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나는 한참을 대꾸조차 못하고 일그러진 제나의 얼굴을 멍하게 주시했다. 상대… 카사스의 수장놈 역시 느긋하게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자니, 나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허리춤의 수호 형님이었다.
―야. 너 혹시 헥터냐?
그러자 침묵의 성질이 조금 변했다. 일그러진 제나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이어지는 놈의 목소리는 동요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 검 안의 목소리…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이야. 너 진짜 헥터 카사스구나? 나야 나! 나 누군지 알지?
갑자기 아는 척을 시전하는 수호 형님. ‘나야나 사기’ 치는 줄 알았다.
일단 수호 형님의 목소리를 저놈이 들을 수 있다는 점부터가 놀라웠지만. 이어지는 상대의 반응은 더 놀라웠다.
―… 설마 마녀의 기사? 한수호 네놈이냐?
상대도 수호 형님을 알아본다. 무려 그의 풀네임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부릅떴다.
그러든 말든. 수호 형님은 여전히 평탄한 어조로 목청을 높였다.
―이 징그러운 새끼. 너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냐? 거진 500살쯤 처먹었겠네?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이내 디룩, 죽은 시선이 내쪽으로 돌아온다.
시체가 된 제나의 무기질적인 눈동자와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가 서늘해졌다.
―불쾌하기 짝이없군. 박정용 군. 나와 얘기를 계속하고 싶다면 상업지구의 ‘비틀대는 거인’이라는 술집을 찾아오게. 물론 그 기분 나쁜 검은 놔두고 오게나.
“… 뭐라고?”
―이 방의 전말을 알고 싶다면. 오는 게 좋을 걸세.
“…!!”
그 말을 끝으로 제나의 눈이 다시 감겼다. 주변을 감돌던 시커먼 기운도 사라졌다.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제나의 머리를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꿈을 꾼 건가 싶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가도 테이블에 새겨진 새빨간 글자를 보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제나의 머리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빨간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
우지직. 대못 같은 것으로 단단히 박힌 제나의 유해를 하나씩 뽑아내 수습했다.
토할 것 같았다. 무수한 시체를 봐왔고, 직접 만들어 봤지만. 지금만큼 시체가 역하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이다.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역해서 참을 수가 없다.
―… 정용아. 너도 당해봤으니 알겠지만. 그 새끼 존나 위험한 새끼다. 진짜 나 버려두고 거기 갈 생각은 아니지?
제나의 유해를 모두 수습해 침대 이불로 슬며시 덮어주는 순간. 수호 형님이 불쑥 말했다.
분노와 슬픔. 혼란과 공허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나는… 망설임 없이 베스타크를 빼들었다. 그것을 침대 옆에 가만히 기대놨다.
“… 제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좀 지켜주십쇼. 부탁드리겠습니다.”
―야. 갑자기 X발 뭔 궁상이야! 지키긴 개뿔 시체를 뭘 지켜! 갈 거면 최소한 나는 두고 가지 마!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새꺄!
우웅, 우웅. 베스타크가 연신 진동하며 바닥을 울린다. 검신을 기어다니는 붉은 문자열이 연신 새빨간 빛을 토해낸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것을 외면했다.
“군대 썰이라도 풀어주세요. 제나가 좋아합니다.”
―박정용. 지금 슬픈 건 나도 이해하는데… 얘는 이미 죽었어! 이럴 때야말로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돌아와 정용아! 안 된다니까! 야!!
나는 박살난 문짝을 훌쩍 넘어 여관을 나왔다. 그 뒤로도 수호 형님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저벅저벅. 분노로 점철된 걸음걸이가 상업지구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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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대는 거인’이라는 술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업지구에서 가장 큰 술집 중 하나였으니까.
스윙도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묘하게 동양냄새가 나는 서양식 술집 풍경이 나를 반겼고. 안에서는 테이블마다 빽빽하게 사람들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저게 적랑이 말했던 그거군.’
가장 이목을 끄는 건 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수정거울이었다.
아래 대문짝만하게 써있는 멘트가 눈에 띈다.
[운터란트 공식 무신제 중계점 - 가장 선명한 경기 진행을 시원한 맥주와 함께!]
레비아탄에서 내려왔던 대형 수정거울의 축소판이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무신제의 영상이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랑한테 듣기로는 무신제가 운터란트에서도 상당한 인기인지라, 수정거울에 관한 기술 제휴를 해주는 대신. 이런 식으로 중계권을 팔아서 상업적 이득을 챙기는 거라고 들었다.
“오, 이게 누구야. 바크!”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반쯤 벗겨진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배불뚝이 중년. 무신제 첫째 날에 만나서, 개회식 때까지 잡담을 나눴던 아저씨. 프레들이었다.
“하핫,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구먼! 여길세 여기!”
그가 후미진 테이블에 앉아 내게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나는 프레들의 밝은 얼굴을 보며 기운 빠진 웃음을 흘렸다.
“… 오랜만에 보네요. 아저씨.”
“허헛. 뭐 그리 오랜만이라고. 바로 어제 봤잖나!”
“…… 아. 그러네요. 그랬죠… 어제였죠.”
“이 친구 정신이 단단히 빠졌구먼!”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완전히 무시하면 더 집요하게 들러붙을 성격의 아저씨인지라 대충 대답해줬다.
그 순간에도 연신 주변을 살피며 수상한 인물을 수색했다. 하지만 어느새 바짝 다가온 프레들이 불쑥, 구운 소시지를 내밀었다.
“자네 활약은 내 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었네. 오늘은 갑자기 항복을 하던데! 왜 그랬나?”
“… 그냥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하핫. 그렇구만. 나는 첫날 1차전에서 광탈을 해버려서 말이야! 마누라 몰래 여기서 이렇게 하루종일 죽치고 있다네.”
“아 예….”
오지게 끈질기네 이 아저씨. 마음이 복잡하다 보니 울컥 짜증이 일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겠다 싶어, 아저씨가 준 소시지를 한 입에 씹어 삼켰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 아저씨.”
“음? 왜 그러나 바크.”
“내가 피에 젖은 달그림자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무신제 참가했을 때처럼 복면을 쓰지도 않았고. 수저를 휘두르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 프레들이 어떻게 나를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을 깨닫자 온몸에 전율이 치달렸다. 그리고.
“… 이런. 실언을 해버렸구만 그래. 좀 더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는지 프레들은 히죽,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인다.
익숙한 비웃음. 그리고 익숙한 변조된 목소리였다. 나는 바닥이 아득하게 꺼지는 느낌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그 사이에 프레들까지 놈들에게 살해당하고 조종당하는 건가?
나와 잠깐 접촉했다는 이유로? 이 상황도 설마 나 때문인 건가?
나는 이를 악물고 미미르의 눈을 곧장 발동시켰다.
[명칭: 헥터 카사스]
[별칭: 두 번째 용사. 프레들 머시. 마#&@의 *&$%자. 카사스의 *%^장]
[LV. %^$#^]
[알림: 정보 누락]
[상세: 해당 개체의 정보가 인위적으로 말소되었다. 데이터를 불러올 수 없다.]
‘뭐야 이건 또.’
정보 누락?
표기불가도 아니고 물음표도 아니고. 이번엔 또 뭐가 문제라 표기가 안 되냐. 씨팔 버그존망겜 같으니. 수호 형님, 이게 게임입니까?
사태가 종식되면 컴플레인을 존나게 넣어주겠다. 속으로 벼르고 별렀다.
‘일단 확실한 건….’
프레들의 본명이 헥터 카사스라는 것.
헥터 카사스. 수호 형님이 아까도 넌지시 언급했던 그 이름. 카사스의 사도 수장.
내 지레짐작이 틀렸다. 프레들이 조종당하는 게 아니었다. 직면한 현실은 내 상상 이상으로 개족같았다.
‘처음부터… 이 새끼가 바로…!’
‘카사스의 사도’라는 게 자기 성을 따서 만든 조직이었구나. 좋은 거 알아간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상태창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래. 사람 갖고 노니까 재밌었냐? 이 X발련아.”
상태창을 물린 내 얼굴은 시시각각 굳어갔고. 프레들은 분위기가 점점 변하는 걸 느꼈는지, 테이블로 돌아가 여유롭게 손짓했다.
“일단 앉게. 자네도 듣고 싶은 게 많을 게 아닌가.”
“X까 X발련아. 이 X발 예미럴 개같은 새끼. 배때지나 딱 대라 X발아. 곱창 뽑아다 줄넘기를 폴짝폴짝 뛰어버릴라니까…!”
“듣고 싶지 않나? 왜 제나 양이 그 꼴이 됐는지.”
“…!!”
서슬퍼렇게 욕을 하며 에스파다를 움켜쥐었던 나는, 그 말에 합죽이가 되었다.
드르륵. 나는 의자를 빼고 테이블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웅성이는 술집의 소음이 조금씩 멀게 느껴진다.
곧 프레들… 아니, 헥터 카사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못 본 사이 탐스러운 눈빛이 됐구먼.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죽일 수 있는 눈빛이야.”
“잠깐이라도 개소리 왈왈대면 널 찢어 죽일 거니까.”
“허헛. 여간 무서운 게 아니군 그래.”
여유롭게 맥주를 홀짝이던 헥터 카사스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수염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아내더니, 천천히 말한다.
“애초에 내가 개소리를 할 여지가 있겠나. 모두 자네의 안일함이 불러온 참사에 불과하네.”
“… 그게 무슨 소리냐.”
“자네는 이미 불사교가 카사스 산하에 놓인 걸 알고 있었잖나. 그 불사교와 협력했던 제논 군일세. 내가 여동생을 이용한 협박만으로 제논 군의 배신을 대비했을 것 같나?”
“……!”
“글쎄. 나는 자네처럼 허술하게 살지 않네. 박정용 군.”
안일. 허술. 멍했던 머릿속이 그가 내뱉는 단어들로 점철되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처음부터 그런 저주를 걸어놨네. 내가 저주를 발동시키면 제논 군은 곧바로 의식을 잃어버리지. 불사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
“평범한 불사교도보다 약간의 자유를 부여했을 뿐일세. 공간 제어 마법 사용자는 매우 귀하거든. 의식이 없으면 공간이동 마법도 시전할 수 없다 보니, 불가피하게 좀 풀어줬다네.”
그리고 히죽. 헥터 카사스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배신을 획책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아무리 귀한 인재라도 쳐내는 게 맞다. 그래서 제논 군의 사용법을 좀 바꿔봤네. 그에겐 내 특별한 선물과 함께, 무신제에 참여하는 특별한 임무를 주기로 했지.”
“…….”
“그리고 우유부단한 제논 군을 대신해서, 그의 손으로 직접 모든 미련을 끊게 해줬다네. 흐흐흐.”
발끝부터 천천히 늪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감각 속에서. 문득 헥터의 마지막 말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는 그 의미를 한참 동안 반추해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헥터를 쳐다보는 내 눈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설마. 제나를 그렇게 만든 게….”
“제논 군 본인일세. 방의 장식은 마음에 들었나 모르겠군. 자네가 기뻐하도록 꾸며봤네.”
“…….”
“생각보다 제논 군의 저항이 세서 잠깐씩 의식을 되찾곤 했지만… 역시 오래는 버티지 못하더군. 아아. 그 가련한 모습을 무신제 무대에서 꼭 보여주고 싶었네만. 자네가 예상치 못하게 기권을 해버리는 바람에 말이야. 실망스럽기 그지없네.”
걱정하지 마라 이 새끼야.
흑화한 제논은 이미 두 번 봤다. 네 그 X같은 선물에 두 번이나 썰리고 오는 길이라고.
“너어는… 진짜… 개새끼다….”
머리에 피가 몰리다 못해, 신체말단으로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새빨갛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댄다. 이빨이 덜덜 떨려온다. 분노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모르겠다.
핏발이 잔뜩 선 내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보던 헥터가, 목청을 조금 높인다.
“내 원래 이리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네만,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자네를 대화에 초대한 걸세. 용사 박정용 군. 대체 왜 오늘 제논 군을 찾으러 다녔나?”
헥터가 능글맞게 물어왔지만. 진이 빠진 나머지 사지가 꼼짝을 않는다.
나는 가까스로 시선을 들어 헥터를 마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상하지 않나? 서로 용건 마치고 헤어진 제논 군을 굳이 지금 찾을 이유도 없는데. 마치 그의 변고를 사전에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양, 자네는 갑자기 제논 군의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가 준비한 깜짝선물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발견됐지.”
이제 보니 헥터의 얼굴에서도 여유는 사라져 있었다.
침중하게 잠긴 얼굴로, 약간의 공포와 경외를 눈동자에 담고. 그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자네. 정말로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하는 겐가? 과거 슈엘츠의 무녀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