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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45화 (121/280)

145화 마왕님은 왜 머슴에게

대나무숲 한 가운데 넋놓고 앉아있길 한참. 다리 아래 지나가는 개미 행렬을 얼마나 쳐다봤을까.

문득 대나무숲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거 멀리도 왔구나. 용사.”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루시가 멀찍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내 앞까지 도달해서는 번쩍,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빨랑.”

“…….”

“설명을 해줘야겠다. 네놈이 내 앞에서 걸레짝이 되고 나서, 그 짧은 새에 한 번 더 회귀가 일어났잖느냐.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 게냐!”

나는 루시가 내민 손을 붙잡고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루시의 뚱한 얼굴을 흘깃 봤다가, 이내 외면했다. 더러워진 매무새를 정돈하고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덥석, 루시가 뒤에서 내 손을 붙잡고 늘어졌다.

“말하란 말이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게야!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느냐?!”

루시는 빽빽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나는 순간 열이 뻗친 나머지 손을 확 잡아당겼고. 그녀는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맥아리없이 쓰러졌다.

“아욱!”

이런. 쓰러뜨릴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뒷머리를 박박 긁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힘으로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너한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 뭣이?”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무능 마왕이잖아. 너.”

“윽…!”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지금까지도 그랬잖아. 내가 어떻게든… 끝장을 볼 거니까.”

왜 말 안 하긴.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까 그렇지.

어차피 말해봐야 뭐 달라질 것도 없는데 입 아프게 뭐하러 말하냐.

“이, 이몸을 짐짝 취급하지 마라!”

정곡을 찔린 루시가 몸을 움츠렸다.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게 좀 웃겨서 실실 웃었다.

그런 내가 짜증이 난 건지, 그녀는 오히려 더 목청을 높였다.

“네, 네가 케른에서 엄청 죽어서 꽤 많은 흉마가 쌓였느니라! 나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너를 지켜줄 정도는 된다!”

“흐하하.”

나는 결국 육성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루시는 즉각 쌍심지를 올렸다.

“뭐가 웃겨! 용사 놈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냐?”

“뭐, 뭐가. 뭐가 이상하냐!”

“너를 지키라고 나한테 불사의 계약이 걸려있는 거잖냐. 그런데 네가 오히려 나를 지켜주겠다고? 여기서 울어야 되냐?”

개X같은 마음 같아서는 울고 싶었다.

물론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지는 않고. 기분이 그렇다는 거다. 기억을 수복한 뒤로, 시종일관 공허하고 답답하고 이유없는 분노로 속이 끓는다.

나는 루시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냐.”

나는 꿈속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현실에서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는 꿈속에서 보여줬던 표정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답답함과 분노와 슬픔, 그 외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얼굴로 그녀가 말한다.

“그렇게 괜찮은 척 얼버무려도 소용없다! 나는 느껴진다고 했잖느냐! 이 멍청한 용사!”

“뭐가.”

“직전 두 번의 죽음 이후로 흉마가 갑자기 폭증했다! 네놈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앞으로 잘해야 한 번. 어쩌면… 이번 생이 마지막이다!”

“… 그래?”

“그렇다!”

하긴. 슬슬 머릿속에 ‘죽인다, 죽인다’ 하는 말 밖에 안 떠오르고 있긴 하다. 눈치 빠른 꼬맹이는 이래서 싫어한다니까.

그러면 이번에 죽으면… 그게 진짜 나의 마지막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러니까 말해다오. 제발! 대체 뭐가 네놈을 그렇게 만들었냔 말이다!”

루시가 절박한 얼굴로 소리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베스타크로 가져갔다. 검을 쥔 손은 미친 듯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아.’

그런데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질긴 악몽에서 허우적대다가, 깨기 직전에 ‘악몽이었구나’라고 깨달았을 때처럼. 그런 진심 어린 안도의 한숨이었다.

한 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지금 루시의 반응이 지금까지와는 뭔가 좀 다르다.

전에는 내가 아무리 죽어도 오히려 재밌다고 좋아하던 년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냐?

“넌 왜 내 걱정을 해주고 그러냐. 적응 안 되게. 미치든 말든 내 알아 할게요. 예?”

“누, 누가 걱정을 했다는…!”

철지난 츤데레 캐릭터 마냥 당황하는 루시.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낮은 신음을 흘리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빽 소리지른다.

“아 그래! 걱정돼서 미칠 것 같다! 다 너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용사!”

솔직하게 인정해서 일단 놀랐고. 그녀가 곧장 나를 삿대질 하길래 두 번 놀랐다.

“… 왜 갑자기 내 탓하고 지랄이야.”

“네가 그 날! 나를 껴안았을 때부터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쓰다 버려질 일개 수호자한테 이렇게 신경쓰다니… 이런 건 내가 아니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루시가 덥석, 내 멱살을 쥐고 마구 뒤흔들었다.

본인 말마따나 상당히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자존심 굽히고 그 파란 머리 계집이랑 얘기도 해봤는데… 그년도 실실 웃기만 하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뭔 라이벌이 늘어서 곤란해졌다는 둥…!”

“… 어….”

요즘 들어 뇌정지 올 일이 많은 것 같다.

얼빠진 탄성을 흘리는 내 앞에서 루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무슨 표정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했지. 빈민가의 아이들이 죽으면 나는 분명 슬퍼할 거다.”

“… 어. 그랬지.”

“하지만 용사. 네가 흉마에 잠식돼서 나를 못 알아보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떤 기분일지 도저히 상상도 안 된단 말이다!”

“그, 그러냐.”

“그래! 그래서 싫다! 무섭단 말이다! 네가 죽는 게 너무 싫어졌다고! 됐느냐!!”

아니 잠깐. 이런 전개가 이 타이밍에?

내 인생 밑바닥을 친 최악의 순간이 내 인생 최초의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순간이라고?

나는 얼떨떨한 나머지 잠깐 말문이 막혀 있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난 돌려 말하는 거 못한다. 거두절미, 전후생략, 단도직입이다.

루시는 화들짝 놀라며 불에 덴 듯이 손을 놨다. 한참을 어버버거리다가, 이내 몸을 움츠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느냐.”

“그런 말을 하니까 묻지 인마.”

“그… 기, 기뻐하거라! 싫어하냐 좋아하냐를 따지면… 시, 싫어하진 않는 것 같다!”

“… 말을 말자.”

얼굴을 빨갛게 붉힌 루시의 대답을 듣고, 나는 쓰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얘는 지금 소위 말하는 like와 love의 차이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애한테 이런 걸 물어봤자 의미가 없지.

‘얘는 대체 150년 가까이 살면서… 지금까지 뭘 했던 거냐.’

루시의 행동과 정신연령이 유아스럽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다루기 쉬우니까 아무렴 어때’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때묻지 않은 호의를 내가 직접 받고 있으려니. 처음으로 의문이 강렬하게 들었다.

‘대체 얘는… 정체가 뭐야?’

아무리 죽음과 부활을 반복했다지만. 나이 150가까이 처먹고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이것도 그녀가 마녀에게 만들어진 인공적인 생명체라 그런 걸까?

“있잖아. 용사.”

혼자 고민에 빠져 있으려니. 루시가 얼굴을 바짝 굳히며 나를 퍼뜩 올려다봤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루시는 내쪽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도망치자. 어디든 좋다. 네가 죽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게야.”

“… 도망가자고?”

“그래. 네가 죽는 게 싫어졌다. 흉마에 먹혀서 날뛰는 꼴도 절대 보기 싫다. 이제 이 세상도 다 필요 없다. 지금 나한테는 세상보다 네가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응?”

설마 그 루시가 저런 말을 꺼낼 줄이야.

원래부터 나처럼 직선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난 너만 있으면 돼’ 같은 말을 빠꾸 없이 들으니 내가 다 당황스럽군.

‘진심이냐.’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보니 그것은 확실했다.

그 마음은 고맙다. 아무리 평소에 자주 티격태격한다 해도, 저렇게까지 순수하게 걱정해주면 당연히 고맙지.

하지만 루시의 말에 동의해줄 수는 없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거의 조건반사 마냥 그 말을 되뇌었다.

나와 루시의 동선은 사실상 헥터 카사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 그놈은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다. 어디로 도망가든, 그놈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다.

모 만화에서 그랬지. 도망쳐서 도달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싸울 수밖에 없어. 내가 살거나. 나를 죽이려는 새끼들이 살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주워섬겼다.

듣던 루시가 눈썹을 팍 찡그렸고. 이내 양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럼 약속해라. 무조건 네가 살아남아라. 흉마에 먹히지도 말아라! 나랑 약속해!”

저 진지한 얼굴을 보니 괜히 나까지 낯이 간지러워진다.

나는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응수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잇, 빨리 약속해라!”

그러자 루시는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며 내밀었던 양손을 한층 밀어붙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손은 왜 내미냐. 뭐, 상담비 달라고?”

“어? 아, 아아!”

그러자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물렸다. 그녀도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 듯했다.

루시는 뒷짐을 진 채 횡설수설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 어. 그, 그게. 그 때도 나를 껴안고서 제정신이 됐다고 했잖느냐. 그, 그래서… 나는 잘 모르지만. 도, 도움이 좀 될까 싶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시, 싫으면 관둬라!”

내가 황당하게 쳐다보자 루시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루시의 하얀 얼굴이 어느 때보다 빨갛게 물들었다. 저러다 터지겠다.

‘…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오네.’

솔직히 저건 좀 귀엽군.

그래. 나도 슬슬 뒤질 때가 되긴 했나 보다.

“약속한다. 절대 죽지 않을게.”

나는 실실 웃었고. 루시가 반응도 못할 속도로 다가가 껴안아 버렸다.

엑, 하는 루시의 탄성을 마지막으로 대나무숲은 침묵에 잠겼다.

“그러니까 너도 전에 했던 약속 잊지 마라. 내가 흉마에 먹혀서 미친놈이 되면… 어떻게든 날 정신 차리게 만들어. 알겠냐?”

“… 으아, 아아알겠다. 알겠으니까 놔라! 내가 먼저 미쳐버리겠다 이러다!!”

전이랑 차원이 다른 발광을 해대길래 이번엔 금방 놔줬다.

그녀는 파바박 떨어져 새빨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나조차 한 수 접어줄 쑥맥 같은 반응이었다.

나는 낄낄거리며 그녀에게 손사래를 쳤다.

“먼저 가 있어라. 난 생각을 좀 정리하고 갈 테니까.”

“… 으으. 건방져… 한낱 수호자 주제에… 건방지다고….”

루시는 나를 노려보며 볼멘소리를 꿍얼거렸지만. 이내 달아오른 볼을 싸매며 적랑의 저택 쪽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후우.”

루시의 신형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야 똥털. 네가 대답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

내가 괜히 루시를 먼저 보낸 게 아니다. 아까부터 뒤통수가 어지간히 따끔거려야 말이지.

“… 어머나. 제가 직관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대요?”

내 말에 대꾸하는 목소리가 즉각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봤다.

어두운 금발을 찰랑거리는 미네르바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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