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아니 X발 잠깐만. 이렇게 간단히?’
그냥 빈민가 애들과 사흘 동안 친해졌을 뿐인데. 그 정도에 개심할 정도로 이놈의 세계정복에 대한 야욕은 두루뭉술한 거였나?
나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리를 싸맸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뽑아냈다.
“야. 애초에 말이다. 넌 옛날에 왜 세상을 찜쪄 먹으려고 한 거냐?”
“… 용사. 너는 왜 숨을 쉬는지 따져가며 숨 쉬느냐?”
루시가 우수에 찬 얼굴로 선문답을 시전했다.
나는 곧장 볼을 잡아당겼다.
“개소리 컷.”
“아흐아! 아, 아랏서! 헛소리 안 하께! 놔랏!”
언젠가 내가 분명 말한 적이 있는데. 자고로 말이란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모두 쳐내고 간단명료해야 한다. 내 앞에서 선문답은 사형이다.
볼을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내던 루시는, 고개를 팩 돌리며 말한다.
“마왕들은 전부 마녀 디아나에게 만들어진 생명이니라. 우리는 제작될 때부터 태어날 이유를 확실히 갖고 태어난다. 나는 그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였다.”
“… 아.”
나는 루시가 직전에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숨 쉬기는 사는 데 당연한 요소다. 아무도 의식적으로 숨쉬지 않는다.
루시에게 있어서 세계정복의 야욕이란 그런 요소였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그 욕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난 원래부터가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하는 성격이니까. 그래서 세상 전체를 가지고 싶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어미가 왜 나한테 이런 욕망을 심어놓은 건지… 난생 처음으로 의문이 생겼다.”
숨쉬듯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욕구가 지금은 의문스럽다고 한다.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듯, 루시의 표정은 혼란에 찌들어 있었다.
“흐음.”
… 글쎄. 루시가 지금 정확히 무슨 기분인지는 알 방도가 없다.
누군가 ‘평소에 혓바닥을 입천장에 붙이고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 때부터 혓바닥 위치가 엄청 신경 쓰이는 거랑 비슷한가? 대충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내 빡대가리론 그 정도가 최선이다.
“반성한다고 네가 싸지른 짓이 사라지진 않는다. 알지?”
그러니까 애초에 공감해주는 건 포기했다. 팩트를 냉큼 들이밀었다.
이것이 코리안 노가다맨식 직설화법이다. 노빠꾸 노퓨처, 예스 상남자.
“… 안다. 죽음과 시간을 다루는 내가 그것도 모르겠느냐.”
루시는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풀이 잔뜩 죽어서 시무룩하게 쳐졌다. 무슨 짓을 당해도 기세만큼은 당당하던 년이 이러니까 좀 신선하긴 하다.
그렇다고 어울린다는 소리는 아니다.
“알면 됐다 새꺄.”
나는 루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마에 돋은 세 개의 뿔이 거슬리길래 운전대 마냥 잡고 흔들어봤다.
그립감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앞으론 볼 말고 뿔로 괴롭혀볼까.
“으약! 이 미친 용사가! 이, 이 상황에 그런 짓이 하고 싶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하냐?”
“역시 네놈은 진짜…!”
루시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팔을 마구 휘두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팩, 새침하게 돌려버린다.
“있잖냐. 용사.”
“뭐 왜.”
“너는 내가 죽으면… 슬퍼하거나 화를 낼 거냐?”
“…….”
나는 잠깐 그녀가 죽는 상황을 상상해봤다. 바로 그만뒀다.
잠깐도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뒤졌다 부활해서 직접 보든가. 아마 실실 빠개고 있지 않겠냐.”
“… 카핫!”
나는 소름끼치는 상상을 물리기 위해서 농담을 주워섬겼다.
루시가 내 대답에 시니컬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를 앞질러 걸어가기 시작한다.
“흐흐. 네놈한테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지.”
“병신인 건 아는구만.”
“뭐가 어째?”
얼핏 스쳐본 바. 완전히 개운해진 표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죽을상은 아니었다.
끽해야 이 정도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 음?’
나는 루시의 뒤를 따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세스나가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세스나가 사라져 있었다.
“세스나?”
나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나서야 세스나를 발견했다.
세스나가 누군가와 해맑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한참 뒤에 떨어져 있는 걸 보니, 루시와 심각한 얘기 좀 나누는 사이 멀어진 듯하다.
‘뭐야. 무슨 일이지.’
나는 루시를 불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곧 세스나가 대화하던 상대를 눈에 담았다.
아니.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워낙 체구가 거대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 무슨 만남의 광장인가….”
세스나와 대화하던 사람은 바로 크라네이드였다.
내 이세계 지인이자, 용제국의 국빈인 그가 세스나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정용님! 여기에요 여기!”
세스나가 뒤늦게 내쪽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가 요란법석을 떨자 크라네이드도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박력있는 드래곤 면상이 대번 활짝 개었다.
쿵, 쿠웅! 반대편 가도에서 지면이 요동치는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봐! 비실아아!!”
굵직한 목소리가 가도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한 번씩 쳐다보고 갈 정도였다.
이쪽으로 뒤뚱뒤뚱 달려오는 크라네이드의 꼬라지를 보니, 내가 아는 그가 맞구나 싶다.
“비실아! 오랜만이다!”
“…….”
여전히 행동이 느리기 짝이 없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거의 야간전술보행 수준이다.
기다리다 속 터져서 내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게 그 유명한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라는 건가.
“이야! 이런 곳에서 다 만나는구나 비실이. 밥은 잘 먹고 다녔냐!”
특유의 호탕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단숨에 코앞까지 당도했다. 거대한 그의 체구가 달빛을 가려,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험의 장막 땐 잘 가늠이 안 됐는데. 주변에 크라네이드의 머리보다 낮게 건물들이 깔려 있으니 새삼 그 거대함이 실감된다.
“오랜만이유. 크라네이드.”
“내가 할 말이다.”
이번이 크로스페이드에서 진짜 첫만남인 크라네이드와 달리 나는 국빈회의에서 미리 한 번 봤지만. 어쨌든 말없이도 전해지는 친숙함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실 쪼갰다.
* * *
오랜만에 크라네이드와 밀린 해후를 나누며 무신의 성전 가도를 거닐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거진 4개월만이냐?”
“그 정도 되겠네요.”
“시간 참 빠르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크라네이드의 행동이 워낙 느려서, 거의 1분에 20미터 정도씩 전진하고 있었다. 해는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세스나는 내가 크라네이드와 회포를 풀 수 있도록 루시를 데리고 자리를 비워준 상태였다.
“비실이. 내가 졸업한 뒤로 똥자루 할아범이랑, 개구리 양반은 어떻게 됐냐.”
“세스나까지 전부 운터란트 망자의 계곡에 떨어졌어요. 저만 빼고요.”
“허어. 너만 말이냐? 고생 좀 했겠구먼.”
“개똥고생했죠 뭐.”
모처럼 세스나가 멍석까지 깔아줬는데. 대화거리가 슬슬 다 떨어져가서 문제다.
그는 내쪽을 슬쩍 흘겨보더니 특유의 파충류 웃음소리(?)로 켈켈거렸다.
“제법 강해진 티가 나는구나, 비실이.”
“근데 왜 아직도 비실이입니까.”
“나보다 약하면 다 비실이다.”
“아 예….”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혀만 끌끌거렸다. 반박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진짜로 나보다 강하다.
[명칭: 크라네이드]
[별칭: 163361813번째 정식 용사, 용해수의 거목, 굉포(轟砲)의 갑룡(鉀龍)]
[LV. 351]
[체력: 4280/4280 마력: 950/950 신체상태: 약한 피로]
[힘: 939 민첩: 4 지능: 72 히어로 센스: 10]
레벨이 나랑 비슷하다. 오히려 쬐끔 더 높다.
아니,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소환됐는데. 어떻게 X바 불사교와 그 지랄 똥고생을 한 나보다 높을 수가 있냐?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도 억울한 나머지 수호 형님을 깨워 항의할 정도였다.
―엉? 소환되기 전부터 원래 강했나보지.
수호 형님의 대답은 그러했다.
내가 좀 더 자세한 해명을 요구하자, 그는 귀찮아하면서도 조목조목 대답해줬다.
―레벨 디자인은 평범한 한국인 남자 기준으로 설정되는 거란 말이야. 내가 평범한 한국인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소환 초창기부터 레벨1 범위의 스펙을 아득히 초월하면. 그 스펙에 맞게 레벨이랑 능력치 수치가 조정된다고. 오케이?
쉽게 말해 크라네이드는 소환되기 전부터 잘난 놈이었고. 그 덕분에 나보다 레벨이 높은 것이다.
이세계 전생까지 금수저빨 X망겜이라니.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고 보니 항상 그런 말을 하고 다녔지….’
크라네이드는 시험의 장막 탈출에 실패할 때마다 개노답 형제들한테 푸념했었다.
자기가 무력으로는 여기서 최강이다. 나가기만 하면 다 뒤졌다. 블라블라 나불나불.
그 때는 그러려니 했다. 아무렴 한국에서도 육군훈련소만 가면 모쏠동정이었던 놈도 여친이 세컨드까지 생기고. 빵셔틀 10년차 찐따도 강북구 17대1 전설의 익룡천왕이 된다.
검증할 길 없는 장소에서 남자의 허세란 그런 법이니까.
‘그게 전부 팩트였다니.’
지미럴. 세상사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