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대회는 이틀 동안 바쁘게 이어졌다.
“제36경기장, 개전!”
“제19경기장, 개전!”
예선과 달리 한 경기당 제한시간은 5분.
총 500명이 2명씩 매치되어 10세트를 치루니까… 250 경기씩 10세트. 경기장이 50개가 있으니 한 세트 돌리는 데 약 25분. 10세트면 총 250분이 걸린다.
물론 경기장의 수습이나 쉬는 시간 등. 로스타임이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본선 경기는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다.
“제36경기장 승자, 에릭 슈갈트! 승점 10점 획득!”
“제19경기장 승자, 니아토 베레사! 승점 10점 획득!”
‘자기가 직접 대전 상대를 고른다’라는 특이한 리그 방식의 본선전.
다만 대전상대를 정하는 우선순위가 승점이 낮은 사람 순이기 때문에, 1세트는 예선 때처럼 무작위 선발된 상대와 싸워야 했다.
“제41경기장 승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10점 획득!”
내 1세트 상대는 레벨 200언저리의 남자 용사였다.
사슬낫을 들고 경기장을 폴짝폴짝 산만하게 쏘다니던 그는, 내 뒤를 잡기 위해 개발악을 하다가 오히려 뒤를 잡혔고. 그대로 배때지를 관통당해 싱겁게 산화했다.
“제8경기장 승자, 잭슨 프로스트! 승점 14점 획득!”
“제50경기장 승자, 빈센트 가르시아! 승점 34점 획득!”
그리고 2세트부터는 육체적인 싸움과 더불어. 대전 상대를 고르는 전략 싸움이 곁들여졌다.
본선전의 진면목이 여기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제22경기장 승자, 용혈 계곡의 타라칸! 승점 31점! 연승 보너스 30점! 총 61점 획득!”
승점은 기본적으로 10점.
2회전부터는 상대를 얼마나 압도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 30초당 1점으로 합산된다. 또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면 20점이 추가 합산된다.
즉 같은 승리라도 최소 10점에서 최대 39점까지, 경기 내용에 따라 승점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제31경기장 승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39점! 연승 보너스 30점! 총 69점 획득!”
또한 연승 보너스 승점도 있었다.
연승을 거머쥘 때마다 30점, 60점, 90점… 30의 배수로 점점 더 높은 승점 보너스를 받게 된다.
이 보너스의 경우 연승을 이어갈수록 받는 승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연승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제31경기장 승자, 로멜로 디바르토! 승점 31점! 연승 절단 보너스 50점! 총 81점 획득!”
3회전부터는 ‘연승 절단 보너스’라는 것까지 추가되었다.
연승보너스가 30의 배수라면 연승 절단은 무려 50의 배수다. 상대가 2연승일 때 내가 패퇴시켰으면 50점. 상대가 3연승 중이면 100점. 이런 식이다.
“제26경기장 승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37점! 연승 보너스 60점! 연승 절단 보너스 50점! 총 147점 획득!”
내 생각처럼 ‘10연승 하면 뭐 대충 1등이겠지’라는 식의 간단한 룰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보다 실력이 한참 밑돌아도 나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할 수 있는 구조다.
관객 입장에선 경기 박진감을 자극하는 구조. 도전자 입장에선 골치 아픈 구조다.
‘생각보다 체계적이군.’
그래서 나 역시 사냥 타깃을 유동적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내가 노리는 것은 무조건 연승을 많이하고 있는 놈들. 현상금(?)을 두둑하게 뱉을만한 승점 상위의 랭커들이었다.
뭐, 사실 3회전이 끝난 뒤부터는 1등을 계속 유지했고.
덕분에 내가 상대를 선택할 일도 깔끔하게 없어졌지만 말이다.
“다음 선택권자! 현 승점 2위, 1933번 도전자 오스카 라일! 남은 도전자가 한 명뿐이므로, 상대는 자동 선택됩니다!”
생각보다 연승 절단을 노리는 놈들이 별로 없었다.
하긴. 나름 쟁쟁한 본선에서 연승하고 있다는 소리는,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는 소리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회다. 도전해오는 건 그만큼 절박한 궁지에 몰린 이들뿐이겠지.
“그 상대는! 현 승점 1위,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그래서 압도적 승점 1위에 마킹한 내게 싸움을 거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고. 그건 상위 랭커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4회전 경기부터는 사실상 윗물끼리 물고 빠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내 상대는 웬만하면 현 승점 2위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다.
“칠리콩까네 칠리콩까네, 칠리콩콩까네~.”
4회전 상대는 ‘오스카 라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300레벨 초반 대 용사였다.
놈은 거대한 처형도끼를 사용하는 파워형 전사였지만. 나는 놈의 레벨을 보자마자 기공술과 에테르까지 전부 사용해 버렸다.
그리고 파워형 전사인 놈을 압도하는 파워로 찍어 눌러버렸다.
“하, 하… 항복하겠소.”
오스카 라일의 주변에 떠 있는 수십 개의 마력 칼날과, 어검술로 떠 있는 에스파다.
놈이 망나니처럼 휘두르던 도끼는 진작에 손모가지와 함께 장외를 나뒹굴고 있었다.
놈이 새하얘진 얼굴로 항복하고. 허겁지겁 떨어져나간 손모가지 붙이러 사제에게 달려가기까지. 고작 47초 걸렸다.
“제12경기장 승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38점! 연승 보너스 90점! 연승 절단 보너스 100점! 총 228점 획득!”
5세트 경기가 되자, 아직까지 4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놈은 나밖에 없었다.
상위 랭커들도 제들끼리 치고받다 보니 모두 연승이 깨져버린 것이다. 죽어서 뼈 묻은 사람도 간혹 있었고.
나는 대형 수정거울의 점수판을 슬쩍 올려다봤다.
[1위: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승점 454점]
[2위: 39번 도전자, 파이크 벨문트: 승점 276점]
[3위: 1933번 도전자, 오스카 라일: 승점 248점]
[4위: 1501번 도전자, 카르가스 오멘: 승점 192점]
…….
….
‘6세트쯤이면 콜드게임 만들 수도 있겠는데.’
대충 계산을 해보니 그런 견적이 나왔다.
다음에 연승을 하면 120점이 추가. 그리고 거기서 또 연승을 하면 150점이 추가된다. 나 외에는 이제 연승도 다 잘려서 절단 보너스도 끽해봐야 50따리, 100따리다.
적당히 연승 수가 높은 랭커가 앞으로 두 번 정도 걸려주면. 이제 아무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당장 내가 내뱉을 현상금 상점만 150포인트다. 져버리면 단박에 1위가 역전될 수도 있다.
혹시 모르는 거니 긴장은 늦추지 않아야 한다.
“… 놀랍습니다! 도전자가 지목한 상대는! 현 승점 1위,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그런데 그 순간.
사회자의 목소리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뭐가 어째 X발?’
나를 지목했다고? 대체 누가? 아까 2위 놈을 47초만에 개박살 내는 걸 못 본 거냐?
경기 진행상황 따윈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 때만큼은 내 이목이 온통 집중되었다. 황급히 수정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 허.”
그리고 거울에 떠오른 대문짝만한 이름을 보고, 나는 헛웃음과 함께 납득해 버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너 이 개새끼! 내가 개쳐발리는 한이 있어도! 한 대는 때리고 가야겠다!!”
그렇게 시작된 오늘의 마지막 경기, 5차전.
상대는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나와 비슷한 체격과 비슷한 피부색. 거대한 참마도를 든 더벅머리의 청년.
호기롭게 외치는 그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김치맨 종특이 지고는 못 살지.”
‘한(恨)’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서라고 누가 그랬던가.
한성광이었다. 패자부활전에서 바득바득 기어올라온 건지 어쩐 건지. 예선전에서 내게 숟가락으로 무참히 패배한 굴욕과 원한을 복수하러 돌아온 것이다.
“좋아. 어디 덤벼 봐라. 꼼수 없이, 검으로만 상대해 주지.”
방금 내뱉은 건 준비했던 도발 대사가 아니다.
정말 순전히, 한성광의 악바리에 탄복해서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난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웬만하면 지킨다.
스르릉! 나는 오직 베스타크 한 자루만을 뽑아든 채 한성광을 대치했다.
“제42경기장, 개전!”
묵직한 긴장감이 심판의 한 마디로 박살났다.
나와 한성광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하아앗!”
“흡!”
키이잉!
기합과 신형이 교차한다. 잠깐의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털썩. 한성광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긴 상처가 생겨 있었다. 피가 콸콸 쏟아진다.
“탑차이.”
베스타크를 털어내며 시크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내 장난기 어린 눈을 마주친 한성광. 그의 눈이 순간 부릅뜨였다.
“야, 이… X바, 너 하, 한국인…!”
한성광이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을 번쩍 들어 패배를 시인했다.
“존나게… 빠르네, X팔….”
아마 관중석의 야무치 꿈나무들에겐 잠깐의 교차처럼 보였겠지만. 그 짧은 사이 5번의 합이 오갔다.
레벨차가 있다 보니 한 합이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한성광의 반응속도가 빨라서 놀랐다.
‘존나게 빠르네’는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도 레벨이 너무 후달려.’
아무렴 예선 때는 내가 후달려서 흉인 살포를 쓴 줄 알았냐.
그냥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했던 거다. 애초에 나한테 비빌 레벨 자체가 안 된다고.
“와아아아아!!”
공기마저 요동치는 엄청난 함성 속에서 나는 낮은 한숨을 흘렸다.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대기실로 돌아가며 ‘헥터 카사스를 어떻게 조질까’로 열심히 고민하던 와중.
피싯. 나는 팔뚝 언저리가 따끔한 느낌을 받았다.
“… 어?”
어느새 얕은 검상 하나가 생겨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퍼뜩 한성광에게 시선을 박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사제들의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새끼. 좀 치네.’
사실 5합이 아니라 6합이었다니.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나름 비장의 기술을 섞어놨던 모양이다.
한 대는 때려야겠다 그러더니. 소원성취 했군 그래. 나는 피식 웃으며 도전자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5세트까지의 본선전 1회차 경기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그날 밤. 세스나의 칭찬과 축하를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던 내 앞에는….
“형님! 열렙하신 비결 좀 알려주십쇼!”
한성광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런 말을 하며 그랜절을 박았다.
‘이건 또 무슨 경우냐.’
골치가 아파진 나머지 이마를 짚었다.
적랑도 케른에서 날 보고 이런 기분이었겠군. 새삼 역지사지가 돼서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제자 안 받아. 딴 데 알아보슈.”
“형님!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형님의 강력함에 반했습니다! 평생 개처럼 따를 테니 저를 강하게 만들어주십쇼!”
“아 좀 꺼지라고.”
“아 형니임! 가, 같은 한국인 아닙니까! 이 머나먼 이세계까지 떨어진 마당인데, 한민족의 정이 있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비결이 뭡니까 대체!”
이젠 한민족까지 팔아 치우는군. 그만 해 제발.
네가 그럴수록 적랑한테 구질대던 내가 떠오르잖아. 남의 흑역사 들춰내지 말고, 저리 가라 이 악마야.
‘아니지. 잠깐.’
나는 질색하며 한성광의 뒤통수를 내려보다가, 문득 낮은 탄성을 흘렸다.
생각났다. 이 새끼를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똥찬 방법이.
“… 뭐든지 한다고. 너 지금 말했지.”
내가 의미심장하게 물었고. 한성광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 이러세요 형님…?”
“왜. 쫄지 마.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내가 잡아 처먹냐?”
“지, 지금 눈빛만 보면 잡아드실 것 같은데요….”
바짝 위축돼서 어깨를 부들거리는 한성광.
내가 한 발짝씩 다가갈 때마다 그도 한 발짝씩 몸을 뒤로 물린다. 한동안 그렇게 지리멸렬한 대치가 계속됐고. 얼마 못가 끝을 맺었다.
턱. 놈의 뒤로 벽이 들어선 것이다.
“흐, 힉.”
한성광이 등 뒤에 닿는 감촉에 흠칫 놀란다. 나는 그 사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놈은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가만히 내려다보자, 한성광은 손을 휘적이며 황급히 말했다.
“혀, 형님! 전에 싸가지없이 군 건 제가 진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뭔 목숨 타령이야. 안 죽인다니까.”
말과는 다르게 난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성광의 코앞에서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우리의 시선이 지척에서 얽힌다.
좋아. 가오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잡았고.
이제 한국 영화에서 빠지면 섭한 그 대사를 칠 시간이다.
“너. 나랑 일 하나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