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우리 루시가 달라졌어요
“당신.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정체가 뭐지?”
“…….”
포티아는 그 뒤로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쫓아왔다.
미아 게시판이나 무신제 안내데스크를 돌며 제나의 행방을 찾는 와중에도.
출출한 배나 좀 채울까 해서 상업지구의 한 파스타집을 들어갈 때도.
루시의 간곡한 부탁으로, 없는 시간 쪼개서 파스타를 빈민가 꼬맹이들에게 나눠주러 갈 때도 말이다.
“당신. 본 적이 있어. 이름이 분명… 피에 젖은 달그림자. 아까 한참 하수를 상대로 기권을 하던데. 맞지?”
“나를 한 번에 알아보는 걸 보면. 카발리어의 구성에 대해 잘 아는 자인가?”
“묵비권인가. 설마 싶지만 내 팬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뭔가 말못할 비밀이 있는 거겠지.”
계속. 졸졸졸. 뒤에서 쫓아오며 떠벌떠벌 도트 딜을 먹인다.
그래. 너 비밀임무 중이라 민감한 건 알겠는데. 왜 혼자 허공에 꿍얼대더니 의심의 눈빛을 무럭무럭 증폭시키고 있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아오 씨. 야. 너 몇 살인데 아까부터 자꾸 반말이냐?”
결국 얼마 못가 뇌내 정책을 갈아엎었다. 지금부턴 도발하면 응징한다.
정책의 첫 걸음으로 우선 한국식 서열 정리를 시도했는데. 포티아는 흠칫 몸을 물렸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나이는 왜 묻는지 모르겠다만… 올해로 스물일곱이다.”
“…….”
“뭐냐. 왜 조용해졌지?”
“아무것도 아… 닙니다.”
자승자박이란 이런 때를 두고 이르는 말일 테다.
이상하다. 꼼짝없이 아청법 저촉될 면상이길래 선공 쳤는데. 동안 수준 실화냐. 세계관 최강의 동안이다.
뒤집어쓴 복면 안에서 씨부렁대자니. 이젠 아예 나를 앞질러간 포티아가 우리의 진로를 그대로 막아섰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피에 젖은 달그림자. 크로스페이드에서 카발리어의 지시에 불응하다니. 철창살이 하고 싶나?”
“…….”
“아니면… 내가 이름 없는 기사라고 무시하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대치했고.
눈치를 살살 보던 세스나가 목소리를 죽여 귓가에 속삭였다.
“어, 정용님. 귀찮으신 건 알겠는데요. 웬만하면 대화나 해보죠? 혹시나 제나 씨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잖아요.”
“…… 흐음.”
역시 세스나는 로봇이라 그런가, 옳은 말만 족족 골라서 한단 말이야. 얘랑 같이 있으면 결정장애 올 일은 없겠다.
나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흑익의 복면을 해제했다.
“박정용으로 부르십쇼. 피젖달 그거, 사실 듣는 저도 싫으니까.”
“어, 그… 그래. 알겠다.”
후드까지 벗어재끼자 갑갑함이 말끔히 사라졌다.
탁 트인 시야로 가만히 포티아를 쳐다봤다. 갑자기 얼굴을 까버릴 줄은 몰랐는지 포티아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따라오슈. 좀 걸읍시다.”
나와 일행은 인파를 헤치고 거주지구 쪽으로 향했고. 포티아는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퍼뜩 뒤를 쫓아 왔다.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카사스의 사도를 경고해야 됐으니까.’
그녀에게 경고하는 김에 별로 기대는 안 되지만… 세스나 말대로 만의 하나가 있으니까. 제나에 대해서도 캐물어 보면 되겠다.
나는 포티아 몰래 슬쩍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 *
그렇게 거주지구를 거치고, 빈민가를 거닐며 잠깐 대화를 나눠본 결과.
까놓고 말해서 포티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깔끔하게 개무쓸모네. 씁.’
제나도 제논도 모른다. 붉은 머리 엘프 소녀는 그림자도 본 적도 없단다.
본인의 경기를 끝내고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 거주지구로 나왔는데. 때마침 마왕 소환을 감지해서 처리했다. 그냥 그게 다였다.
‘알아낸 게 있다면… 저 여자가 이름 없는 기사라고 불리는 이유.’
대신 카발리어 제도에 관한 쓸데없는 지식이 좀 늘었다.
카발리어가 모종의 이유로 4년 임기 도중 사망하면. 직전 무신제에서 뽑아놨던 100인의 예비 카발리어들이 실력 순으로 그 자리를 꿰어 찬다.
대신 그렇게 충원된 이들은, 다음 무신제에서 실력을 입증하기 전까진 ‘이름 없는 기사’라는 공통된 이명을 사용하게 된다는 모양이다.
‘죽은 카발리어는 쏙독새의 기사. 이름은 팽월희. 무협 쪽에서 날아온 34세 여자 용사.’
쏙독새는 작년에 청염의 동굴을 방위하다가 몬스터에게 간살 당했다. 포티아는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예비 카발리어다. 포티아가 사용하는 부채 역시 쏙독새가 사용하던 무기라고 한다.
쏙독새의 기사를 존경해서 카발리어를 목표로 강해졌다는 포티아. 역설적이게도 쏙독새의 죽음이 포티아를 정식 카발리어로 만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든 지금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정보. TMI였다.
“실망시켜서 미안하구나. 정용.”
“됐습니다 누님. 애초에 기대를 딱히 안 해서.”
“그렇게 말하면 더욱 미안해지는데….”
“꼽주는 거 아니니까 오해는 마십쇼.”
우리는 골목길에 삐딱하게 기댄 채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포티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댔던 등을 뗐고. 이내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말해준 정보를 완전히 신용하는 건 아니지만. 마녀사냥꾼에 대해 자세히 아는 데다, 적랑의 기사님 지인이 하는 말이니… 일단 유의하겠어.”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긴다.
내가 언급한 카사스의 사도들에 대한 말이었다. 속성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적랑의 이름도 팔았던 게 꽤 잘 먹힌 듯하다.
나는 포티아의 등에 대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고. 손을 대충 휘적였다.
“카사스의 사도라… 흠.”
포티아가 혼자 중얼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입맛을 짧게 다시고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고정했다.
그런 내 눈앞에는….
“음하하! 이몸이 하사하는 일용할 양식이다! 마음껏 먹도록 해라!”
루시가 아까 바리바리 포장해온 파스타를, 빈민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 돈으로 산 파스타 가지고 생색을 오지게 내고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박수는 거시기가 받는다더니, 옘병.
“이거 1번가 한스네 파스타다! 엄청 비싼 건데…!”
“와아! 루시 누나, 이거 진짜 먹어도 돼?”
“우, 우리 놀리는 거 아니지?!”
꼬맹이들 중에 익숙한 얼굴들이 몇 보인다.
대부분 저번에 노숙하는 우리 일행 놀리다가, 열받은 루시와 친해졌던 놈들이었다.
“누나아―!”
“나 죽어어!”
“진짜 먹어? 먹는다?”
빈민가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루시를 올려다보고 있다.
루시는 그 선망과 존경이 담긴 눈빛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제 다음부턴 배고파서 졌다는 변명 따윈 통하지 않을 것이야!”
보아하니 같이 한 놀이에서 꼬맹이들이 졌는데. 꼬맹이들이 ‘배곯아서 졌다’라는 가불기로 비빈 모양이다.
이겨놓고도 뭔가 찝찝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모양이다.
“와아! 누나 최고다!!”
“고마워 누나!”
“우하, 나 이거 처음 먹어봐!”
빈민가 꼬맹이들이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파스타를 빨아들인다. 세상 다 가진 양 행복한 표정이 떠 있다. 국수 면발에 영혼이라도 팔린 듯한 모습이다.
자기한테 헤롱거리는 꼬맹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월감에 취하고 싶은 건가, 그런 생각에 루시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
루시는 생각보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눈썹을 얕게 찡그리고, 우는 듯 웃는 듯. 미묘하게 입꼬리가 틀어져 있다.
새빨간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누나! 다음에 또 놀자!”
“고마워 누나!”
“잘 가 누나! 또 와!”
우리는 꼬맹이들이 파스타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를 떴다.
오랜만의 포식이 정말 기뻤는지, 빈민가 꼬맹이들은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까지도 계속 손을 흔들어줬다.
원래 루시와의 약속은 파스타만 주고 바로 제나를 찾으러 떠나는 거였지만. 그녀가 예의 미묘한 표정으로 기다려달라 부탁하자 거절하기가 좀 힘들었다.
덕분에 시간이 꽤 지체됐다. 벌써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
루시는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양새였다. 아까 그 애들의 행복한 표정이라도 떠올리고 있나. 설마. 그 루시가 그러려고.
분위기가 영 다운되길래, 나는 조소를 잔뜩 섞어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왜. 쟤네를 보니 자수해서 광명 찾고 싶어졌냐? 30년 전까지의 내가 정말 개새끼였다 싶지?”
“응.”
“…… 뭐시기?”
총알처럼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번에도 내 감각이 병신인가 싶어 재차 물어봤다.
“너 지금 응이랬냐.”
“응이랬다.”
긍정했어?
아니. X발. 진짜로… 고작 방금 그걸로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있었다고?
내가 꿀 처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 있자, 오히려 루시가 중얼거렸다.
“내게 덤벼 와서 죽인 인간들. 그래서 내가 박살내버린 모든 도시의 인간들. 그놈들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지. 전부 저렇게 됐겠구나.”
“… 뭐, 너처럼 밥 갖다줄 사람이 없었으면 진작에 굶어 뒤졌겠지. 여기 애들도 조만간 하나씩 주님 만나러 가지 않을까.”
내가 덧붙이자 루시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동안 미미한 충격이 감돌았고. 이내 쓴웃음이 걸렸다.
“상상도 못 했느니라. 아니.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 땐 인간의 생리를 알 길이 없었다. 우리처럼… 만들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걸 모르니까.”
루시는 길게 뻗은 하얀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미안함이 사무치는구나. 나 때문에 죽은 놈들이나. 남겨진 가족들에게.”
“그, 그러냐.”
“응. 그 때의 난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나는 다른 마왕이 죽어도 딱히 슬프지 않다. 그런데 인간들은 항상 다른 인간이 죽었다는 이유로 날 죽이려 했다. 이해가 안 되니 그놈들의 행패가 화가 났던 게다.”
“어…….”
“그런데 지금은 알겠다. 저 꼬맹이들이 죽으면 나는 화가 날 게야. 나를 해친 것보다도 더욱 화가 나겠지. 이래서 인간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내게 덤빈 거였구나.”
뭐지. 아니 진짜 뭐냐.
불사의 마왕이 쌈박하게 개과천선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