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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48화 (124/280)

148화

‘데헷’ 같은 개소리가 나온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의외로 루시의 한 마디는 지대한 효과를 냈다.

김이 빠져서 그런 건지, 적랑이 적의를 다시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은 것이다.

“…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네만. 정용 군.”

“네. 안 그래도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가 커밍아웃을 시작했을 때. 적랑은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 않았다.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짐작하던 대로다’라는 느낌이다.

“그렇군. 불사의 마왕이 이미 부화한 상태인데다… 자네는 계약으로 묶여서 그녀를 지켜야 하는 처지라는 겐가.”

적랑은 흠, 하고 낮은 침음을 흘렸다.

대답하는 나도 휴우, 하고 한숨을 흘렸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신제에 숨어든 놈들의 목적이 마녀사냥꾼 제거뿐만이 아니라… 자네와 불사의 마왕을 포획하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이 소리군.”

“요점정리 진짜 잘하시네요. 학습지 팔아도 되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대부분의 사실을 적랑에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상대가 나에 대해 빠삭하다면. 어쭙잖게 약 팔아봐야 전생처럼 부작용만 난다.

말할수록 내 골치만 빠개지는 시공회귀에 대한 것만 빼고. 대부분은 양념만 살짝 쳐서 전부 불었다.

“… 흐음.”

달그락 달그락. 침묵 속에서 앓는 소리와 식기 움직이는 소리가 부던히 울렸다.

앓는 소리는 적랑이 냈고. 처먹는 소리는 내가 냈다.

“후르륵. 찹찹. 헙쳡쳡. 푸라라락,”

다른 건 모르겠고. 이집 밥 솜씨는 진짜 기가 막힌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술술 들어가네 아주.

이거 카르할라스가 만든 건가? 이 정도면 적랑이 전에 말했던 혼례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생각해볼 여지가….

“곤란하게 됐군. 자네도 물론 필요하지만… 마왕의 알을 회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카르할라스와 제주도 신혼여행 패키지까지 결제한 순간.

적랑의 난처한 목소리가 비행기 이륙을 방해했다.

‘… 그랬다 이거지.’

처음부터 나를 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알의 회수 각을 재고 있었다는 거군. 적랑. 당신도 이렇게 보니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야?

나는 날카롭게 벼렸던 눈을 내리깔았다. 포크에 꼽아놨던 스테이크 조각이 보인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꿀꺽. 곤란하시겠수. 여러모로.”

“그러게나 말일세.”

스스로도 선 넘는다 싶게 막 나가고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위기에 봉착할수록 아득바득 개기고 싶어지는 이 오기와 객기는 어디서 샘솟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이런 내가 무섭다.

“저 숙녀분이 그 불사의 마왕이었을 줄은. 내 불사의 마왕을 멀리서나마 직접 본 적도 있다만… 그래서 더욱 믿을 수가 없다. 외형이든 기세든 엄청난 차이가 있군.”

껄껄 웃어넘긴 적랑은 흘깃 루시를 쳐다볼 뿐이다.

역시 변경백이랑 친구여서 그런지, 내 싸가지 없는 태도를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나도 적랑을 따라 루시를 빤히 쳐다봤다.

“뭘 꼴아보냐 늙다리! 샤악!”

루시는 적랑과 눈이 마주치자 새된 소리를 내며 꼬리를 빳빳이 세웠다.

퍼뜩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기고 머리만 빼꼼 내밀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주시한다.

‘고양이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픽픽 웃는데, 문득 적랑이 입을 열었다.

아쉬움과 간절함이 잔뜩 묻어나는 기색이었다.

“정용 군. 지금은 약체화 되어 자네 통제 하에 있다고 하나. 저 여인이 터무니없는 위험요소인 건 변함없어. 지금이라도 양도받을 수는 없겠나.”

“음. 그건 좀 곤란하죠?”

“왜 곤란한가. 자네가 죽기라도 하나?”

“죽습니다.”

물론 구라다.

하지만 루시와 떨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죽는다고 단언했다.

적랑은 내 단호한 행색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물어왔다.

“자네는 불사의 마왕이라는 이명의 무게를 알고 있나.”

“무겁나요?”

“과장없이. 전 대륙이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있네. 내 나라 마르크트레스나 미텔란트. 그리고 운터란트와 용제국도.”

“… 흐음.”

“행인 셋을 붙잡고 물어보게. 셋 중 하나는 분명히 불사의 마왕군에게 친지를 잃었을 걸세.”

꾸드득. 적랑의 건틀렛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주먹쥔 손이 찌뿌등하게 울음을 토한다. 격앙된 감정으로 미미하게 떨리는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아. 그러고 보니.’

새삼 긴장된 나머지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저택에서 지금껏 느껴졌던 위화감 하나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 아내가 안 보이네.’

하다못해 변경백은 시체와이프(?)라도 끼고 살았는데. 지금껏 이 저택의 안주인을 본 기억이 없다.

… 아무래도 적랑은 행인 셋 중 하나에 속하는 모양이다.

‘카르할라스도 패드립 면역자였냐.’

나도 어머니 없이 자랐다 보니, 집에 아빠만 있는 상황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서 위화감을 눈치 채는 게 좀 늦었다.

“다시 한 번 부탁하지. 불사의 마왕은 마녀살해 계획에 있어 중요한 열쇠일세. 넘겨주게.”

적랑의 나직한 한 마디. 권유였지만 사실상 협박이었다.

적랑에게서 찌르듯이 쏟아져 나오는 살기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었으니까.

‘중요한, 열쇠라….’

변경백 이후로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직접 목숨 걸고 맞짱을 떴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이상으로 쫄아서 덥석 넘겨줬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꾸덕하고 구질구질한 집착이 느껴졌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 곤란합니다.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요.”

사실 루시 같은 시한폭탄을 알아서 회수해주면 나는 땡큐다.

무거운 짐도 사라지고. 인류의 공적 될 일도 없고. 괴상한 암흑조직이 내 목숨을 노릴 리도 없다.

안락한 이세계 라이프의 미래설계도 한층 수월해질 거다.

‘헥터 카사스와 만나기 전까지였다면.’

하지만 이젠 아니게 돼버렸다.

루시가 시한폭탄이고, 무거운 짐인 건 그대로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의미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루시를 남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겠다.

‘네가 알긴 하냐?’

케른에서 루시가 내 부활을 ‘당연한 일’이라고 해줬을 때. 내가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아냐고.

한 번 뒤지면 땡이고. 그 죽음이 모두에게 기억되는 당신은 절대 이해 못하지.

나처럼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내가 잃어버린 내 죽음을 기억해주는 유일한 여자다.’

그리고 내가 죽었다 살아나면. 그 사실을 나보다도 먼저 알아채준다.

그 유용성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필수불가결하다.

나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이제 루시가 없으면. 괴물로 전락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도망을 가야 하나… 아니면 설설 기어볼까…?’

적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거절하는 그 순간에도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한 동안 숨 막히는 침묵의 대치가 이어졌다.

“… 후우.”

그러나 의외로 적랑은 곧 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포기함세. 자네에 대한 의문점은 어느 정도 풀렸고… 개인적으로 마녀사냥꾼 후보로 눈독도 들이고 있으니까.”

“…… 후아. 가, 감사합니다.”

“당당하게 내게 맞서온 용기를 높이 샀네.”

잘 생각하셨수다 흰머리 양반.

한숨과 함께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적랑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물론이다. 얼마든지.”

“인도하는 까마귀가 대체 뭡니까.”

“…….”

내 질문은 핵심을 찌른 듯했다.

적랑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여유가 사라진 게 그 증거다.

“적랑님. 저를 마녀사냥꾼 후보로 생각하고 계시다 했는데… 그 이유가 그거죠? 내가 그 뭐시기냐. ‘인도하는 까마귀’일지도 모르니까. 틀립니까?”

X발 아무렴 틀릴 리가 있나. 방금 전에 적랑 본인의 입으로 ‘네가 걔니?’라고 묻는 걸 듣고 오는 길인데.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루시 쪽을 흘깃 쳐다보며 계속 압박했다.

“불사의 마왕… 루시를 데려가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 어쩔 것 같은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적랑은, 이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지금까지 걸려 있던 웃음과는 한 꺼풀 다르다. 잔인한 뒤틀림이 있었다.

눈을 끔벅이는 찰나. 평소처럼 돌아온 적랑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글쎄. 마녀사냥꾼도 아닌 자네에게 간단히 전말을 밝혀줄 수는 없지.”

드디어 문제의 그 집단이 등장했다. 멀리도 돌아왔군.

나는 전생에서의 긴급회의를 떠올렸고. 인원들의 면면을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마녀사냥꾼. 그거 말인데요. 대체 정확히 뭐하는 조직입니까?”

“마녀 디아나를 사냥하려는 소규모 정예 집단이지.”

전생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답이 나왔다. 적어도 저 말은 순도 100퍼센트 팩트라는 소리.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두들겼다. 다 식어버린 닭고기 수프를 시원하게 원샷하며, 피식 웃었다.

“그건 어차피 모든 용사들의 최종목적이잖아요. 비밀조직까지 짤 필요가 있습니까?”

“무려 불사의 마왕과 깊게 관련된 자네만 해도, 디아나가 어찌되든 신경쓰지도 않지. 그런데 모든 용사들의 최종목적일 리 있겠나.”

“…….”

“다들 각자의 이유로 이 땅에 소환됐고. 각자의 이유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네. 금전이 걸려있는 마왕이면 몰라도… 마녀의 목숨에 관심 있는 용사는 극소수일세. 용사라는 명패가 무색하지.”

팩트다 보니 주둥이가 알아서 다물렸다.

하긴 그렇지. 그 모든 용사들이 최종보스를 잡고 싶어할 리 없지. 심지어는 헥터 카사스 같은 천하의 개새끼까지 있는 판국이니.

나만 해도 디아나인지 인디아나 존스인지 아무 짝에 신경도 안 쓰고.

그러니까 아신들은 마왕 토벌을 예비군 마냥 강제소집으로 뛰게 만드는 거고.

“아니. 사실상 디아나의 만수무강을 누구보다 바라는 건… 용사들일세.”

나도 모르게 납득한 나머지 고개를 끄덕이는데, 적랑의 눈빛이 유난히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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