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사실상 디아나의 만수무강을 누구보다 바라는 건… 용사들일세.”
적랑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덩달아 대답하는 내 눈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토끼를 사냥하는 사냥개는, 토끼가 영원히 잡히지 않길 바랄지도 모른다는 걸세.”
“… 아하.”
선문답과 비유는 극혐이지만, 이 비유는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국빈회의 때 베르켈의 완고한 태도가 떠오른 것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랑은 닭고기 수프 접시를 괜히 두들기며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조용히 정제된 분노가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토끼만 잡히지 않으면 자신의 쓸모가 유지되고. 사냥꾼은 잠자리와 밥을 풍족하게 제공해준다. 배부른 사냥개는 그 충성에 노력으로 보답하기보단 이렇게 생각하지.”
고요히 타오르던 시선 안. 분노가 희번득한 예광을 발했다.
“내가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토끼를 잡는 동안뿐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사냥이 끝나면 나는 사냥꾼의 식량만 축내는 버러지로 전락한다. 나는 믿고 의지했던 사냥꾼에게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저녁 식탁에 오를 것이다.”
“…….”
“그래. 토끼를 놓아주자. 이 순간이, 나의 영광이. 최대한 오래 지속되도록….”
콰직. 적랑의 포크에 찍힌 닭고기가 사정없이 부서졌다. 포크도 부러졌다.
나는 단단한 증오가 어려 있는 비유에 식은땀을 슬쩍 흘렸다.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 용사들이 지금, 일부러 마왕이 판치는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고요?”
“적어도 각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고위 용사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보네. 자네도 알겠지만. 아신들의 용사 취급은 꽤 느슨하잖나?”
“뭐… 그렇긴 하죠.”
적랑은 번득이는 은색 눈으로 가만히 허공을 주시했다.
시선을 따라가봤다. 창문 밖으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 공중요새, 레비아탄이 눈에 들어왔다.
“운터란트 비행수도에 대한 얘기는 알고 있나?”
“뭐 말입니까.”
“운터란트 망자의 계곡엔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괴질이 돌고 있다네. 해마다 감염자 방어선에서 소환된 용사들과 원주민들이 죽어나가지만. 괴질의 원인으로 알려진 마왕 자드키엘은 25년이 넘도록 생존했다. 불사의 마왕을 제외하면 최장 생존기록일세.”
“…….”
“운터란트의 일부 상위 용사가 정치에 개입한 결과지. 자드키엘을 능히 물리칠 저 위대한 병기가… 지상에 잔류한 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 돼버린 걸세.”
토벌 시 운터란트의 피해 규모도 치명적일 것이다.
지금도 적은 피해로 잘 막아내고 있는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이 그들이 내세운 논리고. 실제로 얼추 맞는 말이라 쉽게 선동조차 못한다고 한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 아닌가.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였고. 적랑이 나서서 의문을 해소해줬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자네가 엘더리치를 토벌해주기 전까진, 요한의 할센베르크령 역시 비슷한 이유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졌군.
나는 무너진 옥좌에 앉아 죽을 때를 기다리던 변경백을 떠올렸고. 고개를 침중하게 끄덕였다.
“… 예. 아주 잘 알죠.”
“요한 그 등신새끼는 항상 자신을 책망했지만… 칠마존들이 마법 연구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그게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지. 그리 순진해 빠졌으니 정치하는 돼지새끼들 손에 놀아날 수밖에.”
“그… 칠마존을 많이 싫어하시나 봐요?”
“싫다. 그들은 힘을 가진 자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 뼛속까지 혐오스런 족속이지.”
적랑은 혀를 차며 멀리 북쪽 방향을 바라봤다.
씻어내지 못한 증오가 줄줄 흘러나오는 서늘한 시선이다. 수저를 쥔 그의 손이 하얗게 물들 때 즈음.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간과하고 있다. 숲이 불타면 사냥꾼도 사냥개도 토끼도 꼼짝없이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눈앞의 배부름에 눈이 멀어 있지.”
“…….”
“바로잡아야 한다. 토끼를 물어 죽여 지리멸렬한 사냥을 끝내고. 사냥꾼을 숲에서 축출할 것이다. 이미 진작에 끝났어야 할 사냥개의 번영을 종식시키겠다. 그 결과 내 가죽이 산채로 벗겨질지라도.”
사냥개는 용사.
토끼는 마왕과 마족. 좀 더 나가면 마녀 디아나.
숲은 이 세상, 파라이소 대륙.
그렇다면… 적랑이 말하는 사냥꾼이란.
‘아신.’
미네르바나 사신 자매 같은,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낸 당사자들.
지금 적랑이 말하는 것으로 추측해 보자면. 마녀사냥꾼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녀를 사냥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아신들을 몰아내는 것처럼 들린다.
‘… 어떻게?’
그리고 왜?
마녀 디아나를 죽이면 왜 아신들이 물러난다는 거지? 그리고 왜 굳이 몰아내려 하지?
무수한 의문들이 돌고 돌았다. 결국 근본적인 물음들을 내 머릿속에 깊게 새겼다.
“… 대체 마녀는 뭐고. 마왕은 뭐고. 용사는 뭡니까? 우린 여기에 왜 소환된 거죠?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
“대체 뭘 더 알고 계십니까. 적랑.”
그러나 적랑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두른 채 침묵을 지키더니. 식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버렸다.
적랑이 유유히 식당을 빠져나간다. 나도 식기를 정리하고 빵 몇 개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자네가 마녀사냥꾼이 되어 준다면 기꺼이 말해주겠네. 지금은 아닐세.”
“에이. 저는 있는 대로 다 불었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쏙 빠지면 어떡합니까.”
“자네도 아직 내게 숨기는 게 있잖나. 피장파장일세.”
세상에. 그것까지 간파하고 있었군. 못 당하겠다.
나는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졌다는 신호다. 적랑은 슬쩍 눈웃음치더니 번쩍, 주먹을 치켜들었다.
“자넨 결국 나와 뜻을 함께하게 될 거야. 머지않은 미래에 말이지.”
“… 마녀사냥꾼은 예언도 할 줄 압니까?”
“그냥 직감일세.”
적랑은 너털웃음과 함께 식당 문을 연다.
그가 발을 떼며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 직감은 믿을만 하지. 이 세계에서 용사의 히어로 센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느리적하게 주억거렸다. 그리고 적랑 쪽으로 주먹을 쥐어 마주치는 시늉을 해줬다.
바로 지금이다. 적랑이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참고 참았던 말들을 기어코 쏟아냈다.
“오늘 밤에, 무신제에 잠입한 조직이 여기를 습격할 겁니다.”
“!!”
적랑이 순간 몸을 굳혔다.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부정적 제스처였겠지만. 적랑에 한에서 이건 계속하라는 신호다.
일단 시작이 좋다. 나는 탄력을 받아 나불대기 시작했다.
“제가 적랑님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닌데요. 일단 숫자가 수십 단위인데다, 터무니없이 강한 놈이 하나 섞여 있습니다. 아무리 적랑님이라도… 살아남기도 버거울 겁니다.”
“… 흐음.”
버거울 겁니다가 아니고 버거워. 니네집 초토화 돼. 싹 뒤져. 내가 봐서 알아.
나는 닭의 뼛조각 몇 개를 접시쪽으로 슥슥 긁어모으며 말했다. 적랑의 시선은 내가 긁어모은 뼛조각을 따라 움직였다.
“마녀사냥꾼들을 해 지기 전까지 전부 이곳으로 소집하시죠. 최대한 비밀리에 소집하셔야, 역으로 놈들의 허를 찌를 찬스가 나올 겁니다.”
적랑이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평소엔 날 선 맹수의 눈빛 때문에 쫄아서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지만. 지금만큼은 두 눈에 힘 빡 주고 진실을 어필했다.
내 표정이 웃겼는지 어쨌는지, 적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말하자마자 내 히어로 센스를 의심하는 순간이 오는군. 할센베르크에 혼자 남겠다던 요한의 결심을 들은 이후로 처음이다.”
“그 말씀은…?”
“거짓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소리다. 이렇게 됐으니, 설령 거짓말이라도 속아 넘어가주도록 하지.”
좋았어. 성공이다! 이 정도면 습격 대책은 완벽하겠지!
아무리 흑화한 제논이 날고 기어도. 엘프리데, 적랑, 백은과 황금, 검림에 포티아까지. 세계 정상급의 무력을 가진 장군들이 무려 6명이나 있는데!
공중제비 돌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와중. 적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문득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좀 이상하군.”
나는 퍼뜩 놀라서 곧장 되물었다.
“… 뭐, 뭐가요? 제가 그리 의심됩니까? 불신사회 타파하고 정의사회 이룩합시다 적랑님!”
방금까진 거짓말이라도 속아 준다며. 왜 갑자기 밑장 빼냐.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에 띄게 당황하자, 적랑이 손사래를 쳤다.
“의심하는 게 아닐세. 다만 놈들이 야습을 감행한다면… 좀 이상해지잖나.”
“대체 뭐가요?”
“어차피 야습을 통해 마녀사냥꾼의 목을 칠 계획이었다면. 무엇하러 신원이 들킬 위험까지 감수하며 무신제에 숨어들었을까? 놈들에게 이득이 전혀 없는 행위 아닌가.”
“…!!!”
잠깐 동안 숨도 쉬지 못했다. 그쪽으론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벙찐 표정을 짓자, 적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자네.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모양이군.”
“아, 아… 네.”
“말해줄 수 있나?”
“그게…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전생에서 암시장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크로스페이드 상연회의 그레이는 이런 말을 했었다.
‘멸흉검은 이번 대회의 본선 1등 상품인 멸룡검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 놈들이 무신제 침투조를 구성한 이유도 설명되고. 헥터의 조종으로 무신제에 참가했던 제논이 멸흉검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납득이 된다.
내가 추측한 것을 적랑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야습이 감행된다면 무신제 침투에는 별개의 목적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대회 상품인 멸룡검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네.”
“아!”
나는 척추를 활짝 펴며 격한 리액션을 했다.
그러자 적랑은 너털웃음을 흘리는 한 편. 내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멸룡검인가. 멸룡검이 질 좋은 보구인 것은 확실하지만. 숨겨진 힘이 있다는 전설은 들어본 적이 없거늘….”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니 무서울 정도로 눈을 빛낸다.
역시 이 사람… 적일 때는 한없이 짜증났지만, 아군이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내가 아침밥으로 수육국밥을 먹었나 싶을 정도다.
“어쨌든 기왕 한 배를 탔으니 함께 돌파해보세. 정용 군.”
마지막 적랑의 한 마디와 함께 콰당. 문이 닫혔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테이블 밑에 잔뜩 웅크려 있던 루시가 천천히 내 옆으로 기어들어온다. 그녀는 불쾌한 얼굴로 적랑이 나간 식당 문을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으으. 기분 나쁜 놈이니라. 나 쟤 싫다 용사.”
“솔직히 반쯤은 인정.”
나는 바리바리 챙긴 빵을 루시에게 휙 던졌다. 루시는 입으로 받아내서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오랜만에 루시와 마음이 통하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