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토끼와 사냥꾼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적랑이 앉아있다. 온화하면서도 바짝 날이 선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
참고로 설백은 지금쯤 이미 지하 던전에 가 있을 거다.
루시는 빈민가 쪽 아이들이랑 놀러 갔다. 혹시나를 대비해 세스나를 붙여놓고, 멀리 가지는 못하게 했으니까. 위험한 일은 딱히 없을 거다.
어차피 헥터 카사스를 위시한 카사스의 사도는… 철저한 계획 속에서만 움직인다. 여기서 내가 변칙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는 한. 오늘 밤의 야습 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건 반복된 회귀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자네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지.”
적랑은 생각 이상으로 소탈한 성격이었다. 좀 나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대화 시작하자마자 본론부터 훅 쑤셔버리는 모습에서 그것을 직감했다.
‘그래. 차라리 저게 편하지.’
잔뜩 머금고 있던 긴장을 오히려 좀 풀고, 나도 아예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테이블에 잔뜩 올라온 진수성찬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밀빵을 한 입 베어물고 탄성을 흘렸다. 생각보다 겁나게 맛있어서 그랬다.
“자네의 의도는 대충 파악이 되니, 재차 정식으로 인사하지.”
“예. 그러시죠.”
“4576기 용사 베르슐츠. 소환 번호로는 402만 5703번째일세. 현재 마르크트레스에서 제13위 카발리어직을 맡고 있고 적랑의 기사, 혹은 적랑으로 불린다. 자네도 편한대로 부르게.”
“아. 예에….”
나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이름 신분이야 그렇다 치고. 해병대 전우회도 아닌데 몇 기인지는 왜 밝히냐. 경례 박아야 되나?
리액션을 고민하자니. 적랑 쪽이 먼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드름 피우려는 생각은 없어. 대부분 용사들은 몇 번째 소환자인지를 가장 궁금해 했네. 습관대로 했을 뿐이다.”
“아하. 그렇군요.”
생각을 읽힌 듯해서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용사 넘버가 1억 몇 천만씩이나 앞서면 까마득한 대선배인 건 사실이다. 얻을 게 많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 실제로 도움도 많이 받았고.
나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닭고기 수프를 의미없이 휘휘 저어댔다.
“근데 4500기가 4백만 대인데… 9999기는 1억 6천만 대네요? 좀 계산이 안 맞는데.”
“소환된 용사의 수와 빈도가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네. 특히 내가 소환되던 기수쯤부터… 30년 정도 되는 그 짧은 사이. 무려 1억을 상회하는 용사가 소환됐지.”
“아하.”
용사 베이비붐 세대 시발점이셨군 그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적랑이 어느 순간 툭 내뱉었다.
“자네는 마지막 기수라지? 9999번째 기수. 1억 6341만 7413번째 용사.”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나를 쳐다보는 가느다란 눈초리에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예사롭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눈치없는 내가 느낄 정도니, 대놓고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어떻게 저리 정확한 용사 넘버를 알고 있냐.
자그마치 9자리 숫자다. 상태창 안 보면 나도 말하다가 혀가 꼬이는 마당인데.
“적랑님. 전에 제 뒷조사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의외로 적랑은 순순히 수긍했다. 나는 혀를 낮게 찼다.
‘옘병. 이러니까 날 그렇게 의심하고 있지.’
뒷조사를 마쳤다면 당연히 내 행적도 빠삭했을 거고. 내가 전생에서 죄다 실토했던… 카사스와 불사교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기회도 없었다는 걸 전부 알았을 것이다.
근데 정작 나는 줄줄 꿰고 있었다.
한 술 더 떠서, 안 그래도 의심스런 놈이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거다.
― 난 사실 불사의 마왕 계약자인데, 내가 죽으면 시간이 되돌아옴. 아무튼 헥터 카사스는 개새끼임. 걔를 죽여야 됨. 아무튼 그럼!
증오에 찌든 나머지 앞뒤맥락이 전혀 없다.
포르쉐 911급 제로백의 급발진. 그러니까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고, 의도를 의심 받은 거다.
전생의 억울한 죽음이 이해는 됐다. 납득은 여전히 안 됐지만.
“정용 군. 난 자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아.”
그리고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적랑은 한층 강력한 압박감을 전신에서 뿜기 시작했다.
“아… 그러세요?”
특급 비밀인 루시를 취급하는 입장 상 관심은 사절하고 싶은데.
이놈의 인기는 X발 필요할 땐 없다가, 필요도 없을 때 사내새끼들한테만 많아.
“그거 아나? 현재 용사 소환식은 완전히 중단되었네.”
슬쩍 혀를 차기 무섭게 말을 건네는 적랑.
뭐랄까…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얘기가 조금 다른 주제로 흘러들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거다.
“… 예?”
“자네를 마지막으로 9999번째 소환식은 끝났네. 그러니 지금은 이미 1만 번째 소환식이 시작했어야 정상인데, 용사 소환이 세상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아. 완전히 끊겼단 말일세.”
“그, 그렇군요.”
“현재 모든 용사시험장이 텅텅 비어서 공지로 놀고 있네. 내가 기억하는 한에선 유래가 없는 일이지.”
이건 아무리 세상사 흥미없는 나라도 유심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귀를 기울이는 낌새를 읽었는지, 적랑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상체를 한껏 기울였다.
“나는 줄곧 궁금했다네 정용군.”
“뭐가요?”
“마왕의 소환은 멈추지 않았네. 지금도 세상 어디에선 끊임없이 마왕이 소환되고 있지.”
“그건 그렇죠.”
바로 오늘. 여기 크로스페이드에서도 마왕이 소환될 예정이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말을 삼켰다.
“그런데 왜 잘만 이어지던 용사의 소환은 거짓말 같이 끊어졌을까.”
적랑은 입을 닫은 내 대신에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 뒤로 무수한 의문을 쏟아냈는데, 그 중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9999기의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나? 아신 측에서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떤 특정한 조건이 충족된 것인가?”
거기서 적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간에 강직하게 박힌 주름이 미소를 따라 꿈틀거렸다.
“그래. 조건이 충족된 거다. 더 이상 용사를 소환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조건이.”
그리고 적랑이 나이프를 들어 나를 겨누었다.
나를 찌를 듯이 쳐다보며 그는 말했다.
“나는 그것이 바로 자네라고 생각하네. 박정용 군.”
“… 어어….”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논리의 전개다.
뇌가 송송 썰리는 느낌이 들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손을 번쩍 들고 황급히 질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자네만이 유일하게 아신들에게 ‘특전’을 받았으니까.”
“특전…?”
가만있어 보자.
내가 그 망할 똥털한테 특전 받은 걸 이 양반이 어떻게 알지?
특전 스킬들은 죄다 패시브라 눈에 띌만한 게 없다.
이자나미의 심장이나 망자의 함 같은 경우 나한테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템이고.
‘가장 눈에 띄는 거라면… 베스타크랑 에테르 병?’
하지만 검은색 검신의 양날검 따위 이 세상에서 널리고 널렸다. 표면에 흐르는 붉은 문자열은, 수호 형님의 말처럼 나한테만 보인다.
포션은 확실히 워낙 희귀하니까 눈에 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다. 이거 하나로 의심받는 것도 미묘하다. 대체 어디서 눈치를 챈 거냐?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있자니. 적랑은 모르는 척 하지 말라는 양 손사래를 쳤다.
“불사의 마왕의 알 말일세. 설마 모를 줄 알았나?”
“… 앗. 아아.”
그래. 생각해보니 그것도 받긴 했네. 오히려 그게 메인디시였지.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적랑을 바라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니.’
내가 진짜 높으신 분들 사이에 어지간히 유명인이 된 건가. 아니면 적랑의 마녀퇴치를 향한 집념이 그만큼 강한 건가.
전생의 경험을 미루어 보면 아마 후자 쪽이지 싶다.
‘받았다고 해야 되나… 정확히는 짬 맞았지.’
망할 불사의 마왕님 때문에 사망유희하며 받은 충격과 공포를 생각하니 새삼 한숨 난다.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데, 적랑이 상체를 한껏 내쪽으로 가까이 했다. 흥미진진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박혀왔다.
“내게 좀 보여줄 수 있겠나?”
“어, 안 되는데요.”
“…….”
너무 쌈박하게 거절해서인지 적랑의 표정이 좀 굳었다.
… 고민하는 척이라도 좀 했어야 됐나?
“아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적랑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내가 뭐 당신을 못 믿어서 안 보여주려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으니까 안 되는 거다.
이미 부화해서 버젓이 세상 활보하고 있으니까.
“으힛! 용사! 여기에 있느냣!”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지.
양반은 못 되는지,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마왕의 알(이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헤벌쭉한 미소가 걸려있는 게, 마을 꼬마들이랑 벌인 비석치기에서 대승이라도 거두고 왔나 보다.
“용사 용사! 들어보거라! 오늘 내가! 로빈을 상대로 세운 혁혁한 전과를…!”
아니나 다를까. 코묻은 애들 마왕 피지컬로 때려눕힌 무용담을 지껄이려던 불사의 마왕.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녀는 적랑을 보더니 흠칫 몸을 굳혔다.
“… 엑?”
살랑살랑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경계하는 듯하다.
루시가 적랑을 퍼뜩 삿대질하며 인상을 구겼다.
“요 늙다리는 왜 여기 있냐?”
“늙다리라니. 말 조심해 인마.”
“늙다리를 늙다리라 하지. 오라버니라 그러겠냐?”
“그건 그렇다만.”
언제나처럼 한차례 실랑이를 벌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루시는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으로 적랑을 노려봤다.
“그래서. 너 여기서 뭐하냐, 늙다리.”
“여기 늙다리… 어흠험! 적랑님 집이야. 그걸 왜 집주인한테 묻냐.”
“아.”
마왕으로서 강한 용사한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끼는 건가. 생각해보면 그녀는 한사코 적랑한테 적대적이었다.
반면 적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시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전부터 묻고 싶었네만. 이 숙녀 분은 대체 정체가 뭔가?”
“그… 특전의 알맹이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긴장을 바짝 조였다. 머릿속에 전생의 적랑과 함께, 시뻘건 죽을 사(死)자가 자꾸 어른거린다.
멍하니 풀려있던 적랑의 눈은 조금 커졌다가, 이내 황당하다는 듯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라고?”
“쟤가 불사의 마왕의 알입니다. 지금은 불사의 마왕이고요.”
나와 적랑의 시선이 동시에 루시에게 향했다.
루시에게 손가락을 까딱여 이쪽으로 불러들였다. 루시는 눈을 끔벅이면서도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씌워놨던 서클릿과 어깨의 숄을 단숨에 벗겨버렸다.
“으갹.”
루시가 괴상한 탄성을 내지르며 흠칫 몸을 움츠렸다.
빳빳이 선 손바닥만한 날개와 세 개의 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저건…!”
적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릅떴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뻘쭘하게 서 있던 루시가 보란 듯이 팔짱을 끼웠다.
“루스티카… 아니. 루시다. 흐흠!”
자기 PR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곱창났군. 나는 재빨리 루시에게 다가가 “뭐 이쁜 짓이라도 해봐. 죽기 싫으면 빨랑!”이라고 속삭였다.
다급한 내 얼굴을 보고 상황을 직감했는지 루시가 허둥지둥하기 시작했고.
“어… 데, 데헷?”
이내 승리의 더블 피스를 만들며 빵긋,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