흉측하고 거대한 심장.

그것이 공동 한 가운데에 둥둥 떠있다. 여기저기에 혈관을 뿌리내린 채 거세게 맥동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하고 말이다.

“… 아, 아스타르트… 어쩌다 그런 꼴이….”

루시가 뒷걸음질치며 중얼거렸다. 요동치는 인간형 심장을 보고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에 다시 시선을 쏟았다.

‘저게, 아스타르트?’

하지만… 그럴 리가.

루시랑 완전히 똑같이 생겼잖아. 어딜 봐도 루시인데?

‘… 아니. 아니다.’

난 새빨간 점막에 둘러싸인 여인을 유심히 쳐다보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묘하게 다르다. 머리에 뿔이 없는 대신 짐승의 뾰족한 귀가 달려있다. 날개가 없고, 꼬리도 짐승의 것처럼 복실한 털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손톱 발톱이 유난히 날카롭다.

루시가 구미호 코스프레를 하면 저렇겠다 싶었다.

“인도하는 까마귀가 하얀 그릇을 가지고, 마녀의 심장을 취하러 온다. 까마귀는 이미 방법을 알고 있다.”

탁탁. 문득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공동의 왼편 구석. 적랑이 거대한 석판 하나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는 적랑의 손가락이 비석과 부딪치며 나는 것이었다.

“석판의 예언에 적힌 구절중 하나지.”

나의 망연자실한 눈을 마주친 적랑. 전에 없을 정도로 흥미 어린 미소가 눈가에 감돌았다.

음험한 기대와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그는 말했다.

“인도하는 까마귀 박정용 군. 어떻게 심장을 취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고 있나?”

알 리가 있냐… 라고 타박을 주려던 나.

직후 입을 콱 다물어야 했다.

[퀘스트 발생 (에픽)]

뜬금없이 등장한 퀘스트 패널이 시야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명칭: 마녀를 죽여라 ― 첫 번째 의식]

[난이도: 전설]

[상세: 마녀의 심부(心腑), 아스타르트의 유해에 도달했다. 가련한 마녀의 심장을 도려내어 그녀를 안식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인도하자.]

[조건1: 신기의 파편, 멸흉검 획득 ― 충족]

[조건2: 신기의 파편, 멸룡검 획득 ― 충족]

[조건3: 신기의 파편을 이용해 마녀의 심장을 파괴 ― 미충족]

[보상: 멸망의 신기 ― 멸망의 대검. 전 스탯 +50. 히어로 센스 +10]

“방법을, 알고 있나?”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적랑은 재차 물어왔다.

나는 화들짝 놀랐고.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내게만 보이는 시커먼 패널을 부릅뜬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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