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아주 X되는 겁니다
“케른에선 저희 형님이 신세를 좀 진 모양이던데요.”
남자가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X도 없는 내가 괜히 씨불대 봐야 밑천만 드러나니까.
그러자 남자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절차도 잊고 그만. 제 이름은 그레이 노레타. 그레이라 불러주십쇼. 케헤.”
“… 박정용입니다.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케케. 그럼요. 선생님이야 지금 워낙 이쪽 업계 유명인이시니.”
나는 혼자 실실거리는 그레이의 손을 맞잡고 몇 번 흔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은 시야 맡에 떠 있는 그의 상태창을 훑고 있었다.
[명칭: 그레이 노레타]
[별칭: 147788258번째 정식 용사. 크로스페이드의 밤주인, 크로스페이드 상연회 수장]
[LV. 227]
[체력: 1630/1630 ?마력: 800/800 ?신체상태: 정상]
[힘: 199 ?민첩: 420 ?지능: 106 ?히어로 센스: 13]
가명을 쓰지 않았다. 그레이 노레타가 본명. 이건 의외다.
게다가 용사다.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정보길드 수장 하면 당연히 원주민일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선생님.”
“여기가 사연 있는 무기 쪽을 잘 안다고 들어서요. 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흐음.”
그레이가 잠깐 수염을 쓰다듬는다. 그러다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잘 찾아오셨습니다. 크로스페이드 상연회는 정보상 뿐만 아니라 그쪽 관련해서도 사업을 좀 하고 있습죠. 케헤.”
“… 사업이요.”
장물아비 새끼들이 사업 운운하는 게 웃기긴 했지만. 괜히 비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 웃지는 않았다.
그냥 시선을 잠깐 사방으로 스윽 깔아본 뒤. 본론만 바로 얘기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어떤 검에 대한 겁니다.”
“오호. 검이요? 어떤 검입니까.”
“예. 정확히는 도(刀)라고 해야 하나. 사람을 미치게 하면서, 엄청난 힘을 주기도 하고. 검날에서 새빨간 불꽃이 타오르는 곡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불꽃에 휘감긴 칼날인데요. 아십니까?”
“…….”
그레이가 입을 콱 닫고 말을 아낀다.
럭키 펀치가 터졌다. 저 반응 보니 여기가 확실하다. 처음으로 신이 내 편을 들어주는구나 싶었다.
나는 쾌재를 부르는 한 편.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계속 추궁했다.
“알고 있으면… 혹은 직접 팔았다면 관련 정보 다 갖다 주십쇼.”
“흐음… 어허. 이거 좀 곤란한데….”
“대가라면 웬만한 건 지금 당장 다 드리죠. 내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레이가 입매를 비틀었다.
랜턴의 아스라한 빛에 음영진 얼굴이 음험하게 번들거린다.
“선생님. 케른 지부를 이용해보셨으니, 우리 길드가 무얼 대가로 받는지 아시지요?”
“정보엔 정보?”
“케헤. 말씀이 잘 통하십니다.”
그레이는 히크가 그랬던 것처럼, 깃펜과 쪽지를 들어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천장도 한 번 스윽 올려다봤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번득, 그레이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지금은 멸망한 나라인데. 신성국 슈엘츠라고 아십니까?”
“… 아. 그 대륙 중앙에 있는 시꺼먼 데요?”
“예에. 마녀의 군세 때문에 분열되고 패퇴하다가, 결국 지금은 접근조차 불가한 오염된 땅이 지요. 케헤헤.”
나는 대륙 전도를 떠올리며 퍼뜩 대답했다.
‘멸망의 성흔’이라고 불리는 신성국 슈엘츠의 옛 터. 어떤 지도든 중앙에 곰팡이처럼 새카맣게 표시돼있지.
현재의 4개국이 도넛마냥 대륙의 변두리에 몰린 형국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나라는 갑자기 왜요.”
“전설에 따르면 슈엘츠는 ‘성검교’라는 종교를 신봉했던 신성국입지요.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프로피샤의 성녀가 그것을 항상 예언했다고 합니다. 달의 무녀라 불리던 아름다운 성녀님께서.”
“…….”
내 면상 보고 설마 아리따운 성녀님의 재림이라 착각한 건 아닐 테고. 나는 한참 생각한 뒤에야 이 양반이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내게 끈적하게 들러붙어왔다.
“선생님이 케른상연회에 제공한 불사교의 습격정보 말입니다. 예언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케헷.”
“히크 씨가 과장을 했네요. 그 정돈 아닙니다.”
“히크 형님은 없던 사실 만들어낼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 같은 길드 소속인 제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요?”
“…….”
“그 비밀을 알려주시지요. 그 정도면 거래 조건으로 충분할 듯싶습니다만… 케켓.”
그레이가 여유만만하게 딜을 걸어온다. 나는 다시금 주변을 스윽 훑었다. 얼마나 허공에 시선을 박고 있었을까.
나는 피식.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좋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예언이나 하나 하죠.”
“음? 무슨….”
“너랑, 주변에 매복한 15명의 살수들. 지금부터 호된 꼴을 당할 거야.”
“…!?”
“죄목. 정보만 싹 처먹고 입 씻으려 한 괴씸죄. 사형 땅땅땅 X발아.”
파바바박! 나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페이탈 쏜즈를 발동시켰고. 미리 포착해놨던 장소들을 향해 두 개씩, 총 15방향으로 가시를 일제히 발사했다.
일말의 도주할 틈도 주지 않는, 섬전 같은 기습이었다.
“크억!”
“컥!”
“아악!”
푸확! 핏줄기가 사방에서 분수처럼 쏟아진다. 어둠 속에서 흐늘거리던 신형들이 피를 뒤집어쓰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쿠학!”
콰지직. 누군가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테이블을 박살내 버렸다. 팔과 복부를 관통당한 복면 차림의 남자였다.
방금 전까지 천장에 달라붙어 매복해 있던 상연회 소속 살수다.
“…….”
아까부터 그레이가 말이 없다.
나는 꿀 처먹은 벙어리가 된 그를 향해 얼굴을 조금 가까이 가져갔다.
“예언이 이루어졌네요. 만족하십니까?”
내가 왜 정서불안 환자마냥 자꾸 주위를 둘러봤겠는가?
분명히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자꾸 상태창이 뜨더라. 그것도 시선 돌리는 각도마다 다른 이름과 스탯이 떴다.
거기서 난 히크 때를 떠올렸고.
얘네들이 항상 비장의 수를 숨겨놓는 족속들인 것을 상기했다.
‘자존감이 낮으니 이럴 땐 좋아.’
나는 이런 일이 생기면 일단 ‘내 감각이 병신인가?’ 하고 나부터 의심하거든.
결과적으로 내 감각이 병신 맞았다. 정확히는 살수들이 레벨에 비해 지나치게 위장술이 뛰어난 거지만. 괜히 크로스페이드 최고 정보상은 아닌가 보다.
“… 서, 선생님.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레이가 나를 쳐다보는 눈에는 어느새 적잖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미지의 괴물을 보는 듯한 공포.
레이라가, 그윈이, 케른의 주민이, 타라라, 그리고… 꿈속의 루시가 보여주던 그 시선이다.
아까부터 목구멍을 우글대던 불쾌감이 욕설이 돼서 쏟아졌다.
“생이별한 니 애비다 X발련아.”
장단 맞춰주는 건 여기까지다. 거래? 느금마랑 실컷 해라.
저쪽이 먼저 나 몰래 이빨을 갈고 있었다. 죄책감은 개미 오줌만큼도 없다.
전생에서 이래저래 불쾌한 일이 많아서 말이야. 지금 나는 꽤 센치하다.
―마스터. 죽일까?
“참지 마 잔다르칸.”
―엌!
수호 형님이 기막힌 타이밍에 개드립을 쳐줬다. ‘안 돼, 참아’가 본래의 대답이지만. 솔직히 참기 싫다.
나는 그대로 베스타크를 스릉, 꺼내들었다.
“대가리 살살 쳐굴리지 말고 이빨이나 털어라. 뒤지기 싫으면.”
나는 붉은 문자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베스타크를 그레이의 목으로 밀착시켰다.
그레이는 퍼뜩 몸을 굳히며 나를 쳐다봤다. 벌벌 떨리는 놈의 시선과 얼마나 마주했을까. 그는 곧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모, 몰라 뵙고… 겨, 결례를 범했습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요…!”
“옳지 옳지.”
나는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어 주고 검을 집어넣었다.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댔다. 다리를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털썩 올려놨다.
그레이는 연신 그 자리에서 어물쩡거리다, 이내 매대의 아저씨에게 뭔가 속삭였다. 그리고 후다닥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간다.
“… 아, 아까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모, 목숨만은….”
매대를 지키던 아저씨가 새 테이블을 준비하며 쭈뼛거렸다.
산만한 사내새끼가 러브레터 받은 소녀새끼마냥 그러고 있으니 심히 보기가 안 좋았다. 나는 손사래를 쳐서 아저씨를 물려버렸다.
“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참 후, 다시 나온 그레이의 손에는 서류뭉치가 잔뜩이었다.
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우수수 쏟아내며 내게 흘깃 시선을 돌렸다.
“거래한 물건과 당시 대화 기록… 그, 그리고 거래상대의 대략적인 정보입니다.”
이제야 얘기가 좀 제대로 돌아가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제스쳐를 보냈고. 그레이는 긴장으로 빳빳해진 손을 열심히 휘적여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끼이익. 암시장의 출입문이 천천히 열린다.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한동안 어두운 곳에 있어서 그런가. 한동안 광량이 적응이 안 돼서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이 적응되자, 멀뚱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루시와 세스나가 보였다.
“가자. 일 끝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재촉했고. 둘은 그제야 퍼뜩 내 뒤로 따라붙었다.
세스나가 퍼뜩 물어왔다.
“용건은 잘 끝나셨나요?”
“그래. 골수까지 빨아먹었지.”
“어머나….”
내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하자, 세스나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마주 웃는다.
―피젖달좌… 솔직히 쩔었다.
그러자니 수호 형님이 감탄한 목소리를 연발했다.
역시. 수호 형님이라면 이 멋짐을 알아줄 줄 알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습니까.”
―존내 카리스마 있어. 이러니까 여자들이 뻑이 가지.
“인정?”
―어 인정.
같은 한국인한테 인정받으니 두 배로 기쁘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거주지구 쪽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게냐.”
루시가 툭 물어온다.
무기상에서 대화를 쫓겨나서 그런가. 짜증이 2스택 쌓여 있는 모습이다. 3스택이 쌓이면 폭발할 게 분명하므로 이번엔 사실대로 말해줬다.
“제나네 집으로.”
“… 제나? 그 여자 뾰족귀?”
“그래.”
입으로는 루시에게 대답했고.
머릿속으로는 그레이에게 들은 정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검은… 멸흉검이라 합니다. 소재가 워낙 불분명해서 구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저, 저희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선생님. 언제나 무신제에 홀연히 누군가의 손에 들려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소유자의 목숨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검인지라….
―검신에 용무늬가 있어서 용제국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번 무신제의 상품인 멸룡검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이름도 비슷하잖습니까.
멸흉검(滅凶劍). 직역하면 흉을 멸하는 검.
흉을 멸하긴 옘병, 숭한 기운을 전자파 마냥 뿜어내던 그 검의 이름이다. 일단 이름 붙인 새끼는 장님이 확실하다.
“이봐 용사.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는 가는 게냐?”
루시가 퍼뜩 내 뒤를 따라붙으며 계속 물었다. 나는 다시금 음흉한 미소를 머금어 루시에게 보여줬다.
“말했잖아. 골수까지 빨았다고.”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쪼가리에 슬쩍 시선을 뒀다.
그들이 적어준 거래 상대… 제논에 관한 정보가 적힌 쪽지다.
―붉은 머리에 뾰족한 귀…? 네. 마, 맞습니다요. 그 자입니다! 그 자가 검을 사갔어요!
―정확하진 않지만, 저희가 추적해본 바에 따르면 거주지는….
저벅저벅. 약도를 따라 걷는 발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억눌러 터지기 직전인 분노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