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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69화 (145/280)

169화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

온 주점이 피로 시뻘겋게 물들고. 마지막으로 서 있는 사람이 나뿐일 때.

문득 주점입구 쪽에서 걸쭉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걸 위해서 내게 거짓말을 시켰던 겐가?”

적랑이었다. 잘린 오른팔과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긴 내가 상세한 건 함구하고 독단으로 움직였으니, 내 의중이 궁금할만도 하지.

“예. 이 새끼를 착각시키려고 그랬습니다.”

나는 정육점 고기가 된 헥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피범벅인 얼굴을 대충 소매로 훑어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적랑이 시체를 훌쩍 뛰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떤 착각 말인가.”

“나한테서 멸룡검을 강탈하고, 죽일 기회가 있다는 착각.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아서 우리가 쉬쉬하고 있다는 착각. 남은 인원들로도 어떻게든 가능하겠다는 착각. 대충 그런 것들이죠.”

“복합적이군.”

“그렇게 됐네요.”

나는 힘 빠진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주점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 내 앞을 적랑이 우뚝 막아섰다. 길게 뻗은 그림자가 내 신형을 뒤덮는다.

나는 피식 웃었다.

“잡아가실 겁니까. 살인죄?”

“일반인이 섞였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군. 공사 구분은 철저해야지.”

“그러십쇼. 섞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순순히 두 손 들어 항복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똑바로 적랑을 쳐다봤다.

잠깐의 뜸을 들인 뒤 한 마디 추가했다.

“저 출소하는 날에는 같이 비즈니스나 합시다. 두부 한 모 들고, 마녀 모가지 따는 법 가르쳐주러 오시면 되겠습니다.”

“호오. 마녀를 죽인다니.”

나는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체포하려면 체포해라. 그런 제스쳐였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자네가 내 말에만 잘 대답해주면, 내 이 주점의 일은 모두 무마해주지.”

적랑이 고개를 저으며 그런 말을 주워섬겼다. 나는 시니컬한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래도 됩니까. 명색이 카발리어인데.”

“이럴 때 안 쓸 거면 카발리어 명패 따위 진작에 갖다 버렸지.”

“허.”

나는 김빠진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제스쳐였다.

“… 헥터 카사스라 했나? 그는 자네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지.”

적랑은 나를 체포하는 대신, 천천히 주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테이블에 대충 걸터앉아 다진 편육이 된 헥터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금의 자네를 보자니. 그 기분이 조금은 공감이 되는군.”

“이런 꼬라지로 있으면 뭐. 그럴 법도 하죠.”

나는 피범벅이 된 셔츠를 짜내며 중얼거렸다. 핏물이 셔츠에서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적랑은 냉큼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 정도 참상은 카발리어 일을 하다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자네의 눈빛을 보고 두려워진 걸세.”

“… 눈빛이요?”

“죽음을 감수한 정도가 아니야. 죽음을 초월한 집착이 느껴진다.”

“그러십니까.”

죽음을 초월이라.

좀만 더 해봐. 점점 진실에 근접하고 있어. 장하다 적랑.

나는 비웃음을 날리며 주점 출구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었다.

적랑은 내 뒤를 따라오며 계속 말했다.

“고작 일주일만에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는 없는 법인데. 자네는… 내가 알던 박정용 군이 맞나? 무엇이 자네에게 마녀를 죽이고 싶도록 만들었나.”

그 말에 자동적으로 걸음이 멈췄다.

상업지구의 왁자지껄한 밤거리. 멀리서 카발리어 쟁탈전 전야제의 떠들썩함이 전해지는 가운데. 적랑은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분명히 전에도 이런 감각을 느꼈지. 자네는 마치… 혼자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일세. 대체 정체가 뭔가.”

… 이건 좀 진심으로 놀랐다.

나를 의심해서 한 번 죽이기까지 한 적랑이다. 그런데 저기까지 진실에 근접할 줄은 몰랐다.

헥터랑 당신 주장을 종합하면 대충 진상이 나오겠네. 나는 복잡한 의미를 담아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가 불사신이라 그렇다면 믿겠습니까?”

적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믿을지도 모르겠군.”

“…… 하하.”

그러시단다. 나는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쳐버렸다.

적랑이 묻는다.

“정용 군, 불사신인가?”

“뭘 정색하십니까. 구라죠 당연히.”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다시 저택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알면. 이제 와서 당신이 뭘 어쩔 거야.’

버스 떠났다. 이젠 믿든 말든 별로 상관없어.

제논의 죽음도. 제나의 죽음도. 루시의 죽음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으 X벌. 드럽게 춥네요.”

나는 태평하게 중얼거리며 팔을 부볐다.

날씨가 쌀쌀하다. 안 그래도 겨울인데 그저께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공기가 폐를 얼리는 듯했다.

나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왜 마녀를 죽일 생각이 들었냐고 물었네.”

어느새 적랑이 내 옆까지 따라붙으며 말했다.

슬쩍 쳐다봤다. 그는 무신의 투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답은 들어야겠군. 자네가 진짜 나와 비즈니스가 하고 싶다면.”

“…….”

“대답하기 애매하다면 선택지를 주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자네의 목적은 셋 중 어디인가.”

우리는 서로 앞만 보며 걸었다.

누군가 지나가다 보면 생판 남인 줄 알 정도로 인간미가 없었다.

나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이거 면접이었습니까?”

“면접일세.”

나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전소된 저택 대문 앞까지 도달했다. 적랑은 거기서 다시 한 번 내 앞을 막아섰다.

대답하기 전까진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기색이다.

“나는 남을 위해서 살아본 적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세계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개X까는 소리. 세계 평화에 관심이 있었으면 불사의 마왕 따까리 재계약을 내가 했겠냐?

“그냥 복수가 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죽인 개새끼들이 지키려던 게 마녀거든요. 지옥에서도 피눈물 나게 해주려고 마녀를 죽이려 합니다. 됐습니까?”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직진으로 부닥쳤다.

적랑은 슬쩍 앞길을 터줬다. 그리고 내 대답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100점. 아니 500점짜리 대답이군. 면접은 합격일세.”

굉장히 흡족한 얼굴이다. 감동 받은 얼굴로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후련한 행색으로 적랑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드물게도 들뜬 목소리로 내게 한 마디 남겼다.

“자네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오겠네. 마녀사냥꾼 박정용 군.”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해서 그렇다.

나는 가트렉 로난과 싸웠던 때를 문득 떠올렸다.

“… 검림의 기사가 그랬습니다. 당신들은 그냥 미친놈년 집단이라고.”

검림을 입에 담자 적랑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나는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채 말했다.

“실제론 어떻습니까. 지금 면접 꼬라지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거 같은데.”

“틀린 말 아닐세. 제정신 아닌 이들만 골라서 권유하고 있지.”

“… 허.”

“제정신이면 받아들이지 않을 일일세. 마녀사냥.”

뭐야 X발. 본인이 쌈박하게 인정해버리는군.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적랑은 내 머쓱한 반응을 보더니 슬쩍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들기며 천천히 멀어졌다.

“내일 아침 7시. 무신의 성전 서쪽 후미진 곳에 대나무숲이 하나 있네. 그리로 오게.”

“…!”

“생명의 은인인 자네에겐 모든 걸 보여주지. 마녀를 사냥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적랑이 나를 스쳐가며 의미심장한 말들을 남겼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돌아봤지만. 적랑은 하나뿐인 손을 휘적이며 대화의 끝을 고할 뿐이었다.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대나무숲….”

아 X발. PTSD온다.

설마 또 내가 뭐 역린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고 보니… 내일 새벽이었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즉시 배낭부터 풀어헤쳤다.

우우웅. 그 사이에 내 상체만하게 커진 루시의 알. 존재감을 발산하듯 음울한 흑색 기운을 무럭무럭 뿜어내고 있었다.

부화가 멀지 않았다.

어쩌면 내일 적랑을 만날 땐 얘와 같이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표면을 한 번 쓸어보고는, 다시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설백이 돌아오는 것도 내일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설백이 향했던 청염의 동굴도 내일 철수한다고 들었다.

카발리어 쟁탈전은 경기 진행 특성상 낮은 끗발의 카발리어들이 굉장히 바쁘다. 그래서 동굴의 수비조도 무신제 인원편성에 맞춰 개편한고 들었다.

설백은 그 교대조에 끼어서 돌아오는 걸로 돼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나겠군.”

그리고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이번에 헥터와 대립하고. 제논을 내 손으로 죽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루시가 깨어나면. 그리고 설백이 돌아오면… 다 같이 불꽃놀이를 보기로 했었지.

‘결정했어. 이젠 망설이지 않는다.’

기껏 열렙해 온 설백에겐 미안한 일이 되겠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곤해서 그런지 수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왔다.

… 루시가 죽은 뒤로, 관짝소년단의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 * *

‘… 이제 곧인데.’

다음날 새벽. 아직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시간이 임박했다. 나는 알 쪽으로 시선을 주시했다.

[부화까지 남은 시간: 5분]

시간은 새벽 4시 40분을 조금 넘겼다.

그녀가 내 앞에서 잿더미가 되고. 딱 사흘이 지나는 시점까지 앞으로 5분.

한 시간 후면 다음 체크포인트다.

그리고 패널이 말한 대로, 그 체크포인트가 바로 알의 부화시점이 될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알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오기만 해 봐라. 내가… 할 말이 아주 많다고.”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다시는 내 대신 죽는 터무니없는 짓을 못 하게 해주겠다. 진실의 방 딱 대라. 최소 10시간 예약이다.

‘온다.’

알의 꿈틀거림은 점점 거세졌고, 표면의 실금도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삽시간에 전체를 뒤덮었다. 새어나오는 칠흑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다 싶은 순간.

쩌저적!

알은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안에 웅크려 있던 누군가의 신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응애예요!”

알에서 깨어난 루시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

이번에도 그것이었다.

“너 그거 컨셉이냐?”

나는 중얼거렸고. 알을 깨고 등장한 그녀를 찬찬히 훑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루시가 새빨간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저 꼬라지를 다시 보려니 좀 거시기하군. 멋쩍어져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뭔가 신선하네.’

사흘만에 본 그녀는 죽기 전과 똑같은 외관이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이마 위로 돋아난 앙증맞은 세 개의 뿔.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까딱거리는 조그만 피막 날개.

그리고 전선처럼 가느다란 검은색의 꼬리.

몸매가 굉장한 것도 여전하다. 오우야.

“… 후하.”

그리고 문득, 루시는 히죽 웃었다.

눈매가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빠져들 듯한 새빨간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난다. 이윽고 그녀는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침대에 한쪽 발을 콱, 얹으며 고압적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네가 나의 수호자로구나. 지금껏 과인을 지키느라 고생했느니라, 나의 충직한 시종아! 내 친히 노고를 치하하마.”

“… 얼씨구?”

마치 나를 처음 보는듯한 행색.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말로 나를 대한다.

시위하는 건가? 나 때문에 자기가 죽었다고 꼬장 피우는 거냐?

내가 눈썹을 튕김에도 아랑곳않고 마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떠벌거렸다.

“하핫.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이렇게 다시 부활한 것을! 어떤 역경도 과인을 막을 수 없느니라!”

“야.”

“이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다시금 파라이소의 천하를 내 손아귀에 넣으려 이 시간, 이곳에 완전히 새로 태어났음을 엄숙히 선포한다! 아하하하!”

“… 귀 먹었냐?”

뭐랄까.

루시의 고압적이고 거만하고 안하무인에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나는 첫 만남 때처럼 화가 나는 한편. 가슴 한 켠에 영문 모를 불안감이 치솟고 있었다.

“음? 가만! 이, 이 냄새는….”

한 술 더 떠. 마왕은 내 몸에 대고 별안간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한 발짝 멀어지며 혐오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더러운 천계 아신들의 냄새… 네놈, 설마 용사인 것이냐?”

“… 야. 무슨 당연한 소리를. 너 대체……!”

가까스로 이어지던 내 말을 루시가 턱, 틀어막아 버렸다.

버려진 개새끼 쳐다보는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이럴 수가! 이번 일생을 함께할 수호자가 더러운 태생이라니. 설마 용사놈들에게 나의 부화장이 발각된 것인가? 그래서 제2계 놈들이 농간을….”

잠깐만. 좀 멈춰봐. 대체 뭐야.

저 반응은 뭐냐. 장난? 아니. 재미없어. 그만해.

더 하면 뇌절이야. 존나 노잼이니까 그만 하라고. 제발.

뭐야.

대체 뭐야. 이 상황은?

“허.”

나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 순간. 멍해진 머리로 잊고 있던 루시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내가 죽어서 수호자 계약이 파기되면, 나는 수호자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는단 말이다.

루시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해줬던 말이다.

―이 대화 전에도 하지 않았느냐? 분명 기억이 안 난다고 했을 텐데.

―아 몰라. 아무튼 진짜 기억 안 난다.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느니라.

지금의 루시…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와는 다른, 나만이 아는 루시.

그녀가 내게 해줬던 말들이다.

―있잖아 용사. 다음에 눈을 뜰 때도. 나를 기억하….

끝맺지 못한 루시의 유언을 마지막으로 떠올렸다.

피식. 헛웃음이 질질 새어나왔다.

“허. 허허.”

그 기억력 좋은 루시가 아무리 노력해도 떠올리지 못했던… 다른 수호자들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잊혀진 것이다.

그것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여봐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어서 설명하거라 시종아.”

“허허허허허….”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하거라! 어서!”

나는 주저앉은 채 헛웃음을 연신 흘렸다. 루시는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다가온다.

루시와 손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오자마자 덥석. 나는 그녀의 나신을 끌어안아 버렸다.

루시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게엑?! 미친! 왜, 왜이래! 놔, 놔라 이 잡것아! 무례한 것! 벼, 변태 시종놈! 호, 혼 좀 나봐야겠구나!”

“허허. 허허허….”

“어, 뭐, 뭐야?! 이, 이럴수가… 힘이… 들어가질 않아? 전생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시종?

개짖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내가 왜 네놈의 시종이냐.

빨리 용사라고 불러라. 전에 했던 것처럼. 나를 용사라고 부르라고.

“허, 허. 허허허허…..”

문득 루시가 몸을 흠칫 굳혔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울고 있느냐? 왜, 왜 갑자기 우느냐.”

“허허허허허….”

“아, 그… 왜,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좀 놔라! 놓고 얘기하자… 아 쫌! 미, 미안하다!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그런 거면… 그, 사과할 테니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발광하는 루시… 아니.

불사의 마왕을 끌어안은 나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레이라. 네 말을 좀 경청할 걸 그랬다.

이 세상은 조빠지게 잔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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