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재회
우리는 ‘거인의 발자취’라는 여관 앞에서 멈췄다.
약속의 평원과 가까웠던 케른에선 여관 이름에 ‘약속’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듯. 이곳의 여관은 대부분 ‘거인의 뭐시기’였다.
한 마디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관이다. 굳이 말하면 조금 후줄근한 쪽.
‘들어가서 왼쪽 계단. 2층 가장 안쪽 방. 호실 숫자는 없다.’
나는 그레이에게 들었던 것을 상기시키며 성큼성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노인장이 있었다.
“으잉….”
그는 우리 일행의 얼굴을 보더니 혀부터 차기 시작했다. 이미 만실이라 어떻게 거절해야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나는 달리듯이 그 앞에 가서 섰고. 금화를 한 움큼 카운터에 쏟아내며 말했다.
“빈방 없는 건 압니다 어르신. 투숙객한테 용무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올라가 보겠습니다. 잠깐이면 돼요.”
내 기세가 서슬퍼래서 놀란 건지, 막대한 돈에 혹한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어르신은 생각보다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러시게?”
“감사합니다. 잔돈은 손주들 까까나 사주십쇼.”
“그, 그래. 고맙네 젊은이.”
원래는 시크하게 돈을 휙 던지면서 ‘잔돈은 애새끼들 과자나 사다줘!’가 100점인데. 동방예의지국 대한건아로서 찔려서 못했다. 이번 버킷리스트 명대사는 반만 성공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 2층 가장 안쪽 방의 문을 두들겼다.
“제나! 나 박정용이다!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봐!”
쾅쾅쾅! 거의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겼지만. 반응은 없었다. 나는 귀를 갖다대고 안에서 새는 소리를 들어봤다.
곧 혀를 차며 귀를 뗐다. 초인이 되며 날카로워진 감각에도 아무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인기척이 전혀 없어.”
“어디 잠깐 외출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옆에서 세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옆에서 루시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용사 네놈이 했던 것처럼, 불한당들에게 납치당했을지 모르지. 그래 순진해 빠졌잖느냐. 나라도 납치할 수 있겠구만.”
“…….”
안 그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마당인데. 제논이 그 꼬라지 된 걸 직접 목격한 지금은 더더욱 쌉가능한 가정이라 반박을 못 했다.
나는 심각하게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삐비빅, 하는 경고음과 함께 패널이 불쑥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에픽)]
이런 X발.
이 줫같은 세상이 박정용의 진지한 사색을 용서하지 않았다.
[명칭: 마왕 출현! - 최후의 성검, 교황 카스트로]
[상세: 강제 퀘스트. 해당 퀘스트를 받은 용사는 메인 타깃을 토벌하기 전까지 모든 행동이 제한되며, 1시간 이내로 타깃의 영향권에 강제전송 된다.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메인 타깃을 사살하라.]
[보상: 전 스탯 +3. 금화500냥(기여도 순위에 따른 추가 지급)]
“아니 무슨 하필이면…!”
척수반사로 아니시에이팅부터 박고 시작했다.
그 정도로 욕나오는 타이밍이다.
“후우.”
나는 짝, 소리가 찰지게 나도록 마빡을 짚었다.
하긴. 지구에서도 자연재해가 월드컵, 올림픽 피해가며 일어났나. 빈도를 생각하면 무신제 기간 중에도 출몰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내 일로 바빠서 잊고 있었다.
그러면 설마 전생에서도 계속 이 타이밍에 상업지구에서 마왕이 출현했었나.
지금까지는 무신제 경기장에만 있어서 영향권 밖이라 몰랐던 건가?
“정용님! 저 곧 어디로 소환된다네요? 이거 뭔지 아세요?”
세스나가 눈앞을 만지작거리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세스나는 긴급퀘스트를 받아보는 게 처음인 모양이다. 하여간 운도 좋은 여자야.
나는 간략하게 마왕 토벌퀘스트를 설명해줬고. 그녀는 설명을 끝까지 듣더니 낮은 탄성을 흘렸다.
“어, 그러면 이 주변에 곧 마왕이 소환된다는 소리 아닌가요?”
“그렇지.”
“1시간이나 가만히 내버려두면 피해가 심각해지는 거 아닐까요? 가뜩이나 사람도 이렇게 밀집돼 있는데요. 저희가 먼저 찾아가서 말살해버리죠!”
“음….”
손을 전기톱으로 변형시키며 ‘말살’ 운운하는 모습은 좀 호러틱하지만. 일단 옳은 말이긴 하다. 나는 침음을 흘렸다.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왕을 찾아가서 죽일 거라는 소리는 아니다.
“나서줄 사람 널렸어. 카발리어들은 대보름까지 묵혀뒀다 강강술래 하려고 있냐.”
루시가 내 주장을 듣더니 혀를 차기 시작한다.
“저런 것도 용사라고… 에잉 쯧쯔. 나 때 용사들은 안 그랬다.”
“쉿. 아가리.”
네가 신세대 용사의 고충을 뭘 알아. 인건비 대줄 거 아니면 닥쳐라 꼰대 마왕.
그 새를 못참고 루시와 눈빛싸움을 하고 있자니. 문득 세스나가 어딘가를 쳐다보며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어, 정용님. 역시 저희가 나서야겠는데요?”
“… 세스나. 내가 하는 말 혹시 못 들었어?”
“아뇨. 들었는데요. 그 마왕이 저거 아니에요?”
“음?”
나는 세스나가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웬걸. 우리와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핏빛 마법진이 바닥에 빠르게 그려지더니. 그 위로 사람의 신형이 서서히 재구성되는 게 아닌가.
“그… 으으으…!”
소환된 마왕의 썩은 이빨들이 마찰하며 기괴한 신음을 내뱉는다.
시커멓게 짓무른 투실한 살덩이. 그 위로 걸레짝이 된 법복을 입은 할배였다. 한쪽 눈두덩은 구더기가 들끓었고. 다른 쪽은 커다란 지네가 눈꺼풀 사이로 까꿍하고 있었다.
“오오… 빛… 어, 얼마만의… 빛인가… 여신 프로피샤의…! 나와 함께 하던 빛이…!”
스르릉.
그리고 놈의 한쪽 손에는, 시퍼런 빛을 영롱하게 내뿜는 기묘한 장검이 하나 들려있었다.
하얀 검날의 폭은 내 베스타크보다 얇아 보이는데… 검날을 휘감은 광휘가 워낙 두껍고 찬란해서, 거의 대검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래 … 슈엘츠는… 내가… 지킬 것이다… 마녀도… 성녀도 아닌, 내가아… 지고한… 크, 으후…!”
연신 입을 벌리며 말을 쏟아내는데. 모든 마왕들이 항상 그랬듯, 무슨 말을 씨부리는 건지는 당최 알아 처먹을 수 없다.
슈엘츠가 어쨌네, 성녀가 어쨌네, 디아나가 어쨌네, 마왕이 어쨌네. 가만 보면 레퍼토리도 거의 비슷하다.
나는 그쯤에서 놈의 상태창을 한 번 훑었다.
[명칭: 마왕 카스트로]
[체력: 860/860 ?마력: 700/700]
[힘: 230 ?민첩: 77 ?지능: 151]
[상세: 고대 신성국 슈엘츠의 마지막 정식 교황. 첫 번째 마왕 스트라토 헬릭스에게 살해당한 뒤, 디아나에 의해 마왕의 육체로 거듭났다. 파마(破魔)의 기운을 두른 인조성검을 사용한다.]
보상의 규모에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좁밥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 지금까지도 대부분은 저랬지.’
애초에 루시나 아스타르트 같은 4마왕급 개체는 몇 십, 몇 백 년에 한 번씩 나오는 거라고 하고. 내 경험상으로도 이게 정상이다.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루시와 세스나를 돌아봤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아. 직접 하시게요 정용님?”
“어차피 할 거면, 그래야 조금이라도 돈 더 받지.”
“아하!”
세스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득거렸고. 나도 피식 웃으며 따봉을 들어줬다.
나는 곧장 진화의 흑익을 변형시켜 복면을 만들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혹시나 해서 숟가락을 챙겨오길 정말 잘했다.
이 상황에 왜 ‘피젖달’로 변신했냐고?
“꺄아아악!”
“지, 진행요원! 무신제 진행요원들을 불러 어서!”
“싸울 의지가 있는 자들은 앞으로!! 대피를 서두르시오!!”
주변의 시민들이 마왕의 탄생을 깨닫고 이목이 잔뜩 쏠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일 거면. 내일 있을 패자부활전을 대비해서 이미지나 좀 개선시켜 놓자는 계산이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아까 맥아리 없이 항복선언을 해버려서 이미지가 바닥 모르고 떡락한 상태니까.
… 뭐. 지금은 내일까지 살아남을 수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지만.
“크… 으… 길을… 비켜라….”
언데드처럼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던 마왕, 카스트로가 나를 쳐다봤다.
아니, 쳐다본 게 맞나? 일단 눈두덩 속의 지네가 내쪽으로 움직이긴 했는데. 저게 눈 역할이 맞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느―려.”
시그니쳐 대사를 발사했다. 내가 피젖달 본인임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슬쩍 어필.
동시에 푸확! 파육음이 터진다. 거칠게 뜯겨나간 카스트로의 팔이 허공으로 튀었다.
나는 어느새 놈의 등 뒤에서 수저를 까딱이고 있었다.
“으… 어?”
털퍽. 검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카스트로의 오른 팔뚝.
카스트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것을 내려다본다. 썩은 피가 끈적하게 흐르는 어깨죽지를 쳐다보고.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더니.
이내 나를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 망토… 밤하늘처럼, 검은… 그림자….”
“음?”
“… 기억났다… 인도하는… 까마귀. 너는… 예언의….”
역시나 알아먹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카스트로의 입이, 어느 순간 덜컥 멈췄다.
서걱. 서늘한 절단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털썩. 이내 바닥을 볼품없이 구른다.
“어.”
방금 이건 내가 만든 상황이 아니다. 목은 마무리 대사까지 뱉은 후에 자를 예정이었는데?
나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익숙한 실루엣의 여성이 보였다.
“…….”
한복 풍의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흑발에 진청색의 눈동자. 이번엔 복면도 안 쓰고 있어서 붉고 가는 입술과 얇은 턱선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 포티아.”
양손에는 철제 부채를 쥐고 있었는데, 끝부분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전생에선 그녀가 무기를 꺼낼 겨를도 없이 칼서렌을 박아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저 부채 두 개를 무기로 쓰는 듯하다.
“……?”
내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와서 놀랐는지, 포티아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때까지도 그녀는 입을 일절 열지 않았다.
‘아이고 참.’
생각해보니 나 지금 복면 쓰고 있는데다… 쟤랑 경기에서 만났던 건 전생의 일이었지. 비밀임무까지 수행하고 있는 포티아가 나를 수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곤란한 상황에 짧게 혀를 찼고.
[163417413번째 용사 박정용의 기여도: 2위]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했다.]
[금화 500냥을 획득했다.]
[기여도 2위 특별보상: 금화 500냥을 추가로 얻었다.]
[기여도 2위 특별보상: 히어로 센스 +1을 추가로 얻었다.]
불쑥 나타난 패널을 눈에 담은 뒤 씨근거리며 포티아를 노려봤다.
저 막타충 때문에 기여도 콩라인을 타버려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