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역학조사 ON
적랑과의 대화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는 꼬박 세 번째 맞이하는 2일차 무신제 전까지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개인정비래 봐야 별 건 없고. 이번에 새로 쌔벼온… 아니, 말이 좀 그렇군. 적랑과의 전투로 목숨바쳐 얻은 스킬들에 대한 것이었다.
[스킬 정보]
[명칭: 기공술 (액티브)]
[효과: 마력의 지속적 연소. 소모 마력량: 분당 150. 전체 능력치 1.2배 상승]
[상세: 최후의 거인 크로스페이드가 창시한 기술. 마력을 연소하여 신체 능력을 활성화한다. 기공을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주축이 된다. 레벨이 오르면 마력 효율이 증가한다. 사용 시간에 따라 상태이상 - 반동(反動)에 빠진다.]
[스킬 정보]
[명칭: 기폭 (액티브)]
[효과: 체력의 지속적 연소. 소모 체력량: 분당 300. 전체 능력치 1.5배 상승]
[상세: 최후의 거인 크로스페이드가 창시한 기술. 체력을 연소하여 신체 능력을 활성화한다. 레벨이 오르면 체력 효율이 증가한다. 사용 후 반드시 상태이상 - 탈진에 빠진다.]
[스킬 정보]
[명칭: 아머 브레이크 (패시브)]
[효과: 치명타 공격시 방어도 감소율 2배 적용. 낮은 확률로 완파.]
[상세: 방어구의 극점에 충격을 가해 파쇄율을 높인다. 레벨이 오르면 방어도 감소율과 완파율이 증가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기공술은 마스터 레벨까지 스트레이트로 찍어 버렸다.
‘적랑이 스펙으로도 나한테 뒤지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어.’
나는 전생에서 적랑과의 전투를 다시금 반추했다.
분명 스탯 고하를 막론하고 전투 자체의 실력차가 현저했던 건 맞다. 하지만 스탯 차이는 내쪽이 현저히 높았어야 함에도 속도와 파워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둘 다 훔쳐왔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적랑은 ‘기공술’과 ‘기폭’ 둘 다 사용했던 것 같다.
즉 적랑도 그 싸움에 자기 모든 걸 내던질 각오로 임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기폭은 좀 배우기 애매한 스킬이다.’
기공술과 달리 너무 하이리스크다.
‘탈진’은 일정 시간동안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는 상태이상이다. 말 그대로 리타이어.
다시 말하면 스킬을 한 번 발동했으면, 무조건 지속시간 안에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지 않으면 필패로 이어진다.
나는 루시와 이미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약속을 한 몸이다.
그 약속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할 생각이 없다.
‘아머브레이크는 솔직히 쓸모가 없고.’
레벨이 높아질수록 느끼는 건데. 방어도가 별 의미가 없다.
용사지원 시스템은 공격력은 한없이 높일 수 있어도, 방어력은 높일 수 없다. 방어도는 체력 위에 얹히는 추가체력 같은 느낌이라 개념이 좀 다르다.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 내 필살 절명콤보에 맞고 한 방에 죽지 않은 사람이 지금껏 변경백과 적랑, 둘 뿐이니까.
그 둘 같은 경우는 애초에 기습공격이 먹히질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10만 찍어둘까.’
마스터 레벨까진 현시점에선 과투자인 것 같고. 일단 반 정도만 찍어두기로 했다. 그러고도 아직 스킬 포인트가 70이나 남아돈다.
진짜 불사교 잡으면서 폭풍 성장을 하긴 했구나. 새삼 실감이 들어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 * *
스킬도 전부 맞췄겠다. 준비는 이제 만전이었다.
나는 이틀차 무신제 예선전에 임하기 위해 저택을 나섰고. 무신의 투기장에 입장했다.
“제38경기장, 개전!”
나는 심판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전상대의 상태창부터 띄웠다.
복면을 썼든 안 썼든 상관없다. 이 대회에 위험이 산재했다는 걸 안 이상, 거의 반자동화된 프레이즈였다.
[명칭: 마리 카메인]
[별칭: 153850197번째 정식 용사. 도살자 마리, 무성]
[LV. 228]
[체력: 1800/1800 마력: 600/600 신체상태: 정상]
[힘: 473 민첩: 221 지능: 29 히어로 센스: 15]
상대는 제리 레버논을 가장한 흑화 제논도 아니었고. 적랑이 심어놓은 마녀사냥꾼 포티아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계속 그랬듯 이번에도 1차전 대전상대는 바뀌었다.
‘도살자 마리.’
관중석에 있을 때 그 이름을 분명 들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내는 탱크탑 차림에, 거대한 작두를 들고 있는 중년 여자. 단단한 플레이트 아머를 단박에 썰어버리던 호쾌함이 기억난다.
그 때 관중석의 함성이 엄청났던 걸 보면, 마르크트레스 근방에서는 꽤 네임드 용사가 아닌가 싶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이번 대회에서 내가 도전할 것은 다름 아닌 정보 수집.
오늘 안에 최대한 많은 수의 도전자들을 스캔하면서, 헥터 카사스의 따까리들을 솎아내는 작업을 할 것이다.
놈들이 무신제에 침투한 정확한 의도를 알고. 또 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선. 우선 정확한 구성을 아는 게 급선무다.
‘일단 경기장엔 딱히 수상한 놈들은 없고….’
경기장에 들어왔을 때. 이미 다른 경기장의 도전자들도 모두 스캔해봤다. 하지만 ‘카사스의 사도’라는 이명을 달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주변 경기장을 연신 둘러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불사교 놈들은 전부 몬스터로 표기가 됐었는데….’
전생에서 봤던 헥터 카사스와 따까리들을 떠올렸다. 분명히 인간의 상태창이 떴었다.
카사스는 불사교보다 훨씬 더 깊게 세상의 어둠에 관여한 놈들이다. 그런데 왜 얘네들은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상태창이 뜨지?
나중에 날 잡고 수호 형님한테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엇.”
나는 상념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후우웅! 내 눈앞으로 휘둘러진 작두가 잡생각을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뭘 멍하니 있냐! 덤벼라 꼬마야!!”
“…….”
이 개년이 오랜만에 사색에 잠긴 박정용을 방해해?
순간 짜증이 울컥 치고 들어왔다. 내 머리를 노리고 미친 듯이 휘둘러지는 작두를 어렵지 않게 피해내다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양손을 작두로 뻗었다.
카아앙!
드높은 금속음이 경기장의 공기를 울렸다.
“어, 으… 이런!”
도살자 마리가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끼릭, 끼릭. 작두는 내가 가위처럼 교차한 쌍검의 사이에 끼어 찌뿌등한 염을 토해냈다.
그녀가 작두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양손에 힘을 줬다. 그녀는 어쩌지도 못하고 내게 무기를 고정당한 꼴이 되었다.
“이 새끼가!”
그러자 의외로 마리는 금세 작두를 포기했다.
스슥! 허벅지에 매달려있던 단검 하나를 빼들어 곧장 내 목을 노렸다. 숙련된 암살자처럼 재빠른 움직임. 방금 작두를 다룰 때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 저게 짬 차이라는 건가.’
유명세를 탄 데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상황판단이 냉정하고 행동은 칼 같다. 적랑에겐 있고 내게는 없는 것. 전투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는 감탄하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림자 사슬.”
촤르르륵! 경기장의 사방팔방에서 꿈틀거리며 쏟아지는 시커먼 어둠. 그것들이 마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사지를 빠짐없이 휘감았다.
기습적인 스킬이었다. 그녀는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대로 구속당했다.
“커… 허억!”
몇 개 사슬은 그대로 마리의 목으로 흘러들었고, 그대로 단단하게 조였다.
우드득. 살벌한 소리가 나며 사슬이 조여든다. 마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항복해라. 자비 정돈 베풀어주지.”
이 와중에 마무리대사3을 중얼거렸다.
…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기왕 계속 무신제에 있게 된 거, 할 건 하고 가야지.
“끄, 으아아, 하, 항복! 항복이다!!”
마리가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외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슬을 전부 해제했다.
드드드드. 사슬이 시커먼 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탱해주던 사슬이 사라지자, 마리는 그대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헐떡대며 숨을 탐했다.
“스, 승자! 112번 도,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심판이 경기의 종료를 알렸다.
죽은 듯이 적막하던 주변의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경기장이 무너질 듯한 함성을 쏟아냈다.
“이런 무친 피젖달! 마리까지 이겨버리다니!!”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딱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언제는 30년 놀린다며 븅신아!”
아무렴 육체고 정신이고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나는 만족스럽게 그 소란을 즐기며 경기장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이내 입을 모아 내 가명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피에!”
“젖은!!”
“달그림자!!!”
“오아아아!!!!”
… 솔직히 그건 좀 쪽팔렸다.
그래.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생각해도 피젖달은 좀 선 넘긴 했어.
X발. X나 사방에서 ‘피젖달’이 들려오니 쪽팔려서 미칠 것 같네.
“피젖달! 피젖달!”
“피젖달! 피젖달!”
도살자 마리의 주목도가 높아서 그런 건가. 인지도가 삽시간에 높아진 느낌이었다.
하긴. 모 게임의 명대사로 이런 게 있다.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하는 거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지.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도살자 마리. 그리고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중2병 환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두 사람이 맞붙은 결과는 피젖달의 압도적인 승리.
원래 기대하지 않던 것이 의외의 성과를 내면 기분이 더 좋은 법이지. 지금 내 인기는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 보고 있냐. 헥터 카사스.’
나는 여기서 이렇게 대놓고 즐기고 있다.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수많은 관중들과 도전자들. 혹은 수정거울의 화면 너머 어딘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그 새끼를 생각하며 이를 시원하게 갈아붙였고.
펄럭! 지금까지 그랬듯 망토를 거칠게 휘날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나는 눈알이 빠지도록 대기실의 인원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후우… 피곤해 죽겠네.”
대기실에선 유동인구가 워낙 많은데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들끓는 인간지옥이었다. 미미르의 눈으로 일일이 파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엄청 지친다. 케른에서도 그랬지만… 이거 연속으로 사용하며 대가리에 정보 주입하는 게 생각보다 개빡세다.
물론 내가 빡대가리라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이놈이 저놈 같고. 저놈은 이놈 같고… 미치겠다.’
방금 이 복면맨을 스캔해서 저 복면맨을 스캔하려 했는데, 시합 진행 때문에 인파가 우르르.
한바탕 민족대이동이 끝나면 뇌가 리셋된다. 잠깐 시야에서 놓쳤다가 다시 확인해보니 이 복면맨이 사실 저 복면맨이더라… 이런 식이다.
이 새끼들 죄다 복면과 후드를 같은 곳에서 산 건지, 도통 구별이 안 간다.
“끙….”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확인한 인물이 서른 명 남짓.
물론 죄다 허탕이었다.
“예미. 운 안 좋은 건 알아줘야 돼.”
적어도 한 놈 정돈 더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3백의 복면맨 중 1할을 스캔했는데 그 중 하나도 안 걸릴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놈들을 확정짓기가 쉽지 않겠군. 까마득한 미래에 한숨을 흘렸다.
“512번 도전자와 1125번 도전자님! 제25경기장으로 입장해주십시오!”
눈알이 빠지도록 사람들을 살피는 내게 문득 고함소리가 들렸고. 나는 퍼뜩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 얼빠진 탄성이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 번호…!’
끊임없이 울리는 진행요원의 호명 중에서도, 유일하게 그 목소리만이 내 귀에 들려왔다.
512번. 절대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 나는 황급히 수정거울의 25경기장 패널로 시선을 돌렸다.
―512번 도전자: 제리 레버논
나는 스프링처럼 튕겨 자리를 박찼다.
인파들을 거칠게 헤집고 나아가, 경기장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깐! 잠깐 기다려!!”
수많은 인원들을 가까스로 뚫고 통로 앞으로 나왔다. 탁 트이는 시야 한 가운데로 복면과 거적을 뒤집어쓴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단박에 그놈의 정체를 알아봤다. 허리춤에 찬 새빨간 곡도 때문이었다.
“야 X발! 제논!!”
나는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복면 사내의 어깨를 붙들었다.
한 손은 베스타크의 손잡이에 얹고, 언제든지 가시와 마력검을 때려박을 준비를 마쳤다.
“…….”
복면 사내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침묵이 깔린다. 베스타크를 쥔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놈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케른에서도 그랬지. 대체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아내는 거냐. 기분 나쁜 놈 같으니.”
피처럼 검붉은 눈동자도 없고. 피부에 불거져 나온 핏줄도 없다. 쇠 긁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알던 제논이었다.
전과 똑같이 가벼운 경멸을 담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어?”
나는 할 말을 잊은 나머지 한동안 망부석이 돼버렸다.
솔직히 말을 걸면서도 대화가 통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