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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63화 (139/280)

163화 루트1 ― 재계약을 이행한다

나는 루시의 유언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당연히, 망설일 것도 없이 1번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게 정말 최선일까요?”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나를 저지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똥털이 거기에 있었다.

“… 왜 안 나오나 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방을 둘러보자, 역시나 시간이 멈춰있었다. 쏟아지던 빗방울이 공중에서 멈춘 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진풍경이 보였다.

퍽이나 장관인지라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넌 왜 여기에 있지?”

징글징글한 눈빛을 보내줬다. 미네르바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장 대꾸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요. 자기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라고. 좀 남이 생각해서 조언하면 듣는 시늉이나 해요. 진짜 드럽게 고집만 세 가지고는.”

“…….”

신랄한 야유가 날아왔다.

지금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얌전히 아가리 닥치고 새겨듣기로 했다.

보나마나 똥털이 내 모습을 비웃겠거니 싶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버려진 개새끼 쳐다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 꼴을 좀 보란 말이에요. 벌써… 몸이고 정신이고. 그렇게 너덜너덜해졌잖아요. 쯧.”

시선은 물론이고 말투에도 적잖은 동정이 담겨 있었다.

저 말. 분명 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언제였더라? 잘 모르겠다. 기억이 어렴풋하다. 지금은 깊게 생각할 기운도 없다.

내가 지친 눈으로 미네르바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어쩔 셈이죠? 계약을 이어나갈 건가요?”

“… 뭐, 그렇겠지.”

“한적한 곳에서 띵가띵가 살다 죽는 게 꿈이라면서요. 지금이 그 꿈을 이룰 적기 아닌가요?”

또 저 소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을 똥털 앞에서 내뱉은 기억은 없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전에 케른에서도 느꼈지만. 생각을 읽히는 것 같아서 심히 불쾌하다.

“당신이 계약을 잇지 않으면 곧바로 회귀점 붕괴가 시작돼요.”

내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미네르바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발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 먹었던 점심 메뉴 말하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흉마를 짊어진 채 회귀점만 없앨 수도 있어요. 그러면 기억을 잃지 않는 것도 가능해요. 하지만 이미 미칠대로 미친 당신을 원치 않는다면, 회귀점과 함께 흉마를 없애서 모든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하죠.”

“아예. 그러십니까.”

어차피 난 이미 계약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전문하사 할 거다. 그러니 상관없는 소리다. 한 귀로 듣고 반대 귀로 흘렸다.

그러나 직후. 도저히 흘릴 수 없는 말이 마빡으로 쑤셔 박혔다.

“혹시 당신이 여기서의 모든 시간을 버리고 싶다면. 회귀점 붕괴와 함께 최초의 순간으로 당신을 회귀를 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요.”

“… 뭐?”

“그래, 당신이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완전히 처음으로 시간을 돌리는 거죠.”

나는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 중얼거렸다.

“… 처음으로?”

“네. 당신이 죽었던 횡단보도 기억해요? 아마 그 직전까지 돌아갈 거예요. 좋겠어요. 당신 나 싫어하잖아요. 나와의 만남도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거예요.”

미네르바가 건조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나는 이내 헛웃음을 실실 흘렸다.

“내가 루시한테 듣기론. 흉마가 한계까지 찼을 때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던데….”

“내가 있으면 가능해요. 마녀의 피조물이 사용하는 조악한 시간마법 따위. 제약만 아니면 애들 장난거리예요.”

“…….”

“그러니까 다른 회귀점으로 돌리는 건 불가능해도, 가장 최초의 순간은 가능해요. 거긴 이쪽 세상이 아니라서 제약의 효력이 없거든요.”

아까보다도 단호해진 목소리. 반박하던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미네르바를 쳐다봤고. 그녀는 내게 손을 뻗어왔다. 거의 동시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을 해줬어요. 불사의 마왕이 잊고 있었던 원래의 의지를 되찾는 것. 내가 바란 당신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

“이제 당신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쉬어도 좋아요. 여기서의 고통스러웠던 모든 기억은 전부 버려요. 내가 허락할게요.”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었다.

“이세계 왔더니 나 걱정해주는 여자들 많네. 기분 째진다 X발.”

루시에다 똥털까지. 죄다 걱정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본 사람들이다. 세스나나 설백이 이랬으면 내가 이해라도 하지.

박정용 24년 인생에 유래 없던 의문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걸 어째.’

똥털아. 날 반년 넘게 관음하고도 아직도 모르냐?

넌 날 쉬게 하고 싶었으면. 오히려 쉬지 말라고 닦달했어야 됐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박정용 패시브 스킬이 발동됐다.

이유없이 똥고집 부리기.

“너도 나 좋아하냐? 하 X발 내 와꾸가 죄가 좀 많긴 해. 사형감이지 사형감.”

나는 능글맞게 농담을 던졌다.

물론. 미네르바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갔다. 입만 닫고 있으면 천사 같던 그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분명 말했죠. 중간에 개족같은 소리 좀 자꾸 끼워넣지 말라고. 기껏 생각해서 도와주겠다는데, 정 떨어지게 이럴래요? 사형 당해서 뒤져볼래요?”

똥털이 화났다. 극대노했다.

처음에 루시를 인계받을 때도 살살 긁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시퍼런 쌍욕 처먹은 건 또 처음이다.

업계 포상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꼬우면 돕지 마. 애초에 계약 연장한다니까! 허언갤주 아웃 새꺄.”

나는 퍼뜩 손사래를 치며 태연하게 말했다.

미네르바는 슬쩍 숨을 삼키더니, 곧 목청을 높였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였다.

“… 대체 뭐가 당신을 이렇게 바꿔놓은 건가요. 귀찮은 건… 싫어하잖아요! 불사의 마왕 옆에 있으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더 당해봐야 알아요? 그 정도로 등신인가요?”

미네르바는 아까보다도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방금까지가 분노였다면 이번에는 의문스런 얼굴이다.

“너는 또 왜 그런 표정이야.”

그 얼굴을 보니 나까지 의문이 들었다.

미네르바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황급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표정이라니요. 제가 뭘요?”

“네가 권해서 시작한 일이잖아.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좀 이상했지.”

“…….”

“야. 네가 시켜놓고 왜 그만두게 못해서 안달인 거냐 대체.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대체 뭐야?”

미네르바는 내 질문에 입을 닫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노코멘트라 이거지. 또 천계의 규율인가 그거냐? X발 대체 기준이 뭔데.

막노동판 안전감시단도 쟤네보단 지랄하는 기준이 확실하겠네.

‘왜 저렇게 안타까운 표정이냐고. 지가 시켜놓고.’

이해를 못 하겠다.

됐다. 이제 딱히 이해하고 싶지 않다.

사나이 박정용. 24년 한평생 노빠꾸 노퓨쳐 예스 상남자로 살아왔다. 한 번 정한 길, 후퇴 따위 없다.

나는 장절한 어조로 미네르바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바뀌긴. 진정한 사랑만이 사람을 바꾸는 법이지. 루시의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이 겨울처럼 얼어붙은 내 마음에 봄을 불러왔다… 랄까나~.”

“아니 X발 진짜….”

저 반응은 좀 위험한데.

농담기 전혀 없는 ‘아니’, ‘X발’ 콤보가 나왔다.

‘랄까나~.’가 좀 오바빤스였던 듯하다.

“나, 나는 등쳐먹힌 건 갚아주지 않으면 억울해서 잠을 못 잔다고!”

미네르바가 정색을 빨고 한 걸음씩 성큼성큼 다가오길래 잽싸게 말을 바꿨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네르바는 번쩍 들어올렸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리고 화를 꾹 눌러 참는 목소리를 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고운 손으로 물리적 업계포상을 받았겠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나는 말을 이었다.

“미친 듯이 뚜드려 맞기만 했다. 헥터 카사스한테 제대로 반격도 못 했어.”

“… 허?”

“개 줫같잖아. X발.”

미네르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말을 들었음에도 이해가 안 되는 듯하다.

이해 안 될 게 뭐가 있냐. 말 그대로다. 이대로 모든 기억을 잃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라고?

‘X까. 그렇게는 못하지.’

그러면 내가 지는 거잖아. 도망치는 거잖아.

싫다고 X팔. 내가 왜.

난 아직 그 배불뚝이 탈모 노친네 새끼한테 지지 않았다. 이대로 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꼬리 말고 도망칠 생각도, 추호도 없다.

“안 끝났어 X발. 내 싸움은 지금부터다.”

인기부진으로 급마무리된 만화 같은 말을 주워섬겼다.

말로 내뱉다 보니 점점 목적의식이 뚜렷해졌다. 지독한 공허함에 억눌려 있던 한 가지 감정이, 기름불처럼 치솟는다.

“헥터 카사스. 그 새끼만은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조지고 만다.”

분하다.

X발 진짜 존나게 분하다.

어떻게든 놈에게 꼽을 주고 싶다. 분탕쳐주고 말겠다.

세계의 균형인지 X발인지.

같잖은 제 목적 이루겠다고 루시를 조종하고. 제나를 죽이고. 제논을 이용하고. 타라를 울리고.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에 빠뜨린 천하의 개썅놈한테.

아직 면상에 주먹 한 방 못 꽂아봤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단 말이다.

“멸룡검도 내가 가져갈 거고. 아득바득 빼앗으려 했던 루시도 내가 지킨다! 그 새끼 모가지도 내가 뽑아버리고 만다!!”

콰직! 나는 주먹을 힘껏 쥐어 지면을 후려쳤다. 그 반발력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일어나야 할 이유를 드디어 찾아냈다.

나는 높아진 눈높이로 미네르바를 내려다보며 서슬퍼렇게 말했다.

“세상의 균형. 내가 개박살 내줄게.”

용사가 마녀를 죽이지 못하게 해?

어디 해봐라. 내가 직접 마녀 모가지 뽑아버릴 거니까.

그러자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 조직의 이름이었다.

‘… 마녀사냥꾼.’

적랑이라면. 그리고 마녀사냥꾼들이라면 내 복수에 도움을 줄 것이다.

아니, 불사의 마왕 따까리인 나를 돕고 싶진 않을지라도. 마녀를 죽여서 헥터 카사스의 배알을 꼴리게 만드는 작업은 도움을 주겠지.

‘결국 적랑의 말대로 되는 건가.’

장난 아니네. 고레벨 용사의 히어로 센스.

내가 적랑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고 있자니.

“그러네. 당신은… 그런 사람이기도 했네요.”

미네르바는 씁쓸하게 한 마디 남기더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솨아아아―.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미네르바가 빗줄기 너머에서 문득 이쪽을 슬쩍 돌아본다.

“내가 아니라도 곧 알게 되겠지만. 하나만 충고해줄게요.”

“해봐라.”

“당신은 마녀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죠? 아신들의 입장에선 기뻐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입장 상 당신을 말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공식적인 허가까지 떨어졌으니 기뻐하려는 찰나. ‘하지만’이라는 사족이 붙었다.

그녀는 유난히 가슴이 서늘해지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마녀의 죽음은 당신 입장에선 절대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아신들은 생각보다… 마녀고 용사고 어찌되든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뿐이니까.”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나중에 어떻게 되든 클레임 걸지 말라고요.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먹먹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미네르바는 흔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X발 가오잡긴. 내 알아 할게요.”

나는 슬쩍 비웃음을 흘려줬고. 눈앞에 떠있던 패널에 손을 가져갔다.

역시나 1번. 나는 불사의 계약을 잇기로 했다.

‘너 할 말만 다 하고, 순순히 빤스런 시켜줄 거 같냐?’

루시가 말하려던 유언. 정확히 못 들었다.

이대로 끝낼 것 같냐. 그건 박정용이 아니다. 오정용이나 최정용이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손가락을 가져가자, 패널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렇다 할 효과음도 없었다. 그리고.

파아앙―!

곧 연녹빛의 섬광과 함께 무언가 내 앞으로 생성되었다.

나는 그 작은 타원형 물체를 손으로 슬며시 쥐었다. 익숙한 그립감이 전해져온다.

[상세 정보 ― 불사의 마왕의 알]

[부화 촉진: 기존 수호자에게 축적된 흉마를 촉매로 환원하여 부화 시기가 빨라졌다.]

[부화까지 남은 기간 ― 3일]

할센베르크에서 봤던 것처럼 패널이 떠올랐다.

그것이 소리소문없이 계약이 이어졌음을 내게 통보해줬다.

“… 오랜만에 보네.”

손에 안착한 알을 가만히 쓸어봤다.

두근, 두근 하고 가녀린 맥동이 느껴진다. 알이 박동할 때마다 시커먼 기운을 흘린다.

다시금 시커먼 패널이 연신 눈앞을 뒤덮는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23일, 04시 48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수도 크로스페이드, 무신의 성전]

[알림 ― 불사의 마왕이 부활에 임박했다.]

[알림 ― 불사의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 12시간에 한 번씩 회귀점이 갱신된다.]

이번에야말로 실감이 들었다.

루시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나는 눈을 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루시의 부활까지, 앞으로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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