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X발. 어떡하냐.’
머릿속이 하얗다.
‘어떡하지’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autoK 모드가 됐다.
제논을 멱살 잡고 끌고 내려와야 하나. 아니면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하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나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도전자님! 최후통첩 합니다! 더 이상 경기장에 접근하면 연행하겠습니다!!”
문득 뒤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슬쩍 돌아보자, 수많은 진행요원들이 난입한 나를 잡기 위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한 번 보고, 경기장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제논을 봤다가. 이내 쯧, 혀를 찼다.
‘지금 범죄자로 잡혀버리면 죽도 밥도 안 돼.’
주변의 상황을 보고 비로소 판단이 섰다.
실로 이 갈리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내가 사적으로 제논을 제재할 수가 없다.
이 대회는 살인을 장려하진 않는다, 하지만 항복 선언 후에 죽이는 경우가 아닌 이상, 딱히 절대 금지인 것도 아니다. 관중들 입장에서 제논은 정당하게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이다.
여기서 갑자기 난입해 제논과 싸워버린다? 나만 개새끼 된다.
‘… 아니.’
유난히 우렁찬 함성소리가 알려준다. 제논은 오히려 추앙받고 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비장의 한 수를 발휘해, 방심하던 상대를 단칼에 일도양단 한다. 나라도 내막을 모르고 봤으면 제논에게 열광했을 것 같다. X발.
“…… 죄송합니다.”
나는 진행요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박았다. 그들의 강압적인 인도에 따라 순순히 대기실로 돌아갔다.
나는 엄중한 경고조치를 받고 한참을 취조받은 뒤에 풀려났고. 그 뒤로도 경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와 카사스의 사도들과의 숨바꼭질도 물론 마찬가지다.
“제13경기장, 개전!”
2차전에서는 복면맨을 만났다.
상태창을 스캔해본 결과 카사스의 사도는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던 엑스트라38 정도의 스펙을 가진 평범한 도전자다.
‘차라리 잘 됐다.’
이놈으로 시간 끌면서 꼼꼼히 다른 경기장의 인원들을 스캔해야겠다. 마침 그리 센 놈도 아니니 조사활동을 하기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 좋아. 한 명 확보.’
나는 주위를 연신 둘러보다가, 바로 옆의 경기장에서 발견한 사내 하나에게 눈을 부릅떴다.
[명칭: 에센 그랑드]
[별칭: 카사스의 사도, 세뉴 타니발, 무성]
[LV. 234]
[체력: 310/890 마력: 1370 /1750 신체상태: 출혈, 골절]
[힘: 50 민첩: 204 지능: 398]
카사스의 사도를 하나 발견했다.
이름은 에센 그랑드. 용사가 아닌 원주민. 별칭 항목에 있는 ‘세뉴 타니발’이 대회용 가명인 듯하다.
나는 그놈의 본명과 가명을 뇌리에 확실히 각인 시켜놨다.
“뭐, 뭐야. 대체 뭐냐고!”
확인을 끝내기 무섭게, 내 대전 상대가 갑자기 지랄발광을 시작했다.
투두두두! 놈이 들고 있던 기관총을 내게 쏴 갈겼다. 나는 복면 안에서 한 번 비웃어주고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해냈다.
티티팅! 총알이 경기장 바닥을 두들기며 사방으로 불꽃을 튕겼다.
“이 X발! 좀 맞으란 말이다!!”
상대 복면맨이 고함을 쳤다. 귀신 같이 총알을 피해내는 내가 어지간히 아니꼬운 모양이다. 나는 그 한심한 몰골을 보며 슬쩍 눈꼬리를 구부렸다.
“꼬우면 너도 고렙 하십쇼.”
이쪽 세계에는 총이 있다.
구식 화승총이나 머스킷 같은 거 아니다. 지구의 자동소총이나 머신건은 물론이고, 로켓런처나 다련장 미사일 같은 대형화기까지 존재한다.
전부 운터란트의 산물인데. 말이 마법공학이지 내가 볼 땐 SF나 스팀펑크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다.
총은 중반 레벨까지는 몰라도, 200 이상의 고레벨이 되면 확실히 쓰레기로 전락하는 무기다.
그 증거는 내가 직접 상대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딜 쏘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슥, 스슥.
나는 가벼운 스텝을 밟는 것만으로 놈의 사선(射線)에서 쉽게 벗어났다. 그게 반복될수록 분노를 담은 고함소리가 커졌다.
“아아악! 쥐새끼 같은 놈이이!!”
그렇다. 나 정도의… 아니. 카르할라스 정도의 레벨만 돼도 총을 맞추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쏘기도 전에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읽고 피해버리니까.
총알은 총구를 떠나면 무조건 일직선으로 전진한다. 다루기에 따라 변화무쌍한 냉병기의 움직임과 다르게, 일단 사선을 벗어나면 그 뒤는 볼 필요도 없이 빗나간다.
게다가 200레벨 이상쯤 되는 고수의 검 속도는 총알 속도보다 빠르다. 총알이 느리게 보일 정도라니까.
‘그리고 애초에….’
절박한 표정으로 연신 방아쇠를 당겨대는 대전 상대의 앞으로 스슥, 움직였다.
순식간에 놈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잠깐 얼빠진 채 나를 올려다보던 그가, 기겁하며 총을 쏴갈긴다.
“으, 으아아아 미친!!”
투두두두! 제로거리에서 사격이 내 면상을 향해 작렬했다. 탱강, 탱그랑! 탄피가 연신 경기장 바닥을 두들기며 청명한 금속음을 만들었다.
수 초간의 집중 포화가 끝나고. 나는 얼굴을 막았던 손을 그제서야 내렸다. 총알의 열기가 손바닥에서 이글이글 올라와 화약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고작 이 정도냐? 네놈의 전력.”
도발대사6을 내뱉으며 막아낸 총알들을 땅바닥에 버렸다. 촤라락! 찌그러진 탄두 수십 개가 바닥을 구르며 햇빛으로 번쩍였다.
그렇다. 아무리 나라도 총알을 직격당하면 몸이 벌집이 되겠지만. 지금은 땅의 에테르를 빨고 있어서 몸에 기스도 안 난다.
손바닥이 좀 따끔하긴 하네. 꽤 고급 총인가 보다.
‘날 이기려면 대포동 미사일은 가지고 와야지.’
생각해보니 궁금해지는군. 땅의 에테르 빨고 탄도미사일 맞아도 난 멀쩡할 수 있을까?
물리적인 데미지는 몰라도, 폭발하는 순간 주변 공기가 싹 연소돼 버리니까 숨막혀 죽지 않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상대를 점점 압박해 나갔다.
“아, 으으, 흐으…!”
복면의 상대는 천천히 다가가는 내게서 주춤거렸다. 총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내 털썩. 상대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총을 내팽개쳤다.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이런. 귀찮게 하길래 눈높이를 맞춰준다는 게 너무 몰아붙였다.
나는 낭패감에 혀를 찼고. 남의 속도 모르는 관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을 쏟아냈다. 격정에 찬 분위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로테이션 정돈 더 돌릴 수 있었는데….’
하늘에 뜬 수정 거울을 슬쩍 쳐다봤다. 경기가 끝나는데 걸린 시간은 약 2분이다.
남은 1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으면, 그 사이 교체된 다른 경기장 멤버들을 더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인가. 시시하군.”
나는 마무리 대사 8과 함께 경기장을 내려갔다.
이건 생각보다 입이 척수반사로 먼저 움직인 거다. 습관이란 참으로 무섭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그 사이 사람이 꽤 많이 빠져 있었다. 2일차 경기가 3회전까지 돌입하니, 남은 도전자가 수백 명대까지 줄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보니… 조바심 낼 필요가 없었잖아.’
나는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아까 대기실에서 허둥대던 내가 등신 같아서 그랬다.
예선에서 탈락할만한 버러지들은 카사스고 나발이고 애초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그러면 나중에 알아서 액기스들만 남을 건데. 사람이 이렇게 줄고 나서 확인했으면 편하고 얼마나 좋냐.
“자살 준내 마렵네….”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내 24년 인생 신조는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였는데. 요즘 몸으로 못 때우는 일에 많이 부닥쳐서 그런지, 신조가 자꾸 흔들리고 있다.
나는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사람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512번 도전자님! 512번 도전자님 안 계십니까?!”
그러던 와중, 진행요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512번 도전자님! 즉시 제6번 경기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시간 내 참석하지 못하면 자동 탈락입니다!”
진행요원 몇 명이 대기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문제의 512번… 제논을 찾아다녔다.
나도 그제야 눈깔에 힘을 퍼뜩 줬다. 대기실에 남은 면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없다. 붉은 곡도를 둘러멘 제논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512번 도전자 실격! 제6번 경기장, 2669번 도전자 승리!”
결국 제논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논의 경기는 그렇게 실격패 처리되었다.
나는 더럽게 찜찜한 마음을 품은 채 사람들의 정보 스캔을 계속했고. 해질녘에 가까워서야 오늘자 마지막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제50경기장 3회전, 개전!”
3회전은 속전속결로 끝내버렸다. 채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상대는 100레벨 후반대의 여자 용사였는데. 거대한 해머를 사용해서인지 움직이기 편한 경갑 차림이었다.
‘연화.’
뭐 복장 용모야 아무래도 좋다. 내가 X발 선도부도 아니고 신경써 뭐하나.
그녀는 나의 잠입, 연화에 이은 강맹한 기습과 후방타격의 웜보콤보를 버티지 못했다.
“꺄아아악!”
등 뒤에서 내지른 일격. 한 방에 등가죽이 관통당한 상대는 비명과 함께 널브러졌다.
피를 콸콸 솟으며 움찔대는 그녀를 쳐다보길 잠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심판에게 고개를 돌렸다.
심판이 잠깐 넋놓고 있다가 퍼뜩 목청을 높였다.
“스, 승자!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심판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펄럭, 이번에도 망토를 휘날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우오오오! 최고다 피젖달!”
“저 새끼 대체 정체가 뭐냐! 이번엔 눈 깜짝할 새에 순삭시켜 버렸어!”
“단 10초! 한 방에! 이번 무신제 최고 다크호스다!”
이젠 내 경기가 끝날 때마다 온 관객석이 술렁거린다. 평소 같았으면 쇼맨십이라도 부려줬겠지만. 지금은 묵묵히 적랑의 저택으로 돌아갈 채비만 했다.
내가 굳이 시간을 안 끌고 상대를 순삭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쥐새끼 검거완료.’
3회전까지 치른 시점에서 남은 도전자는 약 400명. 그 중에 잠입해 있는 모든 카사스의 사도들을 특정지었다.
총 15명. 그 새끼들의 대락젹인 정보와 본명이 현재 내 머리에 각인돼 있다.
‘그런데….’
전부 파악한 결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렉 마렌트. 탈리크. 잭 페퍼 등등. 전생에서 적랑을 습격해왔던 놈들의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제논만 빼고.
처음엔 잘못 본 게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확실히 없다.
답은 하나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다른 놈들이었구나…!’
저택에 습격을 자행한 놈들과, 무신제에 침투한 놈들은 별개의 부대다.
‘놈들이 대회 상품인 멸룡검을 노리고 있다’ 가설이 거의 정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시간을 끌기는커녕, 이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적랑에게 전해줘야 한다.
‘리액션 기대합니다. 적랑님.’
전생에선 셀피 헬만의 본명을 밝혀준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했던 적랑이다. 이 정보를 갖다주면 공중제비 도는 거 아니냐. 기대가 된다.
나는 서둘러 적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오늘 밤에 있을 카사스 사도들의 습격을 대비하는 것.
저택을 집어삼킨 화마를 떠올리자 입가에 감돌던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걸음에 한 층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