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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56화 (132/280)

156화 괴잘알

적랑은 나이트레아를 데리고 피난에 대한 의논을 하러 떠났다.

그 때 나는 잊고 있었던 인물 하나를 떠올렸고. 그를 전투에 합류시키기 위해 무신의 성전 가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는 동안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수호 형님이나 괴롭히기로 했다.

“형님. 일어나보십쇼 형님.”

수호 형님은 요즘 특히 의식이 끊어져 있는 상태인 경우가 많다. 내가 부르면 그제서야 의식이 돌아온다.

어차피 깨있으면 개드립만 치는 양반이라 퍼질러 자는 게 편하다.

어. 불렀냐?

“예.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물어보슈.

수호 형님은 언제나처럼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용사 지원 시스템에 대한 겁니다.”

―… 오호.

수호 형님은 의미심장한 비음을 흘렸다.

내가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왜 카사스의 사도는 불사교처럼 몬스터로 표시가 안 되냐?’라는 거였다.

수호 형님을 제외하면 미네르바 밖에 모를 의문. 하지만 미네르바에게 질문할 기회는 루시의 비밀을 듣는 데 소모해 버렸으니. 아쉬운대로 수호 형님을 물고 늘어지는 거다.

불사교 쪽이 아신들 눈엔 더 위험해 보였나 보지. 내가 바꾼 게 아니라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 형님. 그 시스템 표기는, 혹시 아신들 말고 다른 사람도 바꿀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물어본 이유는 헥터 카사스의 상태창에서 봤던 인위적 말소의 흔적. ‘정보 누락’이라는 항목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끝에 수호 형님은 내 말을 긍정했다.

있지. 아신들 제외하면 용사 지원 시스템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딱 셋 있었다. 나랑, 헥터 카사스라는 남자랑, 알테어라는 여자. 500년 전 사람이니 지금은 다 죽었겠지만.

“헥터 카사스…!”

나왔다. 헥터 카사스.

역시… 그놈 본인이 자기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켜 놓은 거군.

자세한 건 디아나의 사생활이라 못 말해주는데. 둘 다 옛날에 나랑 좀 연이 있거든. 나보단 권한이 한참 떨어지지만, 이미 써있는 정보를 가볍게 첨삭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걸?

수호 형님이 말을 보충했다. 나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상태창을 볼 수 있다는 걸 간파한 건가? 아니, 워낙 신중한 놈이니 그냥 만의 하나를 가정해서 조치한 걸지도 모르지.

“… 몇 가지 더 물어보겠습니다. 가능한 것만 대답해주십쇼.”

―그러지요.

그 뒤로도 무료하게 걷는 동안 시스템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가장 중점적으로 물어봤던 건 ‘왜 하필 게임 시스템을 베꼈냐?’라는 거였다.

당연하지. 가장 직관적으로 도전욕구를 자극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당연히 알피지 아니겠냐! 그래서 내가 해본 김치 RPG겜 싹 다 스까서 열심히 만들었다. 크핫.

그 대답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시스템을 고안한 수호 형님은 물론이고. 거기에 후원한 스폰서… 즉 아신들의 의도한 대로라면. 소환된 용사들의 정석 육성테크는 이거다.

첫 째, 마족과 몬스터 등의 일반몹들을 토벌해서 레벨을 순차적으로 올린다.

둘 째, 가끔씩 등장하는 강적들인 ‘마왕’들을 필드이벤트이자, 강제 레이드처럼 매칭 시스템을 붙여 퇴치한다.

이런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근데 네 경우는 조금 다르지. 아니. 솔직히 많이 다르지.

그런데 거기서 수호 형님은 조금 묘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무심결에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 저요?”

―너는 육성이 선택이 아닌 강제잖냐. 게임으로 치자면 아예 장르가 달라요 장르가.

나는 형님이 던진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뭔 소린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행님.”

―네가 지금까지 겪은 굵직한 일 중에. 네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있었냐?

“…… 아.”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다.

하수도를 탈출하느라 레이라한테 수없이 죽고.

또 할센베르크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엘더리치 잡느라 수없이 죽고.

마르크트레스에 와서는 불사교 때문에 죽고.

수도에 도착해선 카사스의 사도들 때문에 죽고.

아니,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진짜 오지게 뒤져댔네 X발.

나는 납득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수호 형님은 말을 이었다.

MMORPG는 캐릭터육성 자체가 게임의 목적이란 말이야.

“그렇긴 하죠.”

―그러니 강제 이벤트인 마왕 출현만 아닌 이상. 어떤 타이밍에 어떤 몬스터를 어떻게 잡아서 강해질 것인가. 그런 건 원래 용사 개인 재량이야. 육성의 자유도야말로 RPG의 핵심이지.

나는 팔짱을 단단히 끼우고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다?”

―너한테는 목적이 따로 있잖아. 불사의 마왕 수호. 그런데 세상이 그걸 용서하지 않는다. 그럼 앞으로도 강제이벤트가 계속 발생할 거고. 육성은 부차적인 요소가 된다. 언더스탠?

“…… 아.”

그렇다. 거기서 다른 용사들과 나의 메꿀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다.

남들은 강제성이 없다. 놀고 싶은 놈들은 놀고. 강해질 이유가 있다면 강해지면 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살아남고 싶으면 강해져야 한다.

남들은 육성이 메인이라도 강제가 아니지만. 나는 육성이 부차적이긴 한데, 강제적인 요소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헥터 카사스는 온갖 수단을 이용해 날 사방에서 압박하고 있고. 그 시점에서 나를 이길 수 있을만한 전력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나는 새로운 난관을 봉착할 때마다 정신, 육체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아니면 또 다시 죽음이 되풀이되는 무간지옥에 빠질뿐이다.

특정 구간마다 돌파해야 하는 시련이 있고. 사신 자매들의 아이템도 그렇고. 회귀점부터 부활하는 형식도 그렇고. 니 인생 완전 소울류 게임이구나. 뭔지 아냐?

“예… 알긴 압니다.”

―널 뭐라 부르면 좋나. 1억 6341만 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 하핫, 좋은데.

수호 형님이 즉석에서 내 별명을 하나 붙여줬다.

웹소설 제목으로 써도 저질 어그로 끈다고 욕먹기 딱 좋은 별명. 본인은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지 실실 빠개는데. 나는 안 웃겨서 웃지 않았다.

대신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말입니다. 형님은… 제가 지금처럼 일행을 늘리는 게 좋다고 보십니까?”

―… 쌔끼. 분위기 오지게 잡더니 쓰잘데없는 질문을 하네.

수호 형님은 일축했다.

기가 차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목소리는… 수호 형님답지 않게 꽤 진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꽤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왔다.

이미 너도 깨달은 바가 있으니 묻는 거 아니냐?

“그건….”

―뭘 묻냐. 생각하는 대로 하지. 눈치볼 사람도 없는 일을 왜 자진해서 눈치를 보나?

“그렇게 말하시니… 또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나는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수호 형님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이내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인생 아니고 내 인생이니 참고만 해라. 인싸 라이프는 개인적으로 비추다.

“… 그건 또 왜입니까 행님.”

내가 되물었을 때. 베스타크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은 유난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게 수호 형님이 씁쓸한 기분을 숨길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건. 마검 심리학을 박사과정 수료할 때쯤 알게 된다.

일반인들이랑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괴리가 느껴진다. 쟤네들은 불사신인 나랑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정신머리든 몸뚱아리든, 결국 절대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도 없구나.

“…….”

―뭐 대충 이런 거?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반대로 수호 형님은 아까의 침묵을 메꾸려는 것처럼 빠르게 떠벌댔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랑 비슷한 누군가한테 집착한다고. 살아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진 나를 진짜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괴물이라도 상관없어. 나도 괴물이니까. 나중 가서는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그 사람만을 위해 살게 될 정도지.

내가 숨을 멈춘 건 수호 형님의 말이 이해가 안 가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가서 그랬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형님. 그 얘기….”

―나한텐 그게 디아나였다. 그 애는 나를 괴물로 만든 당사자지만, 그래서 그 애만이 나를 이해해줬고.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애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지.

“…….”

―그래서 난 디아나의 행복을 위해 뭐든지 했어.

심장이 요동치는 것과 함께, 눈앞에 루시의 얼굴이 스쳤다.

그녀는 잠깐 스친 회상 속에서도 특유의 당당하고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X발. 로맨티스트 나셨수.”

―카핫. 존내 스윗하지. X발.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형님도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그는 시기 좋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한 말. 무슨 느낌인지 아냐?

“… 대충은요.”

―그걸 4개월 차에 알면 안 되는데. 조숙한 불사신일세. 하핫.

수호 형님은 농담을 던지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이번엔 나도 따라 웃었다. 웃기진 않은데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건 네 인생 스포일러인데.

어느 순간 웃음기를 싹 뺀 수호 형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한테 만약 그런 사람이 생기면… 너도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미친 짓이든 하게 될 거다. 너는 나랑 닮았으니까.

“무슨 미친 짓이든…?”

―무슨 미친 짓이든. 세상 전체를 상대로 맞짱을 선포한다던지? 내가 그랬듯이.

나는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구름 잔뜩 낀 하늘이 우중충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도 똑같다. 난 무슨 짓이든 하겠지. 디아나가 웃을 수만 있다면.

공허하게 울리는 형님의 말을 기점으로 솨아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직한 장대비였다.

‘… 여기다. 그 사람이 말해줬던 곳.’

그리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신의 성전 구석에 박혀있는 귀빈용 대여 저택이었다.

“계십니까! 급한 일이니까 문 좀 열어주십쇼!!”

쾅쾅쾅! 나는 저택 대문을 힘차게 두들기고 기다렸다.

그러자 저택 안에서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야밤에 어떤 놈이… 음?”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크라네이드였다.

그는 굵직한 빗줄기 속에서 나를 가만히 쳐다봤고. 이내 얼굴에 화색을 띄었다. 나도 덩달아 지친 웃음을 띄웠다.

“이야, 이거 비실이 아니냐! 이런 곳에서 다 만나는구나!”

“오랜만이유. 크라네이드.”

“귀신같은 놈이구만.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당신이 직접 알려줬잖수.”

“… 으잉? 비실이 주제에, 농담 잘하는 건 여전하구나! 케켈!”

은근슬쩍 말해본 진실을 농담 취급하는 건 좀 씁쓸했지만. 대수롭잖게 넘겼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바지가 빠르게 축축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진심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미안한데요. 제발 저 좀 도와주십쇼. 크라네이드.”

그래. 고집부릴 때가 아니다.

루시가 나의 죽음을 슬퍼한다. 나는 그녀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죽지 않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라도 이용한다.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지인을 위기에 빠뜨려서라도, 살아남아 보이겠다.

그래서 난 여기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은 것이다.

“…….”

크라네이드는 잠깐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켈켈거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번쩍. 그의 솥뚜껑만한 손이 내게 다가온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비실이.”

“… 크라네이드…!”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감사를 담아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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