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흰 쌀밥을 줬을까
나는 시니컬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상황상 네가 나올 타이밍이다 싶어서 멍석 깔아줘 봤다. 내 예상을 못 벗어나는구만?”
“아… 저놈의 아가리만 좀 예쁘게 놀렸어도.”
미네르바가 이마를 짚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체념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솔직히… 시키지도 않았는데 불사의 마왕을 홀라당 함락시킬 줄은 몰랐네. 그건 진짜 잘하셨어요. 이런 미친놈이 취향이라니, 불사의 마왕도 제정신은 아닌가 봐요.”
“… 혹시 이것도 전부 네 계획대로냐? 그 애가 나한테 반하는 것까지?”
내가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돌아오는 미네르바의 표정엔 싸늘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제발 자기 주제 좀 파악하고 살아주세요. 설마 그걸 예상했겠어요? 상대가 당신인데?”
“X벌련아 내가 뭐 어때서.”
“아 몰라요. 어쨌든 지금은 대견한 마음이에요. 질문할 게 있다고 하셨죠? 천계의 불문율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딱 한 가지만. 성실하게 답해 드릴게요.”
그렇다는군.
어쨌든 루시가 날 좋아하게 되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긴 한 모양이다. 드물게 미네르바가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모처럼 얻어걸린 이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순 없지. 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질문했다.
“루시는… 불사의 마왕은 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했던 거냐?”
호오. 미네르바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런 탄성을 냈다.
곧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확히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인가요? 좀 애매한데요.”
“루시가 개과천선하는데 얼마 걸렸는지 아냐? 딱 사흘 걸렸다. 빈민가 애들이랑 좀 친하게 지냈더니 자수하고 광명찾더라. 그런데 30년 전에 전 대륙을 공포에 물들일 정도로 사람을 학살하고 다녔다고?”
“… 흐음.”
“나 좋아한다는 년이라 실드 치려는 게 아니고. 자기 감정도 잘 모르는 얼라 새끼가 그렇게 인간과 철천지원수를 질만한 일도 상상이 안 돼. 뭔가 좀 이상하다고.”
“어머나. 마냥 병신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예리하시네?”
미네르바가 대견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X발. 지금 아쉬운 게 나니까 일단 참자. 나는 계속 말했다.
“루시는 마녀가 자기한테 넣어 놓은 본능이 그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내 매력이 치명적이라도 그렇지. 용사인 나를 좋아해버리는 것도 말이 안 되지. 뭔가 얘기가 아다리가 안 맞고 있다고 지금.”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또 뭐라고. 그 대답은 이거예요. 처음부터 불사의 마왕한테는 ‘세계를 지배해라’ 같은 명령 따윈 삽입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
… 뭐라고?
나는 숨을 삼켰다. 머리가 잠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길 거부했다.
내가 가까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미네르바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계속 내게 주입했다.
“타의에 의해서 왜곡된 겁니다. 원래 마녀 디아나가 불사의 마왕에게 삽입했던 명령은 완전히 반대였어요. ‘이 세상을 네가 가져라’가 아니고. ‘이 세상을 네가 지켜라’였죠.”
“세상을… 지켜라?”
“네. 그걸 술식으로 교묘하게 뒤틀어 버린 거죠. ‘지켜라’만 ‘가져라’로 바꿔도 완전히 의미가 달라지죠? 말장난 같은 그 작업 때문에 30년 전까지 그녀의 손에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났으니. 웃긴 일이에요 정말로.”
거기서 미네르바는 잠깐 내 주변을 슬며시 거닐었다.
발에 대못이라도 박힌 듯 딱딱하게 굳었던 나는, 그녀가 다가오자 슬쩍 발을 물렸다.
“하지만 불사의 마왕에게 장난을 쳐놨던 그 사람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죠. 어떤 총명하고 유능하고 아름다운 아신 하나가, 사망 후 행적이 묘연했던 불사의 마왕의 알을 발견했어요.”
“총명 유능 이지랄. 주제 파악 안 되는 게 누군데.”
미네르바가 말을 멈추고 나를 팍 째려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모르쇠를 시전했다.
그녀는 ‘한 번만 참는다’라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아신은 불사의 마왕에게 걸렸던 조악한 장난질을 간단히 풀어버렸습니다. 뭐… 그 부작용으로. 불사의 마왕은 평범한 방법으론 마력이 모이지 않는 몸이 되어버렸지만요.”
나는 다시 시선을 미네르바에게 맞췄다.
이 새끼는 지금. 불사의 마왕… 루시를 약체화시킨 것도. 과거의 매운맛 루시의 인격을 지금처럼 개조시킨 것도. 모두 자기 작품이라고 실토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갑자기 개과천선한 게 아니에요. 타의로 조작당했던 정신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 거죠.”
“…….”
머릿속에서 지금껏 삐걱대던 것들이 아귀를 착착 맞춰가는 한 편.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핵심을 찔러 들어갔다.
“… 야 똥털. 마왕이 왜 세상을 지켜. 마녀는… 디아나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루시한테 그런 걸 시킨 거지?”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없네요. 직접 알아내 보시는 게?”
… 오냐. 그 천계의 불문율이 어쩌구? 접수했다.
나는 단호한 미네르바의 표정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그래서 질문을 좀 바꿨다.
“… 야. 그러면 대체 누가. 누가 뭐 때문에 루시한테 장난질을 친 건데?”
“힌트만 드릴 게요. 마녀 디아나가 토벌되길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디아나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변하길 바라지도 않는 사람. 본인 말로는 ‘세계의 균형’을 맞춘다고 떠벌대던데.”
“…….”
“이름까진 못 말해요. 그러면 천계 규율 위반이라서요.”
의미심장하게 방글거리는 미네르바. 나는 콰아앙! 지면을 냅다 후려쳤다.
헥터 카사스. 그 빌어 처먹을 이름이 뇌리에 쑤셔 박혔기 때문이다.
* * *
루시와의 대화를 마치고. 내내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미네르바를 통해 확실히 하고 나니, 머리가 한 결 맑아졌다.
그러자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일단. 적랑과의 관계부터다.’
나는 지금 적랑의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완전히 아군으로 만들던지. 그게 안 되면 완전히 적군으로 알고 있는 게 낫다.
차라리 그래야… 다음부턴 그 양반 힘을 빌리겠다고 개지랄 안 할 테니까.
‘… 부딪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를 악물고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저택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나는 곧 적랑의 방문 앞에 섰다. 똑똑. 가벼운 노크 후에 기다렸다. 적랑은 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어줬다.
“…….”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적랑을 쳐다봤다. 한동안 눈싸움 하는 양 대치가 지속됐다.
호오, 하고 적랑이 흥미 어린 탄성을 흘렸다.
“자네. 방금 전과 같은 사람이 맞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분위기와 눈빛이 전혀 달라. 마치 정용 군의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무언가 같군.”
“… 그렇습니까.”
역시 촉 하나는 귀신같구나 적랑.
내가 아까 전과 같은 사람이 맞냐고? 글쎄. 사실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네 번이나 뒤져버리고. 그 기억을 다시 수복한 나는… 그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150번 가까이 뒤진 나는, 지구에서의 박정용과 같은 사람인가?
“카르할라스가 말입니다.”
의미없는 선문답은 질색이다.
그래서 나는 적랑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내 용건을 불쑥 들이밀었다.
“마녀사냥꾼에 대한 건 적랑님한테 직접 물어보라 그러데요.”
전생은 독불장군처럼 내 요구만 앞세웠다면. 이번엔 거래를 신청한다.
레이라 때와 맥락은 같다. 내가 먼저 민감한 화제를 던져서 변수를 없앤다. 다만 접근하는 방향성이 전생과 다를 뿐이다.
“마녀사냥. 제가 요즘 좀 관심이 생겼습니다.”
“… 호오.”
“적랑님은 어떠십니까. 저한테 관심 좀 있으십니까?”
네가 의심하는 내가 가진 정보를 모두 불어주겠다. 그러니 너도 내게 정보를 토해내라.
내가 건넨 말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적랑은 잠시 반응하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내 얼굴을 눈에 담는다.
그의 눈부처에 비친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무표정이었다. 내가 눈에 담고 있는 적랑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다.
적랑도 뜬금없다 싶은 타이밍에 히죽 웃었다.
“내일 아침이나 한 끼 하지.”
뒤따르는 행동도 말만큼이나 저돌적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을 돌리더니. 내게 눈짓 한 번 하고 쿨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즐거운 대화가 되겠군.”
콰당. 적랑은 닫히는 문틈 사이로 그런 한 마디만을 남겼다.
내 대답은 필요도 없나 보다. 나는 문 앞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힘차게 들었다.
“즐거운 대화 좋죠. X발.”
나는 슬쩍 혀를 찼다.
내 직전 생의 사망 이유가 다름 아닌 적랑이다. 내가 먼저 권한 대화의 장이긴 하지만… 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이번엔 좀 서로에게 민감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꺼낼 예정인지라.
“아니. 됐어.”
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번 대화로 적랑의 진의. 마녀사냥꾼이 정확히 뭘 하는 놈들인지… 그 외에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최대한 알아낼 생각이다.
당연히 내 쪽에서도 그에 맞는 정보를 제공할 거다. 애초에 내가 케른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던 것도 있으니까.
‘이젠 모 아니면 도다.’
이 X발. 불사교나 카사스의 사도를 어떻게 그리 빠삭한지가 의심스러웠냐?
오냐. 다 말해줄게. 그 사생팬 새끼들이 나랑 루시를 왜 그렇게 좋아하고. 얼마나 좋아하는지까지.
대신에 당신도 받은 만큼은 불어줘야 할 거야. 각오하라고.
“후우.”
복잡한 각오를 담은 한숨과 함께, 나는 천천히 수마에 몸을 맡겼다.
무신제 나부랭이보다도 훨씬 긴장돼서,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 * *
…….
….
나는 그날도 꿈을 꾸었다.
관짝을 들쳐멘 여섯 명의 흑인 형아들. 관짝소년단이 EDM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건 현시점에서 내 주변인들이었다. 설백과 세스나. 적랑과 카르할라스. 회의에서 봤던 크라네이드와, 마지막으로 루시까지.
“와하하!”
“하하하하!”
내 일행들이 즐겁게 웃으며 하나씩 관짝 속으로 점프해 들어간다.
나도 거기에 편승해 달려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적어도 꿈속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
그런데 이번에도 루시가 내 소매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또 지랄이네. 나는 절박한 루시의 얼굴을 보고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냅다 관짝으로 달려들었다.
“…! …!!”
뒤에서 루시가 연신 뭐라고 외친다. 아아, 안 들려 안 들려.
관짝 안으로 들어왔다. 어둡고 축축한 느낌이 나를 반겼다.
그 안에서 내가 본 것은….
“스으… 스으으….”
복면과 로브를 뒤집어쓰고, 쇳소리를 내뱉으며. 한 손에는 붉은 곡도를 들고 있는 괴한.
내 일행들의 시체를 쌓아 그 위에 걸터앉은 괴한의 모습이다.
나는 놈을 눈에 담자마자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 뒤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