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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59화 (135/280)

159화

“제 멋대로, 무신제를 탈주할 때부터… 예, 예상은 했다만. 제어하는 것도 만만찮군 그래….”

제논의 근방에 있던 헥터가 힘에 부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래서 가만히 있는 거였나. 침묵마법 유지하랴. 말을 안 들어 처먹는 제논을 여기로 불러오랴. 주의가 산만하셨구만? 나는 혼자 욕을 씨근거렸다.

“스으… 스으….”

끈 매단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적랑을 향해 다가가는 제논이 보인다.

적랑은 지금 한쪽 팔을 잃었다. 전에 내가 당했듯이, 적랑의 마무리를 지으려는 게 분명하다.

‘도와줘야 해!’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적랑과 협공을 해도 흑화한 제논을 이길 수 있을지가 아리까리한데. 이대로 각개격파 당하면 전생과 똑같은 미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카르할라스를 방치하면….’

하지만 카르할라스의 상태도 심각하다.

주변의 수많은 조무래기들한테 무참히 도살당할 게 뻔하다. 그녀를 죽게 내버려뒀다간, 카사스를 격퇴해도 난 적랑의 손에 뒤진다.

진퇴양난이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용님! 무사하신가요?! 제쪽은 모두 정리했어요!”

“비실아! 여기도 끝났다!”

그 순간 나를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세스나와 크라네이드였다.

스스슥! 허공을 미끄러지듯 날아온 세스나가 내 옆에서 멈춰섰다. 나는 대번 화색을 띄며 그녀를 쳐다봤고.

눈앞이 아찔해진 나머지 온몸을 굳혔다.

“세, 세스나. 팔이…?”

세스나의 왼쪽 팔이 상박 부근부터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바지직, 파직. 자잘한 스파크와 함께 절단부에서 새빨간 피를 흘리는 세스나.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으욱….”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도 태연작약한 얼굴 때문인가. 나는 전생의 불길 속에서 봤던 피투성이 세스나의 시신을 겹쳐 보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밀어닥쳤다. 올라오는 신물을 되삼켰다.

“앗차.”

세스나는 내 행색을 보고서야 낮은 탄성을 흘리더니. 이내 잘린 팔을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에헤. 괜찮아요! 팔 하나쯤은. 이 정도는 나중에 자가수복할 수 있어요.”

“아니… 괜찮긴 X발! 팔 어쨌어! 새 시대에 두고왔어?! 어디 봐봐!”

나는 세스나의 얼빠진 소리를 싸그리 무시했고.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환부를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세스나는 하나 남은 손으로 볼을 감싸며 몸을 배배 꼬았다.

“괘, 괜찮다니까요? 이미 생체 모르핀 투여해서 통각도 없는데… 으, 너, 너무 관심 주시면 뭔가 좀 부끄러워요!”

옘병 세상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얘랑 대화하면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현실감이 증발하려고 해서 문제다.

“여자는 부상을 당했다!”

“여자 쪽을 노려!”

그 새를 못참고 카사스 따까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사교 새끼들은 너무 조용해서 짜증났는데. 아가리를 재잘대도 사람 빡치게 하는 건 마찬가지구나. 노리긴 X발 누굴 노려?

“정신 못 차리지 개새끼들아.”

나는 이를 한 번 으득 갈아붙인 뒤, 온갖 스킬들을 전방위로 난사했다.

“저리 꺼져!!”

마력을 아낄 상황이 아니다. 모든 스킬을 풀개방했다.

베스타크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세븐 소드 피어스를 연발했다. 페이탈 쏜즈가 동시에 발동되었다. 무수한 가시와 마력검이 졸개들을 노리고 날아든다.

“크욱!”

“끄아악!”

그것에 맞아 절명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 능숙하게 피해내거나 막아냈다.

괜찮다. 놈들의 레벨대가 있으니 이 정돈 예상했다. 가시와 마력검으로 신경이 쏠린 졸개들 사이로 이미 베스타크가 쏜살같이 날아가는 중이었다.

“으아아악!”

퍼퍼퍽! 부메랑처럼 매섭게 회전하는 베스타크가 그들을 유린한다. 어떤 놈은 목에 박히고. 어떤 놈은 가슴팍에 꽂힌다.

그리고 어떤 놈은 ‘그곳’에 쑤셔져 여자로서 생을 마감한다.

“하아압!”

카아앙! 연신 들리던 파육음 대신 귀를 찌르는 금속음이 들렸다.

기합이 들린 곳으로 슬쩍 눈을 돌려봤다. 어쩌다 운 좋게 어검술을 막아낸 듯하다. 이럴 땐 다 방법이 있지.

나는 곧장 베스타크에 흘리던 마력을 폭증시켰다.

“스팅어!!”

콰아앙! 놈이 막아낸 베스타크에서 막대한 충격파가 쏟아진다. 무기와 통째로 졸개놈을 집어삼켜 버린다.

“욱…!”

휩쓸린 졸개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러면 서서석,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베스타크가 놈의 경추를 꿰뚫어 버렸다.

“저, 정용님.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강하시네요.”

세스나가 넋을 잃고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피식 웃는 걸로 화답했다.

“비실아! 이몸이 왔… 뭐냐. 그새 다 어디갔냐.”

뒤늦게 따라붙은 크라네이드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크라네이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우리를 둘러싼 졸개들은 손으로 꼽을 숫자까지 떨어져 있었다.

“푸하아….”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에테르병을 꺼내 들이켰다.

새파란 기운이 몸을 감돌았다. 바닥난 마력과, 어느새 간당간당해진 체력이 일순간에 회복되었다.

‘남은 에테르가….’

나는 미미르의 눈으로 에테르병을 주목했다.

두 개씩 있던 불, 땅, 바람의 에테르는 한 개씩 남았고. 네 개 있던 회복용 물의 에테르는 방금 하나 빨아서 세 개가 남았다.

“…….”

나는 입을 다물고 빠르게 전황을 살폈다.

한쪽 팔이 잘린 세스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카르할라스. 마력을 소진해 기절한 엘프리데. 그리고… 제논에게 오른팔이 날아간 적랑.

‘이걸,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나는 만지작거리던 에테르 병을 한 번 꽉 쥐고, 결심을 마쳤다.

효율만을 생각한다. 동정심 갖다 버려. 가장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세스나. 이거 마셔. 빨리!”

“네? 뭐를… 아극.”

나는 세스나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에테르 병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세스나의 은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여 뻐끔거린다.

나는 에테르 약발이 돈다 싶어지자 병을 곧장 크라네이드에게도 건넸다.

“크라네이드도요!”

“엉? 뭐, 그래….”

크라네이드와 세스나의 몸에 새파란 기운이 치달리더니, 이내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아무리 로봇과 거북 인간이라도 에테르는 통하는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와아. 이, 이게 뭔가요? 환부가 전부 회복됐어요!”

“설명할 시간은 없고. 지금은… 일단 최대한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버텨줘. 알겠지!”

나는 통보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세스나도 내 절박함을 알아봐준 건지, 비장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이잉! 그녀의 하나 남은 손에서 전기톱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네! 나머지는 저한테 맡기세요!”

“좋아. 부탁한다! 크라네이드는 저랑 같이 갑시다!”

나는 세스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크라네이드가 부리나케 내 뒤를 쫓아왔다. 당황에 찬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아니 비실아! 너무 빠르다!”

“천천히 따라오십쇼! 아니 최대한 빨리 오세요!”

“뭐 어쩌라는 거냐 미친 비실아!”

아마 그가 도착하는 건 한참 후는 돼야할 것이다. 나는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적랑. 그리고 그 앞에서 멸흉검을 치켜든 제논이다!

“동작 그마아아안!!”

내 속도로도 늦는다. 나는 마력을 깃들인 베스타크를 재빨리 던졌다.

쇄애액! 어검술로 날아간 베스타크가 제논이 휘두른 곡도와 맞붙는다.

쩌어엉! 불꽃의 폭발과 함께 충격파가 일었다. 쓰러져 있던 적랑이 폭발의 반발력에 따라 내쪽으로 밀려나온다.

“크윽… 이런….”

적랑이 무릎을 꿇은 채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나는 토막난 그의 오른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경악한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미친. 저게 뭐야.’

팔이 날아간 절단면이 석탄처럼 새카맣게 탄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도 시뻘건 불꽃이 살갖의 표면을 타고 감돌았다.

잘린 팔뚝만 보면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숯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아마테라스냐 X발….”

대상이 뭐든 간에, 붙었다 하면 숯덩이가 될 때까지 타오르는 지옥불. 이래서 전생의 나도 웰던으로 바싹 익었었지. 불쾌하고 소름 돋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치지직. 환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불꽃에 닿을 때마다 역한 냄새를 피워 올린다. 차마 보고 있기 힘들어 시선을 피했다.

“이, 이거 드십쇼 적랑님. 얼른요!”

“정용 군… 크윽.”

나는 이번에도 적랑의 입에 에테르를 흘려넣었고. 에테르의 푸른빛이 적랑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환부의 시커멓던 검댕이 서서히 아물었다. 출혈도 멎었다. 불꽃 역시 푸른빛에 닿을 때마다 점점 사그라들더니, 이내 완전히 소화됐다.

“후우. 고, 고맙네. 정용 군.”

적랑은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내 옆에 서서, 한쪽만 남은 팔로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자니 후방에서 꿀 빨며 관망하던 헥터 카사스가 말을 걸어왔다.

“… 설마 그 많은 사도들을 전부 정리한 겐가?”

나는 허공을 유영하던 베스타크를 회수했고. 루시에게 붙여놨던 에스파다도 불러들였다.

두 자루 검을 각각 제논과 헥터에게 겨눈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그래. 이제 다음은 너희들 차례다.”

헥터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나는 분명 현시점에서 자네의 정확한 전력을 측정하고, 확실한 계산 끝에 야습을 계획했네.”

“어쩔. 안 물어봤어 싸물어.”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스킬을 대체 어느 새 터득했단 말인가. 게다가 만난 적도 없는 용제국 사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서 데려왔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두렵구나. 한치 앞이 예측되지 않는 네놈이, 지금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

“인도하는 까마귀. 자네는 역시 너무 위험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죽어줘야겠다.”

복면 위로 보이는 헥터의 눈빛이 나를 찌른다.

저 눈깔. 개X발 X같은 눈깔. 너까지, 나를 그렇게 괴물 쳐다보듯이 보는 거냐?

네가? 나를? 다른 새끼도 아니고. 니가 감히 나를?

“… 눈 깔아, X발련아.”

심장이 요동친다.

더운 피가 분노와 함께 온몸을 날뛴다.

저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치달린다.

나는 히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지금까지 이 악물고 참고 있었던 온갖 격정적인 감정들이, 뇌를 모두 불태울 것처럼 일순간에 치솟아 타올랐다.

“아니. X발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뽑아줄라니까.”

나는 곧장 헥터를 향해 달려들었고.

측면에서 치달리는 새빨간 불꽃을 뒤늦게 포착했다.

카아앙!

나는 급제동과 함께 그것을 받아쳤다. 부릅뜬 눈을 흘깃 옆으로 돌렸다.

제논이 내게 카타나를 내밀고 있었다. 새빨간 폭풍이 몰아닥친다. 제논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이 벗겨져 하늘하늘 날아갔다.

“흐. 으하하하!”

기괴한 혈관이 꿈틀거리는 그 얼굴을 마주한 나는, 잠깐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시야에 온통 제논의 뒤틀린 얼굴이 확대되었다.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붕 뜨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지. 용서 안 한다고.”

뭐지. 머릿속은 분노와 고양감으로 뒤죽박죽인데다, 제논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X같은데.

왜. 대체 왜 이렇게 기분이 끝내주지?

“대가리 박살내러 왔다 X발놈아!!!”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논과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갔다.

쿠구구구! 제논의 검이 뿜는 열기로 사방이 화마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세상이 새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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