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68화 (144/280)

168화 해바라기

본선전 2일차는 이렇다 할 이변 없이 끝났다.

고작 레벨 150 언저리인 한성광이 낸 어깨의 자상. 우습게도 본선전 가장 큰 이변은 그것이었다.

“제14경기장!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리!”

“제46경기장!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리!”

나는 어제에 이어서 덤벼오는 도전자들을 파죽지세로 쳐부쉈고.

결국 10연승으로 전승 우승을 이루어냈다.

[1위: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3312점]

[2위: 39번 도전자, 파이크 벨문트: 승점 1176점]

[3위: 1501번 도전자, 카르가스 오멘: 승점 1023점]

[4위: 1933번 도전자, 오스카 라일: 승점 954점]

[5위: 7082번 도전자, 진월 소향: 승점 914점]

…….

….

실로 압도적인 점수차로 1등을 거머쥐었다.

죽음을 거듭하며, 아득바득 살아남은 나는 강해졌다. 농담 전혀 안 섞고, 최소 일국의 최강자급으로.

그것을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와아아아아!!”

본선전 10회전이 끝나는 그 순간. 더 이상 ‘피에 젖은 달그림자’의 이름을 비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인기와 경외, 그리고 컬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피젖달! 피젖달!”

“피젖따리 피젖따!”

수많은 관객들이 새빨간 초승달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내 이름을 연호한다.

그 괴상한 가면을 보자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쓰읍.”

저 해괴망측한 건 뭐냐고? 내가 더 궁금하다.

나도 궁금해서 어제 세스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돈 냄새를 맡은 누군가가 벌써 ‘피젖달 굿즈’를 팔아 처먹는다 카더라.

최소한 원작자 허락을 맡을 것이지. 상도덕도 없는 색기.

“이것으로 무신제 본선전의 종료를 선포한다! 호명하는 도전자들은 단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전처럼 수염쟁이 중년 카발리어 아저씨가 본선의 종료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곧장 본선전의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내일부턴 대망의 카발리어전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로 상금 줄 거 다 주고, 순위권자들의 카발리어전 참전여부를 가려내는 것이다.

그래야 100위권 밖의 사람들에게 참전 기회를 빠르게 넘겨줄 수 있으니까.

“무신제 본선전 1위!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부상으로 금화 1만 냥과 멸룡검을 하사한다!!”

스르릉.

중년 카발리어가 건넨 멸룡검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황금색으로 달빛을 머금은 용문장이 눈부셨다.

이 검도 뽑으면 막 흑화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뭐 이런 생각과 함께 손잡이를 집는 그 순간.

[에픽 ― 알림: 멸망의 신기가 공명하고 있다.]

패널이 떠올랐다. 루시와 관련된 상태창과 똑같은… 칠흑처럼 시커먼 색깔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패널의 상세 항목을 유심히 읽어 내려갔다.

[상세 정보 ― 멸망의 신기]

[둘로 분열된 멸망의 신기(神器), ‘멸망의 대검’이 한 곳에 모여 이끌리고 있다. 마녀의 심부에서 의식을 치를 시, 파편이 결합되며 신기는 본모습을 되찾는다.]

우우웅.

멸룡검이 낮게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공명의 대상은 등에 메고 있던 멸흉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개의 검을 모두 보유한 내게는 확실히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 본모습을 되찾아?’

무슨 의식을 하면 두 검이 합체라도 한다는 건가.

정확한 의미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 받은 멸룡검과, 등에 멘 멸흉검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건 확실하다.

‘역시 예상대로다.’

헥터 카사스가 노리던 건 바로 이 우승상품, 멸룡검이었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멸룡검을 멸흉검 옆에 동여맸다. 가드의 용문장이 달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빛을 뿜었다.

“카발리어 쟁탈전에 참전할 영광을 거머쥘 자,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라!”

상금 수여식이 종료되자, 곧바로 카발리어전 선수 선발이 이어졌다.

카발리어와 관객 모두의 이목이 단상으로 바짝 집중된 가운데.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저벅. 일관된 동작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다.

“핫!”

처척! 절도 있는 마르크트레스식 경례를 올리는 예비 카발리어들.

나 외에 전원참여는 좀 의외다. 생각보다 참여율이 높군.

하긴, 딱 봐도 복면쓴 놈은 나 밖에 없으니 당연한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문득 예비 카발리어들의 시선이, 이번 대회 가장 큰 이변이었던 내쪽으로 일거에 쏠렸다.

“……?”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넌 X발 눈치도 없냐. 빨리 나와서 경례 박아라. 눈빛으로 불같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 친구들 뭘 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나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 저는 카발리어 관심 없습니다. 수고하십쇼.”

내 말은 수정거울을 통해 관객들 전체를 향해 쩌렁쩌렁 재방송 되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이 강림했다.

그리고 직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소란이 강림했다.

* * *

카발리어전 리타이어 선언을 한 나는, 챙길 거 다 챙겨서 곧장 경기장을 나왔다.

변장을 풀고 경기장 출입구 부근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아깝구만 아까워. 그런 괴물이 카발리어가 돼야 하는데 말이야.”

“잘난 척하는 미텔란트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이슈는 피젖달의 뜬금 카발리어 출마 거부(?) 선언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힘을 푼돈 버는 데나 쓰다니. 그건 이미 범죄야 범죄! 그렇잖나?”

“내 말이 그 말일세. 쩝… 이 피젖달 가면 버려야 되나? 비싸게 산 건데.”

“버려, 버려.”

길거리 도처에 피젖달 가면이 헌신짝처럼 널브러져 있다. 고작 1시간 전과 대우가 천지차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잖게 넘겼다.

‘X대로 떠들어라.’

세간의 평가는 아무래도 좋다.

지새끼들은 나한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왜 너희들은 내가 지켜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냐. 이기적인 새끼들.

길 가다 마왕 소환돼서 아리랑치기나 당해라 X발.

“정용 형님! 형님 드디어 끝나셨군요!”

속으로 시민들 씹다 보니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들었다. 상업지구 쪽 길목에서 한성광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조용히 물었고. 가만히 한성광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누굽니까! 마포구 빠른발 한성광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성광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이 쪼가리 하나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말하신 그놈 찾았습니다!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 오호.”

나는 가만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공이다. 역시, 놈은 내 예상대로… 아직 나를 감시하고 있었어.

나는 한성광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프레들 머시 ― 남자. 반쯤 벗겨진 검은 머리. 검은 눈. 배불뚝이. 외관 4―50대쯤.]

[비틀대는 거인 ― X]

[거인과 마녀와 요정 ― X]

[사랑에 빠진 거인 ― O]

내가 어젯밤, 한성광에게 부탁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이 도시 어딘가에 있는 프레들 머시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 하나를 찾아낼 것.

결정적인 힌트로는, 놈이 반드시 수정거울이 달려 있는 술집에 숨어있을 거라고 해줬다.

―걱정 마십쇼 형님! 제가 한국에서 흥신소 하다 왔슴다! 이런 건 전문이죠!

한성광은 생각보다 흔쾌히 수락했다.

자기의 2일차 무신제까지 깔끔하게 기권해버리고 수색에 나서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제로 한나절 만에 놈을 찾아냈다.

흥신소 했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다.

‘사랑에 빠진 거인. 술집 이름 한 번 븅신같네.’

네 제사상에 올라갈 술집인데, 좀 잘 고르지 그랬냐 헥터 카사스. 으드득, 조용히 이를 갈아붙였다.

나는 한성광의 어깨를 툭툭 쳐준 다음. 천천히 상업지구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일 좀 보고 온다. 제자 건은… 일단 생각 좀 해볼게.”

“아 예!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십쇼!”

“오냐.”

한성광은 능글맞게 웃으며 직각으로 인사를 박았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성광을 뒤로한 채 상업지구로 천천히 전진했다.

‘끝장 보자. 헥터 카사스.’

저벅저벅.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체내 깊숙한 곳에서 끈적한 살의가 펄펄 끓어올랐다.

* * *

“오오! 이게 누구야! 피에 젖은 달그림자 선생! 이리 와 앉게 어서!”

헥터 카사스… 아니.

프레들은, 내가 주점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는 체를 해왔다.

“무신제 본선 1등 축하하네! 이건 내가 쏘는 거니 어여 들어!”

나는 프레들의 손짓에 따라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의 자리에는 혼자 먹기엔 지나치게 많은 진수성찬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만히 훑다가 툭 물었다.

“… 웬 겁니까 이게. 누구 생일입니까?”

“음? 하하! 자네에게 경사스러운 날이잖나! 내 자네가 아들 같아서 챙겨주고 싶어서 그래 이 사람아!”

마치 내가 이곳에 올 것이라도 예상했다는 행색이었다.

아니. 기다린 게 맞을 거다. 내쪽에서 먼저 찾아오지 않았으면… 저쪽에서 날 찾아왔겠지.

기회를 보다가 멸룡검을 탈환하기 위해서. 지금처럼 친한 체를 오지게 했을 테다.

‘이럴 줄 알았어.’

멸룡검만 내가 갖고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쪽이 내게 커넥션을 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악착 같이 무신제를 끝까지 치른 거다.

마치 지금처럼. 내가 아직 자기 정체를 모르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을 테니.

그러니 저런 말도 하는 거겠지. 아들 같다느니 어쩌느니.

제 발로 사지에 기어들어와 줬으니, 얼마나 기특하겠냐.

‘아들 같냐? 내가.’

X발 X빠는 소리 쳐하고 자빠졌네.

내 진짜 아빠는 살아생전에 이런 진수성찬 차려준 적 없어. 집구석이 빚 때문에 X같이 가난했거든.

내 목숨 노리는 가짜 애비한테, 이세계 와서야 처음 받아보는 진수성찬이라니. 인생이라는 게 참 X같다 그지?

그래 안 그래 X발련아.

“후우.”

나는 심경이 복잡한 나머지 프레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수정거울을 가만히 쳐다봤다.

수정거울에서는 칠마존 베라와 베르켈이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오. 마침 전야제 때였구먼.”

프레들도 나를 따라 수정거울에 시선을 박았다.

칠마존 베라와 베르켈이 빛의 새들을 경기장 위로 수놓는다. 카발리어전의 전야제라는 듯하다.

“밤에 보는 게 또 장관이지.”

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빛의 새. 프레들 말마따나 낮보다 세 배는 아름다웠다.

그는 빨려 들어갈 듯이 수정거울을 쳐다보고 있다. 전생에 같이 개회식을 치를 때.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 마법을 좋아한다던 말은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흐흑. 크흐. 으흐흑….”

그 순간. 어디선가 구성진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이었다. 누군가 아름다운 장관에 감동이라도 받은 것일까. 유난히 선명하고 한맺힌 울음소리다.

수정거울을 쳐다보던 프레들이 혀를 낮게 찼다.

“쯧쯔. 이런 경사스런 날에, 누가 이리 서럽게 울고 지랄인고.”

프레들은 눈매를 좁히며 다른 테이블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범인을 찾지 못한 그가 짧게 투덜거렸고. 다시 수정거울로 시선을 옮기는 찰나.

“나다 이 10새끼야.”

나는 연화를 사용해 순식간에 프레들의 후방으로 이동했고.

푸직. 섬전처럼 뽑아든 베스타크를 놈의 목구멍에 쑤셔 박았다.

카카카카칵!

프레들의 정수리에서 선명한 해골 표식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내가 술집에 들어올 때부터 찍어놓은 사냥 표식이다.

치명타가 제대로 터졌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 크, 억.”

너는 잊어버렸겠지만.

아니, 겪은 적이 없었겠지만.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헥터 카사스.

전생에 너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

‘내가 이래봬도 육탄전엔 좀 약하다’라고.

“너… 그러면 안 됐어.”

이해해. 수백 년을 살았어도 일단 마법사니까.

반사신경이나 움직임은 테크니션 계열인 나를 절대 따라올 수 없겠지.

그래서 정말 힘들었다. 이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르고. 완벽한, 절호의, 단 한 번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X발 존나게 힘들었다고. 알간?

“어… 크, 어걱…!”

부릅뜬 눈으로 나와 베스타크를 번갈아 쳐다보는 헥터. 껄떡거리는 목젖 위로 시커먼 검날이 솟았고. 검붉은 피가 찔끔찔끔 새어나온다.

나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옷깃으로 훔쳐냈다. 흐릿한 시야 위로 제논과 제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루시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검을 뽑았다. 가슴을 찔렀다.

다시 뽑았다. 배를 찔렀다.

푸직, 우득, 빠직, 퍼거걱!!

“속이 후련했…… 냐!!!”

에스파다도 꺼내들었다.

찔렀다. 뽑고 찔렀다. 또 찔렀다. 마구 찔렀다.

미친놈처럼 본능에 따라 칼을 휘둘렀다. 영혼을 토하는 듯한 헥터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카, 아, 가아아악!!”

이번엔 변명할 틈도, 인성질할 틈도, 아가리 뻥긋할 틈도 주지 않겠다.

한 마디도 지껄이지 말고. 이대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뒤져라 프레들.

아니, 헥터 카사스.

“이, X발새끼들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욕지거리를 으르렁거렸다.

헥터에게서 사람 형체가 없어지고, 잘게 다진 편육이 된 뒤에야 내 칼질은 멈췄다. 테이블의 진수성찬이 흥건한 피로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내 얼굴과 온몸도 마찬가지다.

“…….”

거친 숨소리가 선명해질 정도로 적막이 감돌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경악과 공포에 찬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박정용이 돌아왔구나. 우리 박정용이 슬퍼서 어쩌냐.

수호 형님이 분위기를 읽고 패러디에 맞장구 쳐줬다.

이런 쪽으론 또 눈치가 귀신같다니까. 나는 절묘한 상황이 웃겨서 실실 쪼갰다.

“흐. 흐흐. 흐하하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히익,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신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희번득한 눈빛을 흩뿌렸다.

“흐, 으흑… 자, 잘못했어요… 주, 죽이지 마세요….”

문득 가까이 있던 여종업원이 눈물을 쏟으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사타구니가 빠르게 젖어들어간다. 오줌을 지린 듯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짧게 말했다.

“관계없는 사람들은 나가 있어. 뒤지기 싫으면.”

“흐익! 고, 고맙습니다!!”

우르르르. 분주한 발소리가 쏟아진다.

내 앞에 있던 종업원은 물론이고. 영문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퉈 입구 쪽으로 몰렸다.

“…….”

인파가 일거에 빠져나가자, 주점 안은 압도적인 침묵이 자리했다.

남은 이가 열 명 좀 안 되었다. 하나 같이 잔뜩 굳은 얼굴로 헥터의 시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인원이 조촐하다? 응?”

주점을 통째로 조직원으로 메웠던 전생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그렇겠지. 이미 그저께 새벽의 야습도 실패했고. 무신제 침투조도 전부 암살당했으니.

그나마 최대한 끌어모은 게 이 정도였던 것일 테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이치라더라.”

피와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베스타크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놈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얼굴을 훑었다. 그들의 표정에 떠오른 망연자실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쓰레기 헥터 새끼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짓는 네놈들이, 일반인일 리가 없지.

“지금부터 너희들한테 벌을 줄 거다.”

상태창은 열 시간도 아깝다. 난 분명 통보했다. 관계없으면 나가 있으라고.

지금부터 여기 있는 새끼들은 모두 헥터 따까리다. 아니어도 그런 걸로 한다.

전부, 죽여 버리겠다.

“달게 받아라.”

키이잉!

피로 번들거리는 베스타크를 잔당들에게 겨누었다.

어검술로 에스파다에 마력을 주입했다. 검집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 에스파다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하세기이이이!!”

놈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성난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피보라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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