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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34화 (110/280)

134화 추적

관중석에 뻘쭘하게 앉아있던 나는, 망토 속에서 몰래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켜봤다.

사념은 경기장 밖에서 감지되었다. 방향을 보아하니 적랑의 저택 쪽 방향이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내가 무신의 성전 쪽에 갈만한 일은 적랑의 저택에 자러 가는 일밖에 없다. 그러니 아마 사념은 웬만하면 거기에 있는 게 맞을 거다.

‘근데 내가 적랑의 집에서 죽을만한 일이면….’

펀칭기에 뚫린 서류철 같은 내 모습이 자꾸 오버랩 된다. 불길한 상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적랑 쪽을 쳐다보기가 힘들어지는 건 물론이고. 경기도 하나 눈에 안 들어왔다.

“자네. 아까부터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내일 경기 생각해서 푹 쉬게.”

경기가 다 끝나고 적랑의 사택에 돌아왔을 때. 적랑이 나를 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어지간히도 동요를 숨기지 못한 듯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준 뒤. 적랑이 저택의 본채에 들어갈 때까지 대기했다.

그리고 허리춤의 랜턴을 다시금 발동시켰다.

‘정원 쪽인가?’

나는 적랑과 카르할라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정원으로 향했다. 잘 정돈된 나무들과 화단을 지나치자, 과연.

예상대로 내 시체가 정원 한 가운데 누워 있었다.

“워…. 이건 또 뭐야?”

왼쪽 가슴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깔끔하게 반갈죽이 된 나.

내 시체 보고 눈살 찌푸릴 짬은 지났다만.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상처가 워낙 특이하게 나서 그렇다.

혹시나 해서 차고 온 베스타크도 감탄한 듯이 부르르 떨렸다.

―왐마 X발. 겉바속촉이 돼버렸어 야…?

“내 말이요.”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전생의 나.

토막난 절단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있는 데다, 그 외에도 전신에 시커멓게 그을린 화상이 있었다. 근 4개월간 안 자른 머리카락도 홀라당 타서, 헤어스타일이 기상천외하다.

‘이상하다. 나 웬만한 화염으론 기스도 안 날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편. 서둘러 이자나미의 심장을 사념에 가져갔다. 궁금하면 빨리 기억을 회복하면 그만이니까.

우우웅. 불길한 공명과 함께 시체가 바스러진다.

“끄… 허…!”

나는 잠시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에 몸부림쳤고. 땅에 엎어져 떼떼굴 굴렀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0,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실전스킬 ― ‘스팅어’의 사용법을 터득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

그러나 고통이 멎은 뒤로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헤이 정용. 괜찮냐?

수호 형님의 걱정 섞인 목소리와 함께 베스타크가 낮게 떨릴 때까지.

난 그렇게… 랜턴이 뇌에 쑤셔 박은 새빨간 악몽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움직여야 돼!!”

나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이나 몸으로 학습했잖아. 그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려면! 내가 먼저 움직여서 변수를 없애야 한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

루시도 무신제 관중으로 참석시켜야 하고.

내일 있을 습격을 적랑에게 경고해야 하고.

마녀사냥꾼에 대한 것도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고.

제논이 그렇게 변한 이유와, 그 불길한 곡도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고….

‘제한시간은 고작 하루.’

내일 밤 카사스의 저택 습격 직전까지.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찢어질 것 같다. 이런 멀티태스킹은 자신없다. 막노동꾼이 천직인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거야 대체.

“일단 새로 배운 스킬!”

전생의 적랑이 내게 남겨주고 간 스킬. 무기에서 기탄을 발사하는 스팅어. 이 자리에서 마스터 레벨인 20까지 쭉 올려버렸다.

내가 불사교 노가다 사냥터(?)로 급속 레벨업을 한 케이스라, 지금 스킬포인트가 거의 120정도가 썩어나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뭐라도 더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찍은 것이다.

‘전처럼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솔직히 우선순위를 모르겠다. 뭘 먼저 처리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가까운 것부터 부딪친다. 모른다고 고민하고 있을 시간도 지금은 아깝다.

“아! 어디 갔다 온 게냐 용사! 이 시국에!!”

내가 좀 멍한 정신으로 적랑의 저택에 돌아왔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다름 아닌 루시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멱살을 붙잡더니. 마구 전후좌우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대체 어찌된 게야. 지금 시간이 회귀했다! 용사, 너 죽은 건 알고나 있느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냐?!”

“…….”

나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루시를 가만히 내려다 봤다.

말없이 한참 쳐다보던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영혼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 전생에서 넌 뭘 하고 있었냐.”

“어, 나? 나는… 그 파란 머리 계집과 얘기를 좀 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

“으엉? 무, 무슨 얘기는… 아, 알 것 없다!”

루시가 고개를 팩 돌리며 얼버무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좀 신경 쓰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대화의 내용이 아니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걸즈 토크라도 했나 보지. 저 루시가 그럴 위인 같지는 않다만.

‘파란 머리 계집. 세스나 말이군.’

그러면 오늘 밤에 항상 루시는 세스나와 대화를 하나? 속단은 이르지만, 일단 염두에만 두자.

나는 고개를 슬쩍 젓고는 다시 루시를 쳐다봤다.

“너. 습격이 있었던 건 기억하지?”

“… 습격? 그게 무슨 소리냐?”

오히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반문해온다.

나는 목소리만큼이나 힘없는 웃음을 실실 흘렸다.

“… 아니. 됐다.”

루시가 전전생의 야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지. 자고 있어서? 그럴 리가. 그 난리통에 깨어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 못해도, 야습이 있었다는 건 알아야 정상이다.

‘하나 밖에 없지.’

전에 케른에서 루시가 그랬듯. 이번에도 주술로 재워진 거다.

‘그래. 전처럼. 똑같이.’

불구덩이 속에 서있던 제논을 떠올렸다.

화마 속에서 더욱 새빨갛게 타오르던 그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전에 한 번 걸어봤는데 두 번째가 어려우려고. 어금니를 슬쩍 악물었다.

게다가 루시뿐만이 아니다. 이번엔 나도 같이 주술에 걸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죄다 죽어나가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내가 퍼질러 잘 리가 없다. 그나마 레벨이 높다보니 도중에 주술이 깨진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카사스의 사도라면… 얘를 가만 놔둘 리도 없는데.’

습격한 놈들이 카사스의 사도인 건 정황상 거의 확실하다. 그들에게 루시는 메인 타깃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부활했고. 시간은 돌아왔다. 이 말은 결국, 그들은 적랑과 공멸하느라 루시를 죽이는 데 실패했거나….

‘애초에, 죽이지 않고 생포할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그놈들이 루시를 사로잡기 위해 습격한 건지. 아니면 카르할라스가 말했던 대로 마녀사냥꾼들을 노리고 습격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전생의 일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 제나랑 제논을 찾아낸다. 그놈이 열쇠야.’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루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일단 됐어. 너는 좀 쉬고 있어라.”

나는 저택 안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대가리가 복잡해서 걸음걸이가 신경질적이다.

루시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퍼뜩 내 뒤를 따라붙었다.

“되긴 뭐가 되냐! 뭐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거라! 얼른!”

“일단 쉬고 있어.”

“웃기는 놈일세! 한낱 수호자 주제에 나한테 쉬라 마라….”

“쉬어.”

나는 발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틀어 루시의 진로를 막아섰다.

나를 올려다본 루시가 흠칫 발을 물렸다.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느냐.”

“…….”

저택을 뒤덮었던 새빨간 불꽃이 스쳐지나갔고. 무심결에 관짝소년단의 꿈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퍼뜩 상상이 됐다. 나는 루시가 말하는 ‘그런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놔라 새꺄. 내일은 땡깡 부려도 못 쉴걸.”

“…… 그래. 알겠다.”

루시는 무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대로 자기 방을 향해 걸어갔다.

꼬리가 원피스 밑으로 축 쳐져 흐느적거리고 있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아무 것도 얘기해주지 않아서 삐졌나 보다.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시에겐 전부 털어놨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순간 그런 생각이 훅 치고 들어왔지만. 나는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를 악물고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저택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나는 곧 적랑의 방문 앞에 섰다.

쾅쾅쾅! 격하게 문을 두들기며 목청을 높였다.

“적랑님! 적랑님 계십니까!”

적랑은 금세 방문을 열고 나를 맞았다. 방안에 랜턴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봐서, 아직 자고 있진 않았나 보다. 다행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슬쩍 틀어 올렸다.

“야밤에 무슨 일인가 정용 군. 눈빛이 살벌하군 그래.”

“… 아.”

나는 그제야 내가 너무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분한 적랑의 눈동자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적어도 격하게 몰아쉬던 숨은 조금 진정되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급하게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 *

다음날. 나는 어김없이 2일차 무신제 경기에 나갔다.

“기권하겠습니다.”

나는 이틀차 예선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기권을 때려 박았다. 전생에서 포티아와 만났을 때처럼.

이번에도 관중석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하라 그래라. 두 번째라 가렵지도 않다.

대전상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미미르의 눈으로 상태창만 훑어보고, 수상한 놈이 아니길래 얼굴도 제대로 안 봤다.

‘대기실에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티아도 못 찾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에 낙심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면, 기껏 1회전 칼서렌을 박은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조용히 눈을 빛내며 인파가 드글거리는 경기장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붙잡은 단서를 확실히 밝혀내는 게 먼저다.’

적어도 한 놈. 요주인물 하나는 확실히 알잖아.

두 번의 전생에 걸쳐 각인된 쇠긁는 숨소리를 떠올렸다. 이가 저절로 으드득 갈렸다.

‘다른 놈들 조사는 적랑에게 맡겼고.’

나는 지금부터 제논을 추적한다.

그 새끼가 왜 내 통수를 후려갈기고 카사스와 다시 함께하고 있는지.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그런 흉한 꼬라지가 됐는지. 전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 멸흉의 계승자.”

제논의 상태창에서 목격한 마지막 별칭을 입 밖에 냈다.

케른에서 확인했을 땐 분명히 없던 이명이다. 그 이명이 갖는 의미가 뭘까. 어쩌다 그런 중2병 감성 뿜뿜 돋는 이명을 획득했을까.

알아볼 게 태산이다.

‘현재로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새빨간 겁화가 이글거리던 외날 곡도.

그것이 제논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그 검의 정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단서를 찾아나가야 한다.

참고로 수호 형님한테는 이미 진작에 추궁해봤는데.

“아니 행님. 분명 그 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요. 나보고 상성이 안 좋으니까 도망치라 그랬다니까!”

―잉? 무슨 말이야 그게. 오빠 딱 말해. 설마 나보다 그년이 더 좋아진 거야?

“아유 씨벌 걍 나가 뒤지십쇼 형님.”

아는 게 없단다.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며 그 칼을 열심히 묘사해봤지만 결국 수확은 없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수호 형님이 직접 그 변모를 목격하기 전까진, 알아채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듯하다.

‘그나마 인맥이라도 있어서 살았지.’

나는 어젯 밤, 적랑에게 ‘사연 구린 무기’의 사정에 빠삭할만한 곳을 캐물었다.

적랑은 흔쾌히 크로스페이드 최대 규모의 정보상 겸 암시장 주소를 적어줬다.

‘… 카발리어가 왜 그런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마녀사냥꾼으로 활동하다 보니 필요했나 보지. 전에 긴급회의에서도 정보상을 운운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쨌든 이제 믿을 구석은 이것뿐이다. 나는 손아귀의 쪽지를 힘껏 쥐었다.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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