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선수 입장
내가 크라네이드를 데리고 하아아안참 후에 다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첫째. 적랑과 나이트레아는 놀랐다.
“놀랍군. 정용 군이 용제국 사절과 아는 사이였다니….”
“적랑. 국빈회의는 말싸움만 하는 당신보다, 인맥이라도 출중한 저 청년이 어울렸던 거 아닐까?”
“… 할 말이 없군.”
그리고 둘째. 당연히 세스나는 굉장히 반가워했다.
“어머! 용머리 씨!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너무 반가워요!”
“케켈. 그 이상한 호칭은 여전하구나. 전자 비실이.”
“후후, 용머리 씨가 그렇게 부르니까 저도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둘이서 서로를 특이한 호칭으로 부르며 화기애애함을 뽐내고 있다.
제길. 저건 좀 부럽다. 나도 세스나한테만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뭐 어쨌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응.
크라네이드를 이번에 처음 보는 카르할라스와 루시는, 당연히 그 웅장한 위용에 입 떡 벌리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크다!”
“엄청 크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곧장 들들 볶여야 했다.
특히 짜투리1이 굉장히 성가시게 굴었다. 참고로 짜투리1은 루시다.
“용사. 대, 대체 저 무지막지한 거북이 놈을 어디서 데려온 건지 궁금해 죽겠지만… 어차피 또 입 꾹닫고 묵언수행 할 거지? 그래. 이미 네놈 패턴은 다 파악했느니라.”
혼자 미친 듯이 떠벌거리더니, 그대로 토라졌다.
짜투리 2와 3… 세스나와 카르할라스도 말은 안 했지만 전말이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대충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그들에게 들려줬다.
카르할라스는 내 말을 듣더니 대번 화색을 띄웠다.
“굉장해 정용. 배신한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건 기업비밀.”
“아… 그래? 알겠어. 좀 아쉽다.”
카르할라스는 의외로 순순히 포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유능함을 인정했다기 보단, ‘원체 기묘한 놈이니 이젠 그러려니 싶다’라는 느낌이다.
‘쯧. 이쁘면 다냐?’
생판 남을 사지로 밀어 놓고 뻔뻔하긴. 덕분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냐?
나는 짜증을 부릴 생각으로 카르할라스를 쳐다봤고. 아가리를 곱게 다물었다.
이쁘면 다가 맞군. 나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결과적으론 쟤가 옳은 선택이었어.’
인정할 건 인정하자.
카르할라스가 나를 무신제에 밀어 넣은 덕분에, 침투한 카사스의 사도들을 특정하기 쉬워진 건 팩트다. 관중석에선 미미르의 눈 사거리도 닿지 않으니까. 선구안 하나는 지렸다고 할 수 있다.
얼굴 예뻐서 어떻게든 실드 쳐주는 거 아니냐고?
… 맞는 거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개년이다.
정정한다. 카르할라스는 선구안 지리는 예쁜 개년이다.
“어, 정용님.”
문득, 방실방실 웃으며 내 얘기를 듣던 세스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세스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시선을 멀찍이 둔 채 넋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세스나가 퍼뜩, 하늘 언저리를 가리킨다.
“지금 이 상황도… 정용님 계획의 일부인가요?”
동시에 후욱, 사방이 완연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으엥? 뭐, 뭐냐?!”
루시가 당황 어린 탄성을 흘리며 내게 퍼뜩 달라붙었다. 내게 해명을 요하는 눈길을 쏟고 있었다.
아니. 나도 몰라 인마. 당황한 나는 세스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 침묵 마법?”
아까 엘프리데가 사용했던 마법.
그것과 놀랍도록 비슷한 칠흑의 장막이 무신의 성전 전역에 걸쳐 퍼져 있었다.
나는 퍼뜩 엘프리데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저건.’
엘프리데를 제외하고. 무신의 성전을 전부 뒤덮을 수 있을만한 흑마법을 쓰는 사람?
흑마법이라면. 설마….
“언제나 내 예상 이상을 보여주는군. 우리 쪽이 되려 기습당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네. 용사 박정용 군.”
어딘가에서 그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순간 덜컥 멈췄다.
‘변조된 목소리.’
스스슥.
동시에 무언가가 재빠르게 저택의 담장 너머에서 다가온다. 새카만 복면을 쓰고 두건을 뒤집어쓴 괴한들이 수십 명.
멈췄던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을 끝낼 때다. 인도하는 까마귀와 마녀사냥꾼. 균형을 위협하는 분자들을 한꺼번에 묻어주지.”
사방에서 모여든 괴한들 중 누군가가 앞으로 한발짝 나온다. 그리고 스윽. 검은 수정이 번들거리는 스태프를 뽑아들어 우리 일행을 겨누었다.
놈의 복면 안에서 잊지 못할, 징글징글한 괴성이 울려퍼졌다.
“이 헥터 카사스의 이름에 걸고. 세계의 균형은 유지될 것이다.”
* * *
놈이 본체인지 아닌지,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곧장 미미르의 눈부터 발동시켰다.
[명칭: 헥터 카사스]
[별칭: 두 번째 용사. 프레들 머시. 마#&@의 *&$%자. 카사스의 *%^장]
[LV. %^$#^]
여전히 명칭과 별칭 몇 개 외엔 모두 ‘정보 누락’이라는 노이즈가 끼어있지만. 일단 본명은 헥터 카사스로 표기된다.
저 놈이 헥터 카사스 본인은 맞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을 노려봤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번 생에선 머리에 피가 몰려서 제대로 못 봤었는데. 나는 놈의 첫 번째 별칭을 눈에 담고 눈을 조금 부릅떴다.
들고 있던 베스타크로 시선을 가져갔다.
“행님! 그러고 보니 형님이 최초의 용사 아닙니까?”
―엉? 그렇지.
“저 새끼 두 번째 용사라는데! 형님 맏후임인데요?! 저 새끼 알죠! 알걸?!”
―… 뭔 개소리야. 내 맏후임이면 몇 백 년 전 사람인데. 그 새끼가 어떻게 여기….
수호 형님의 대답이 잘 이어지다 뚝 끊겼다.
기분 탓일까. 순간 검날에 흐르는 문자가 번쩍, 환한 빛을 뿜은 것 같았다.
와 X바 진짜네. 헥터 카사스잖아. 저 징그러운 새끼 왜 아직도 살아있냐?
당황을 가득 담은 목소리. 역시나 전생 때처럼 알아본다. 두 사람은 구면이 확실하다.
나는 억울하고 야속한 나머지 퍼뜩 목청을 높였다.
“아니 형님! 좀 너무한 거 아뇨?”
―어? 뭐, 뭐가.
“쟤네들 때문에 이 동생이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헤드가 구면이면 좀 정보라도 줄 수 있잖아요!!”
―아니 정용아. 그게 왜 그랬냐면….
“카악 퉤! 예라이 씨 외롭고 슬프다! 이세계 생활 드러워서 못하겠네!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면 좋나! 외로운 섬 하나―! 그 이름 박정용 X바랄라―!”
나는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키며 수호 형님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형님도 진짜 억울했는지 목청을 바락바락 높였다.
아니 야! 나는 당연히 후계자가 지휘하는 줄 알았지! 틀니도 풍화돼서 바스라졌을 저 노친네 새끼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 알았냐?! 나도 몰랐어 인마!
그렇게 얘기하니 할 말이 없군.
나는 구성진 노래를 멈추고 입맛을 다셨다. 헥터에 대해서나 캐묻기 위해 재차 형님을 부르려 했지만.
“… 그 검 안의 목소리. 설마 마녀의 기사인가?”
헥터 카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양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역시 수호 형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가. 이것도 전생과 똑같았다.
이야! 오랜만이다 헥터? 거진 500년만인가. 세월 참 빨라~!
수호 형님은 아랑곳않고 태평하게 말했다.
느낌은 딱 그거였다. 오랜만에 만난 어색한 친구한테 과장스럽게 친한 척하는 행색.
이 경우 상대는 이쪽을 친구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전생의 반응을 봤을 때, 두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다.
“흐, 후후… 흐하하. 그랬던 거였군.”
이번엔 헥터 쪽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몸이 상하로 격렬하게 들썩거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 내가 아는 마녀의 기사… 아니. 한수호가 맞군.”
―그러는 너도. 세계의 균형이 어쩌구 X발쩌구. 개X같은 개똥철학 나불대는 꼬라지 보니 내가 아는 헥터가 맞구나.
- 잠깐 헥터의 대꾸가 멈칫했다.
잠시 후. 조용히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줄 알고. 네가 감히 그런 망발로 우롱하느냐?”
―알 바냐 븅신아. 그 개쪽팔린 중2병 비밀결사 놀이를 X발, 나이 수백 살 처먹고도 현역으로 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할배 아직 서요?
직후 헥터에게서 엄청난 칠흑의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형님. 전생이랑 다르게 셋바닥 놀리는 폼이 심상치 않습니다? 싸우는 건 형님이 아니라 난데 국지도발은 좀 자제하십쇼!
아니나 다를까 헥터는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네가 우리와 끝까지 뜻을 함께만 했다면. 네놈이 배신만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런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 배신은 X발. 조직명이 ‘카사스의 사도’만 아니었어도 탈퇴 안했다. 야 X바, 찐따 냄새가 앵간히 나야지. 서태지와 아이들 짭이야? 네이밍센스가 오바참치잖아.
“프큽.”
한국인만 이해하는 딜미터기 폭발 극딜의 향연.
개꿀잼 직관하다 웃음이 터졌다. 헥터의 시선이 순간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계속 말씀 나누시라는 의미로 손사래를 치고 혼자 끅끅댔다.
“…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군.”
하지만 오히려 헥터 카사스 쪽이 대화를 거부했다. 고개를 슬슬 저은 그는 스태프를 들어 내 미간을 가리켰다.
“자칭 디아나의 기사. 네놈은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게지.”
나는 심상찮은 기운에 웃음을 거두고 검을 고쳐 쥐었다.
헥터가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며 나직이 한 마디 했다.
“쳐라.”
두두두!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나머지 카사스의 사도들이 우리를 동시에 덮쳤다.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적랑도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용 군! 비전투 인원을 보호해 주게!”
“아 네!”
나는 퍼뜩 대답하고 짜투리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짜투리 멤버 구성은 그로기 상태가 된 엘프리데, 카르할라스, 나이트레아, 루시, 그리고 세스나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카르할라스랑 세스나는 나름 제몸 건사할 능력 정도는 되지 않나? 전투에 있어서는 짜투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목청을 높였다.
“카르! 세스나! 전투 준비해! 엘프리데랑 나이트레아를 지켜줘!!”
두 사람은 내 외침을 듣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나는 예의 미사일 런처와 손목을 뚫고 나온 전기톱을 양손에 장착했고. 반면 카르할라스는 주먹을 틀어쥐며, 적랑과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온다!”
수많은 괴한들이 우리 쪽으로 쏟아졌다.
적랑이 많은 수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지만. 최소 반절 정도는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크라네이드! 잘 부탁합니다!”
“오오 그래. 저 비실이들 죽이면 되냐?”
크라네이드는 내 외침에 콧김을 힘차게 뿜었다. 새하얀 불꽃이 코 주변으로 일렁거렸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시커먼 파도를 보며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나는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전면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