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눈앞의 붉은 머리 엘프는 내가 알던 그 제논이 맞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제논의 상태창을 띄웠다.
[명칭: 제논]
[별칭: 163400157번째 정식 용사. 갈란 숲의 열 번째 아들. 지존]
[LV. 137]
[체력: 1010/1010 마력: 770/770 신체상태: 정상]
[힘: 139 민첩: 154 지능: 101 히어로 센스: 11]
상태창의 상태도 똑같다. 내가 알던 제논이 확실하다.
아니. 하지만 전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괴물같이 일그러졌던 얼굴과 거슬리는 숨소리. 그리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던 그 눈동자.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데?
‘… 꿈을 꿨나?’
개 X까는 소리.
꿈이었으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전생에서 봤던 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게 꿈인 건가. 나는 환상을 보고 있나? 너 사실 관짝소년단 신멤버냐?
“너. 여기서 뭐하냐.”
혼자 고민해봐야 나오는 것도 없다.
결국 나는 제논에게 어렵사리 물었다. 시뻘건 화염 속에서 제논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제논은 피식, 시니컬한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대기실에 있는 거 보면 모르냐. 무신제에 참가했다.”
“왜 참가했는데.”
“그야… 제나와 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뻔한 걸 묻는군.”
“… 진짜냐?”
나는 으르렁대듯이 재차 물었다. 제논이 내 표정을 마주하더니 입을 콱 닫았다.
무슨 개소리를 그리 찰지게 지껄이냐 제논. 내가 전부 보고 듣고 왔는데.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잘 전해졌던 모양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아주 지랄 났다. 얼굴 안 봐도 하는 짓거리 보니 네놈인 줄은 알겠더군.”
제논은 전생처럼 문답무용으로 나를 참살하지 않고, 밉살맞은 변명을 해왔다.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제논이 맞구나. 실감이 든다. 실감은 드는데… 도저히 상황은 이해가 안 됐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잠깐 생각을 해봤다.
‘일단… 정리를 해보자.’
가장 최초로 제논을 재회했을 때. 현생으로 따지면 도살자 마리와 만난 시점이다.
그 때 제논은 이미 쇠 긁는 숨소리를 내는 괴물로 변해 있었다.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도 물음표 투성이로 변한 뒤였다.
두 번째 재회는 오늘 밤.
그 때는 야습 도중에 격돌했다. 숨소리가 더욱 격해져 있었고. 제논의 검에서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재회.
최초의 재회보다 오히려 수 시간 정도 늦은 시점인데, 아직 내가 알던 제논이다?
‘뭔가… 방아쇠를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러고 보면 헥터는 이런 말을 했었다. 제논이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고.
전생과 달라진 어떤 요소가,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온 제논의 변모를 억제한 걸지도 모른다.
‘대체, 뭐지…?!’
의문이 뇌리를 지배하는 한 편.
나는 베스타크를 힘껏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면!’
제정신일 때의 제논은 나보다 훨씬 약하다.
제논을 쉽게 죽일 수 있다. 삭초제근. 그 불타는 저택의 습격을 지금 한 순간에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모두의 이목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저놈을 죽여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
잠깐 제논의 눈을 마주봤다.
웬걸. 망설여졌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다. 갑자기 칼을 들이밀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원망할까. 죽는 순간까지 제나를 걱정할까. 그런 생각이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방의 풍경이 떠올랐고. 그 문구가 뇌리를 새빨갛게 지배했다.
그래. 내가 회귀를 반복하며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이 있다면. 나는 말만 용사지 진짜 용사가 아니기 때문에, 구할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주저를 떨쳐냈다.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줬다. 발도할 자세를 취했다.
‘좋아. 간다!’
그리고 그 순간.
키이잉! 사방에서 나타난 진행요원이 나를 둘러싸고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
모인 이들이 자그마치 십수명. 접근을 감지한 순간 이미 도달해 있었다. 움직임이 예상 이상으로 신속하다.
마치 이런 사태도 몇 번이나 겪어봤다는 듯한. 숙련자의 제압술이었다.
“도전자님. 검에서 손을 떼십시오. 그 이상 512번 도전자님께 접근 시 불순 의도로 간주하여 즉결처분하겠습니다.”
진행요원들의 이글거리는 눈이 우리를 향해 있다. 안 그래도 빠듯한 대회가 지체되고 있으니 독촉하는 것이다.
나는 진행요원에게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추궁의 눈빛을 뿌렸지만. 제논은 끝내 외면했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경기장 쪽으로 멀어진다.
‘염병할.’
미련을 담아 제논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되니 결국 포기했다.
나는 다시 도전자 대기실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다음엔 망설이지 마라.”
퍼뜩 뒤를 돌았다. 제논은 여전히 경기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뭐지. 잘못 들은 건가.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귓불을 매만지던 그 순간.
“다음에 나를 만나면…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마라.”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제논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흘깃 쳐다보며 그런 말을 남겼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걸어가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
그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제논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본인이 저질렀던 그 악몽의 기억이 지금 제논에게도 있는 것이다.
저 말을 내뱉는 저 새끼는 지금 무슨 심정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 용서할 생각 없다. 나도.”
제논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경기장까지 멀어져서 듣지 못한 것일 테다.
제논의 반대편에서도 대전상대가 올라온다. 무척이나 생소한 복장이라 오히려 눈에 익은 사람이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청 측, 1125번 도전자! 월희!”
심판의 외침으로 내 눈이 병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512번만 익숙한 게 아니군. 1125번도 만만찮게 익숙하다.
내 최초의 대전상대 제논. 첫 번째 전생 후의 대전상대 포티아.
두 사람이 현생에서 격돌한 것이다.
“제25경기장, 개전!”
기막힌 우연에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잠시 탐색전을 벌이는가 싶더니, 서로를 향해 일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포티아는 등에 메고 있던 평범한 장검을 꺼냈다.
전생에선 평범한 부채를 썼었는데. 저건 정체를 숨기기 위함인가? 순간 고개를 모로 꺾었다.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려 제논을 쳐다봤다. 제논은 용치기 단검을 꺼냈다. 케른에서 나를 꿰뚫었던 바로 그 녀석이다.
‘단검?’
나는 제논이 꺼내든 무기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흡!”
카아앙! 제논의 짧은 기합성과 함께 높은 금속음이 울렸다. 포티아가 내지른 검이 제논의 단검과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스슥, 제논의 주특기인 순간이동이 발동됐다. 제논은 어느새 포티아의 등 뒤를 점했고, 그대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캉! 카아앙!
이번에도 연신 금속음이 울렸다.
포티아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제논을 보지도 않은 채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고. 잇따른 공격도 수월하게 막아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유려한 공방이었다.
“… 큭!”
제논의 어깨가 격하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름 비장의 기습이었는데 허무하도록 쉽게 막혔으니 당황한 거겠지.
제논은 곧장 순간이동으로 거리를 벌려 조금 먼 곳에 등장했다. 그의 행동거지에는 전에 없던 경계심이 박혀 있었다.
‘왜… 멸흉검을 쓰지 않지?’
허리에 멘 붉은 곡도가 아니고 단검을 뽑았다.
왜지? 저 새끼 성격상 나처럼 힘숨찐 놀이가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냥 비장의 수단을 숨기기 위함인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붉은 곡도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보정치: ???]
[상세: ???]
[강화 가능 회수: 0]
X발. 또 물음표냐. 나는 욕지기를 삼키며 바닥을 괜히 차올렸다.
미미르의 눈은 이미 만렙인데 왜 자꾸 물음표가 뜨고 지랄인데!
“형님! 미미르의 눈 이거, 왜 이리 개갈 안 납니까! 만렙을 찍었는데 왜 상태창이 안 보이냐고요! 이게 게임입니까 형님!”
나는 억울하고 치사한 나머지 곧바로 GM한테 지랄했다. GM이 허리춤에 달려 있으니 컴플레인 박기 쉬워서 그건 좋다.
―글쎄다? 표기불가 사유는 워낙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서. 나도 몰라 인마.
수호 형님은 귀찮다는 목소리로 따박따박 대꾸했다. 그야말로 대형게임사 고객상담원 같은 태도였다.
X같다는 소리다.
“아니 그럼 형님, 저 빨간 칼 보고 뭐 엄청난 기운 같은 거 느껴집니까? 전생에선 항상 그렇게 개발광 하더만!”
―빨갱이 엘프가 갖고 있는 용문장 카타나? 엄청난 일뽕은 느껴지네. 딸기맛 류승룡 기모찌인가?
“예라이 X발 나가 뒤지십쇼!”
아무 짝에 도움 안 되는 수호 형님은 그쯤에서 놔주기로 했다.
나는 제논과 포티아의 싸움을 계속 주시했다. 상황은 점점 제논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읏…!”
제논이 경기장 여기저기를 종횡무진하며 포티아의 시야를 교란하려 했다. 하지만 제논이 공격을 가할 때면, 어디를 어떻게 찌르든 귀신 같이 알아본 포티아가 그것을 막아냈다.
파바바박! 이번엔 제논의 형상이 수십 개로 불어났다. 케른에서 나를 농락할 때도 썼던 환상 마법이었다.
가짜 제논들이 차례차례 포티아를 압박해 들어온다. 포티아도 처음 보는 잔재주에 좀 당황했는지 살짝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하앗!”
짧게 숨을 삼킨 포티아가 검을 수평으로 늘어뜨렸고. 이내 풍차처럼 거세게 휘둘렀다.
파사삭! 포티아의 검 궤적이 경기장을 휩쓴다. 무형의 파동이 탄환처럼 발사되며 순식간에 환상들을 찢어발겼다.
‘스팅어.’
적랑의 스킬을 베껴온 나는 그 기술을 단박에 간파했다.
아무래도 마르크트레스 자체가 기공술 연계기 위주로 발달한 곳이라 그런가. 개나 소나 이 스팅어라는 기술을 쓴다.
숙련되면 기탄을 한꺼번에 여러 개도 발사할 수가 있구나. 나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키잉! 포티아가 검을 들어 제논을 겨누었다. 그곳엔 망부석처럼 서 있는 제논의 실체만이 남았다.
“큿…!”
제논이 뒷걸음질 치며 침음을 흘린다. 예상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나는 혀를 차며 제논을 동정했다.
수십 레벨 차이만 해도 극복하기가 어려운 판국인데. 무려 100이상의 레벨 차이다.
이미 이건 20대 장정과 갓난아기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티아가 이기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기 손목 비틀기보다 쉽다.
“크으….”
드디어 제논은 그쯤에서 자기 허리춤의 곡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서서히 멸흉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의 사물들이 확 쪼그라든다. 온몸의 감각이 확장됐다.
“… 커헉…!”
히어로 센스가 발동되었다. 나는 등줄기를 후려치는 아찔한 위기감에 순간 숨을 삼켰다.
시야가 확장되며 1분 1초가 더뎌진다. 느리적한 사고 속으로 한 가지 가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건드리지 않은, 트리거?’
생각을 해보자. 제논은 내가 피젖달인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생에서 나와 맞설 때, 망설임 없이 멸흉검을 뽑은 것이다.
“… 설마.”
그리고 지금. 제논은 멸흉검을 뽑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그는 현재까지 제정신이고, 적어도 제정신인 제논은 뽑기를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멈춰.”
만약에 제논이 지금까지 운 좋게 쉬운 상대만 만나서, 멸흉검을 뽑을 일이 없었다면. 전생과 달라진 부분이 바로 그것이라면.
그러니까 다시 말해… 검을 뽑는 것 자체가 완전한 잠식의 트리거라면?
“안 돼! 그거 뽑지 마 제논!!”
나는 경기장을 향해 튕기듯이 달려나갔다.
진행요원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나를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사신경으로도 막지 못할 스피드로 돌파했다.
그렇게 빠른 스피드였지만. 아무렴 허리춤의 검을 쥐는 속도에 비빌 수는 없었다.
‘미미르의 눈!’
나는 황급히 제논의 상태창을 띄웠다. 그러나.
[상태 이상 ― 잠식]
[상세: 미지의 힘으로 대상의 양태가 변화한다. 변화 후 상태가 표기된다.]
[명칭: 제논]
[별칭: 163400157번째 정식 용사. 갈란 숲의 열 번째 아들. 지존. 멸흉의 계승자]
[LV. 137]
[체력: ???/??? 마력: ???/??? 신체상태: 광증, 잠식]
[힘: ??? 민첩: ??? 지능: ??? 히어로 센스: 11]
시스템이 사형을 선고했다.
‘역시나…!’
멸흉의 계승자는, 멸흉검을 뽑으면 그 때서야 나타나는 이명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 필사적인 달리기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멍하니 뜬 눈으로 제논을 쳐다봤다.
“… 끄…!”
제논이 잠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우드득, 꾸드득! 미동도 없이 서있던 그는, 이내 온몸의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그리고….
“스으… 스으….”
복면 안에서 쇠를 긁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미친 X발! 저, 저 칼 뭐냐? 어떻게…!
그리고 그 순간. 수호 형님의 당혹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퍼뜩 베스타크에 시선을 박았다.
베스타크가 우우웅, 격렬한 진동과 함께 수호 형님의 목소리를 뽑아냈다.
―야 정용아! 떨어져라! 저, 저건 너랑 상성이 너무 최악이야!!
… 전생에서 수호 형님이 내게 해줬던 말과 거의 판박이였다.
나는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추측은 옳았다. 제논은… 지금 절찬리에 변모하는 중이다.
―저 칼에 베이면 안 돼! 너는 닿는 것만으로도 저놈 이상의 괴물이 될 거다!!
수호 형님의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이 내 직감이 맞았음을 알려줬다.
수호 형님에게 검에 대해 더욱 추궁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내 제논의 반대편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포티아의 모습이 보였다.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 안 돼.”
포티아는 상대의 기세가 갑작스레 변화해서 좀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잡고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야 X발! 포티아! 도망쳐!”
나는 다시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포티아를 향해 소리쳤다.
순간 포티아의 놀란 표정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자기 본명이 나와서 놀란 것이다.
나는 이 때다 싶어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빨랑 도망쳐!! 저건 막을 수 없…!”
그리고 서걱. 예리한 절삭음이 들렸다.
내가 경기장 코앞까지 도착했을 때. 이미 포티아의 등 뒤로 제논의 신형이 도달해 있었다.
제논이 움직인 궤적을 따라 붉은 검광이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어. 아… 으?”
포티아의 의문에 찬 얼굴에 쩌적, 세로로 금이 갔다. 일자로 난 혈선을 따라 그녀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철퍽! 깔끔하게 반으로 두동강 난 몸이 경기장 바닥을 나뒹굴었다. 장기와 핏줄기가 무기질적으로 바닥에 쏟아졌고. 사방으로 질척하게 흩어진다.
“…….”
적막이 강림했다. 지켜보던 관중도, 나도, 그리고 제논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와아아아―! 투기장이 찢어져라 울려대는 함성은 그 직후에 쏟아졌다.
“스으… 스으….”
천둥 같은 함성 속.
나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쇳소리를 내뱉는 제논을 가만히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