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작은 박정용을 건드리면
나는 곧바로 상업지구로 향했지만. 경기장 관객석 입구 쪽을 지나치는 순간 멈추고 말았다.
세스나와 루시가 털레털레 걸어나오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정용님! 상대가 강해보이지도 않던데 왜 기권하셨어요?!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
세스나는 내 칼같은 항복이 이해가 안 됐는지 소매를 붙들었고. 루시는 그 옆에서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 루시의 무표정한 시선이 유난히 폐부를 쑤신다. 나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뭐, 어디 가느냐?”
루시가 내 꼬라지를 슬쩍 보더니 툭 물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가야할 데가 생겼다.”
“또 혼자 갈 거냐?”
나는 슬쩍 루시를 쳐다봤다. 루시는 팔짱을 단단히 끼운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혼자 갈 테면 가봐라. 더 삐지면 내가 얼마나 추해지는지 보여주겠다. 맹렬하게 눈빛으로 어필하고 있다.
“… 오고 싶으면 오든가.”
나는 결국 그 눈빛에 이기지 못해 손사래를 쳤고. 루시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빼꼼, 뒤에서 눈치만 보던 세스나도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용님. 따라가도 돼요?”
“… 너? 굳이 따라올 필욘 없는데.”
“정용님. 따라가도 돼요?”
“아니.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무신제나 구경….”
“정용님. 따라가도 돼요?”
“…….”
똑같이 웃는 얼굴로 똑같은 대사를 하는데, 어떻게 분위기를 점점 음산하게 만드는 걸까. 저것도 재능이다.
어쨌든 한 번 더 거절했다간 그녀의 손에서 움찔거리는 전기톱이 튀어나올 게 분명하다. 나는 혀를 낮게 차며 세스나의 동행도 허락해 버렸다.
“그래서 어디 가는 게냐?”
우리가 인파를 뚫고 상업지구에 도착했을 무렵. 루시가 그제야 그것을 물어온다.
거 일찍도 물어본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따라오긴 왜 따라오누.
“암시장.”
“… 암시장? 그게 뭐냐.”
“뒷세계의 시장.”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뭐냐 이 말이다.”
“불법적인 물건들을 파는 비밀 시장이지.”
“으음.”
귀찮아진 나머지 대충대충 대답해줬다. 루시는 침음을 흘리며 잠깐 입을 닫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이내 다시 루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불법적인 물건이 뭐냐.”
“세간의 기준으로, 팔면 경비아저씨들이 이놈! 하는 물건들.”
“세간의 기준이 뭐냐?”
“…….”
X발 이러다 ‘우주의 기원은 어디냐’까지 올라가겠네.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루시의 집요한 질문을 뒤로하고 크로스페이드의 뒷골목으로 진입하는데. 이번엔 세스나 쪽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나라의 특성인 건지… 마르크트레스엔 이런 데가 많은 것 같아요.”
“음? 이런 데가 어떤 덴데.”
“빈민들이 모여있는 뒷골목이요. 케른에도 이런 데가 있었죠?”
“아아.”
세스나의 시선이 주변의 부랑자들에게 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우릴 향해 번득이는 눈동자들이 몇 있다. 무심결에 타라를 떠올렸다. 그녀와 비슷한 경계심이 이곳의 부랑자들에게도 깃들어 있었다.
전부 마왕, 혹은 불사교의 횡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다.
“카발리어들이 마왕 피해를 막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발생하기 직전까진 예측조차 안 되는 최악의 자연재해라잖아.”
“아… 하긴 그렇네요.”
미텔란트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도시엔 경비병력이 깜짝 놀랄 정도로 극소수만 존재한다.
대륙의 네 나라가 굳건한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지금, 그들이 신경써야할 건 마왕의 출현뿐이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경비병들은 마왕들 cs만 늘려주지.’
경험한 바로는 마왕은 최소 레벨 150대 정도의 스펙을 갖추고 태어난다.
내가 지금은 원치 않게 인간병기가 됐고. 내 주변에도 괴물 천지라 파워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애초에 레벨이 150언저리였을 때도 용사들 중 나름 중상위권은 됐다. 그 정도 스펙도 사실 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이 세계에서 경비병들의 역할은, 공항 출입국 관리원과 다를 게 없다.
“해결책을 뻔히 아는데도 넋놓고 당해야 한다니. 답답한 상황이네요.”
“…. 음. 뭐.”
안타까움이 담긴 세스나의 말에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했다. 정신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서 사뿐사뿐 걷고 있던 루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시.”
“뭐냐?”
“너. 전에 분명 나 외에도 인간 수호자가 있었댔지. 둘인가?”
“그건 맞다. 왜 그러느냐.”
“그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야. 나처럼 용사였냐?”
“음. 그놈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루시가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복잡미묘하게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이 대화 전에도 하지 않았느냐? 분명 기억이 안 난다고 했을 텐데.”
“… 그랬던가?”
“그랬다. 네놈 앞에서 처음 부활했을 때. 분명 했었다고.”
“흐음….”
“아 몰라. 아무튼 진짜 기억 안 난다.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느니라.”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벌써 수개월 전의 일이다. 나는 과거 따윈 돌아보지 않는 게 신조다. 안 좋은 일은 물론이고 웬만한 좋은 일도 한 달 정도면 싹 포맷된다.
‘하지만 저 기억력 좋은 루시가 저러는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사실인 듯하다.
더 예전의 일도 잘만 기억하면서 수호자에 대한 것만 싹 잊어먹다니. 참 편리한 대가리를 탑재했구만. 나는 혀를 낮게 찼다.
뭐, 일단은 그런 걸로 치자. 이래저래 잡담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으니까.
“음. 여기다.”
나는 쪽지를 한 번 다시 살펴봤다가, 다시 앞을 쳐다봤다.
뭐 하나 특출날 것 없는 허름한 무기상이 그곳에 있었다.
“계세요.”
나는 무기상에 가까이 가며 매대 쪽을 기웃거렸다.
매대 앞에서 턱을 괴고 있던 인상 험악한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살 거 아니면 꺼져.”
상인으로서 글러 처먹은 태도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당당하게 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순백의 마왕.”
매대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의외라는 얼굴이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 용사의 전추.”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다. 나는 세스나와 루시에게 슬쩍 눈짓하고는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종이 쪼가리를 슬쩍 쳐다봤다.
[크로스페이드 상연회]
그것이 적랑이 내게 적어준 암시장의 이름이다.
어디서 많이 본 네이밍 센스 아닌가? 그렇다. 이곳은 케른 상연회의 크로스페이드 본부다.
생각해보면. 적랑은 케른상연회의 총수인 히크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수도 쪽 본부와 연줄이 없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법도 하다.
‘암호 알아놓길 잘했다니까.’
히크에게 암호를 물어봤던 게 몇 번째 나였는지도 이제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철두철미한 전생의 내게 건배다.
‘생각보다 훨씬 넓군. 마법을 쓴 건가?’
굉장히 좁아보였던 외부에서의 모습과 달리, 무기상 내부는 상당히 널찍했다. 족구 해도 되겠다 싶을 규모의 음습한 공간이 문 안에 펼쳐져 있었다.
벽에는 장물들로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각종 무기들부터 신기하게 빛나는 돌. 정체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주머니들까지.
암시장이 아니라 거의 만물상 수준이군. 혀를 내둘렀다.
“그래. 오신다는 소리는 적랑의 기사께 들었습니다. 엘더리치 슬레이어 선생님.”
문득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원지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깜빡거리는 랜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테이블 맞은편. 누군가 앉아 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남자가 내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두 여자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저 두 레이디께서는?”
“일행인데, 싫으면 내보내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가 관심 있는 건 선생님뿐이라서… 케켓.”
그렇다는군.
나는 두 사람에게 슬쩍 눈짓했다. 루시는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고 항의하려 했지만. 세스나가 힘으로 끌고 나가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축출 당했다.
남자가 박수를 쳤다. 아까 매대에 서있던 아저씨가 테이블에 담배와 차를 세팅했다.
“종이담배? 아니면 파이프십니까?”
남자가 그렇게 물어온다. 두 손으론 파이프에 담뱃잎을 우겨넣고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흡연 안 합니다.”
“어헛. 연초 쌓아놓고 피울 관상이신데. 제 눈도 아직 멀었구만요. 케헤.”
“생긴 게 좀 쌍놈 같긴 하죠. 그런 소리는 자주 듣습니다.”
“케헤헷. 생각보다 유머러스하십니다?”
“그런 소리도 자주 듣습니다.”
“케헤헤헤!”
짙은 음영이 드리운 남자를 자세히 살펴봤다.
반다나를 뒤집어쓰고 진회색의 누더기 차림.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아 보이는데.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비쩍마른 체형 때문에 좀 더 겉늙어 보인다. 특히 불룩 튀어나온 눈두덩은 좀 징그럽기까지 했다.
‘케헤헤’ 하면서 실실 쪼갤 때마다 드러나는 뻐드렁니와 금니가 인상적이다.
“자 그럼.”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한 입 길게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눈빛을 번득였다.
“즐거운 상담(商談)을 해봅시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