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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40화 (116/280)

140화 There Is No Escape

크라네이드와 대화를 시작한지 약 30분 경과했다.

“1월이라 그런가 춥구만요.”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근황 몇 마디 나누고 나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사내새끼들 대화가 다 이렇지. 피식 웃어넘겼다.

근황은 됐으니 이제 현황에 대해서나 좀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다 용제국 사절까지 됐습니까? 출세하셨네.”

나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네이드는 그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길쭉한 턱 주변을 긁적였다. 멋쩍어하는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냥 돈 벌려고 용병부대를 전전했는데. 불사교라는 놈들이랑 엮여서 다 죽여버렸다. 용제가 벼슬 얹어주더니, 회의 갔다 오라더라.”

“워우.”

“용제국 놈들, 국빈회의를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룡대를 엄청 믿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만. 뭔가 내부적으로 좀 다른 일 때문에 어수선해 보였다.”

“… 기룡대라.”

나는 침음을 흘렸고. 크라네이드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우리를 감시하는 두 여자가 보였다.

“…….”

관자놀이에 굵직한 뿔이 한 쌍 달렸고, 엉덩이 위에는 파충류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여자들. 크라네이드와 함께 국빈회의에 참여했던 용제국의 반룡인. 코스크 기룡대의 용기사들이었다.

나는 적랑이 들려줬던 용제국의 정보를 상기시켰다.

―마녀를 배신하고 아신들 편에 선 마족, 반룡인들의 나라.

―불가침동맹을 맺은지 100년 넘었지만, 반룡인의 나라라는 이유로 꺼리는 이가 많다.

태고룡 이스그라드의 후예라는 용제(龍帝)를 주축으로 하는, 대륙 동쪽의 작은 나라.

미텔란트의 칠마존. 마르크트레스의 카발리어. 그리고 운터란트는 레비아탄이 있듯이. ‘코스크 기룡대’라는 반룡인으로 구성된 용기병 부대를 주전력으로 보유했다.

‘그 외 병력은 전부 용병부대랬고….’

기룡대는 타국의 비대칭전력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하긴 하지만. 워낙 개체수가 적어서 실질적인 마왕토벌은 용사들로 이루어진 용병부대가 한다고 들었다.

용제국 용병부대에 전입한 용사들은, 용제국의 녹봉을 받는 직업군인이 되어 마왕을 토벌하는 거다. 대신 행동의 제약도 꽤 빡세지지만.

‘무일푼 용사들에겐 기회의 땅으로 불린다지.’

전생에서 적랑과 함께 회의를 준비하면서 이쪽 세계의 세계사 공부를 좀 했다.

아마 크라네이드도 그렇게 대책없이 용병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불사교와 엮여서 상층부와 연이 닿은 거겠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크라네이드에게 툭 물었다.

“크라네이드. 불사교가 뭐하는 놈들인지는 알아요?”

“모른다. 내 사냥감을 가로채길래 그냥 다 죽여 버렸을 뿐이다.”

“…….”

“그래서 어제부터 회의는 참가하는데… 당최 뭔 개소리 씨불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졸려서 뒤질 것 같다.”

옘병. 전생의 회의에서 용제국이 닥치고 있던 이유는 그냥 아무것도 몰라서였군.

이건 용제국이 ‘회의는 관심 없는데, 형식상 사람은 보낸다’라고 시위하는 꼴이다. 크라네이드는 그 정치 퍼포먼스에 희생된 거고.

운터란트 쪽도 이런 상황인가? 잘들 돌아간다. 나는 반사적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근데 아무리 불사교를 토벌했다지만, 용케 상층부 눈에 들었네요. 비결이 뭡니까?”

“그것도 모른다. 용제가 내 면상 보고 태고룡의 사도라면서, 엄청 좋아하더라.”

“…….”

“태고룡 이스그라드? 그놈이랑 닮았다는데. 나 그 양반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용 대가리라 용제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좀 황당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크라네이드가 면상 하나는 진짜 드래곤처럼 생겼으니까.

“어쨌든 회의하는 동안엔 계속 여기 있죠?”

“그렇지.”

“어디에 묵는데요?”

“무신의 성전에 비는 저택을 주더구만.”

비는 저택이라면 나도 본 적이 있다. 거기를 귀빈용 숙소로 사용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물었다.

“회의 끝나면 용제국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되겠군. 사내새끼는 짊어진 게 있으면 밥값을 해야 하는 법이야 비실이.”

“그야 그렇죠.”

질문과 단답의 연속. 그리고 끝.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진짜 생각보다 물어볼 게 없다. 근황 들었고, 현황 들었는데 더 이상 뭘 물어.

더 대화할만한 일이래 봐야 ‘너 내 동료가 돼라!’ 정도인데.

“…….”

그 얘기를 꺼내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휘몰아치는 불꽃 속에서 널브러진 수많은 시신들이 떠오른다.

의미불명의 꿈도 떠올랐다. 관 속으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던 크라네이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연신 뇌리를 아른거렸다.

‘… 망할….’

왜일까. 정작 그 꿈을 꿀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반추해보니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노도처럼 휘몰아쳤다.

끈적끈적하고, 등줄기를 핥는 듯한 거대한 불쾌감이.

‘아니야. 안 돼.’

나는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미 살아갈 터전이 잡힌 사람을 같이 똥고생 하자고 끌어들일 수는 없다.

‘솔직히… 그러기도 싫고.’

오히려 축하해주고 싶다.

나도 카사스니 불사교니 하는 개놈 새끼들과 엮이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한적한 동네에 알 박고 유유자적 이세계 라이프를 만끽했을 거다.

군대 전역한 이래 숙식제공 막노동판 전전하며 떠돌 듯이 살아서 그런가.

나는 저렇게 기반이 확실히 잡힌 생활이 제일 부럽더라. 그걸 괜히 망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 내 불행에 남을 말려들게 하는 건. 지긋지긋하다.’

무심코 설백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한숨과 함께 상념을 때려치웠다.

아무튼 회의하는 동안은 여기에 묵는다고 한다, 카사스 놈들을 정리한 다음, 돌아가기 전에 밥 한사바리 하면 되겠네. 결국 이 정도 감상만 남았다.

“둘이 있으니 옛날 생각나는구만. 시험의 장막에 있을 때도, 우리끼리 덩그러니 남겨질 때가 있었잖냐.”

하나 둘씩 불이 꺼지는 상업지구를 보며 크라네이드가 말했다. 나도 그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스칼로랑 알드콘이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랬으니까요.”

“기억 나냐 비실이. 또 두 놈이 사라진 줄 알고 여기저기 찾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우리 드럼통 주변에서 둘 다 퍼질러 자고 있었던 거. 뒤통수를 후려갈겨 줬었지. 켈켈.”

“흐하하. 기억나네요. 하도 안 보이길래 나처럼 게이트 인파에 깔려 죽은 거 아닌가 했었죠. 근데 알고 보니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없는 줄 알았던 거고. 하하하….”

시험의 장막에서 있었던 썰들을 풀어가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찰나.

어떤 생각 한 줄기가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 하하. 죽은… 것 같아서. 없는 줄 알고….”

나는 멍한 정신으로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아주 불길하고. 온몸에 소름이 올라오고. 그래서 더욱 현실성 있는. 그런 가정이 하나 생각나 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크라네이드와 시장바닥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홀린 듯이 걷던 발걸음을 반대로 홱, 돌렸다.

“… 저, 잠깐… 볼일이 생각났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크라네이드.”

미친 사람처럼 비척비척 걷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고. 이내 전력질주했다.

곧 사람들 시선 따위 아무래도 좋아졌다. 지붕 위로 훌쩍 뛰어 동선을 최소화했다. 그걸로 모자라서 흑익을 발동시켰다.

푸화악! 시커먼 날개가 양쪽으로 길게 뻗어나가 내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하핫. 공사다망하구만. 다음에 또 보자고 비실이!”

크라네이드는 손을 휘적거렸다.

저 반응. 크라네이드답다면 크라네이드답다. 세스나 이상으로 주변머리가 없는 건 여전하군.

“거기 당신! 지붕 넘어다니시면 안 됩니다!”

“즉시 내려오십시오!”

뒤에서 경비들이 외친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반응해줄 겨를도 없었다. 오히려 날개짓을 가속해 추격을 뿌리쳤다.

내가 도착한 곳은 아까 들렀던 제나와 제논의 거처. ‘거인의 발자취’였다.

“어서오세… 응?”

아까 그 노인장이 나를 반겼다. 그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의문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도 반응해주지 못했다. 허겁지겁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노인장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렸다. 열리지 않는다. 심장이 요동친다.

콰아앙! 나는 문을 냅다 발로 차버렸다. 굉음과 함께 문짝이 박살나 나뒹굴었다. 내부 광경이 한눈에 시야에 들어온다.

두근.

요동치던 심장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아, 아니 청년! 무, 무슨 말이라도 좀 하고 올라가야…!”

헐레벌떡 나를 따라온 노인장이 숨을 몰아쉬며 내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내 시선을 따라, 부서진 방문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으, 어… 흐어! 으아아아악!!”

노인장은 대경실색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겁지겁 팔다리를 움직여 최대한 그 방에서 떨어지려 발악한다. 그리고 꼬르륵, 게거품을 물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나는 노인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다시 방 안을 쳐다봤다.

“…….”

아가리를 걸어 잠근 채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온통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자욱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갈기갈기 토막난 누군가의 유해가 한쪽 벽면에 해부도처럼 걸려 있다.

나는 그 주인의 이름을 조용히 입 밖으로 냈다.

“… 제나.”

제나의 잘린 머리가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마치 내가 말해주던 군대 얘기를 들을 때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아래, 대문짝만하게 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제나인지, 제논인지, 아니면 나한테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홀린 듯이 그 문구를 육성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피로 얼룩진 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인생이 너무 쉽게만 풀리면 재미없다고들 말하지.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제나의 얼굴이 히죽, 뒤틀린 비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말은 인생 쉽게 살아본 놈들의 기만에 불과하다고 보네. 진짜 고통. 뼛속 깊은 절망. 도망칠 길이 없는 나락을 맛보지 못한 게야. 암.

카사스의 사도 수장.

그 천하의 십새끼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나의 입을 빌려서. 소름끼치게 일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나락에 떨어진 소감은 어떤가. 용사 박정용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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