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홍련(紅蓮)
“옘병 X바! 뭔 일이야!”
나는 욕설을 터뜨리며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을 대충 추슬러 입고, 배낭을 멘 뒤 쌍검을 허리춤에 차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이게, 뭐야.”
새빨간 화마로 뒤덮인 저택의 광경이었다.
널찍한 정원에는 대량의 피가 흩뿌려져 있고. 그 위로 수십에 달하는 시체가 굴러다닌다. 하나 같이 검은 복면을 쓰고 로브와 복면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알고 있다.
오늘 무신제에서 봤던 복면의 도전자들이 딱 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사스…?”
놈들의 정체를 생각해 보다가 그런 추측에 이르렀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놈들의 상태창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미친 순간.
망가진 건틀릿이 나뒹구는 것이 시야 구석에 포착됐다.
익숙한 물건이다. 사고가 일순간 정지했다.
나는 시선을 좀 더 멀리 던졌다.
“… 아.”
부러진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대고, 온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진 적랑이 보였다. 그 옆에는 가슴이 걸레짝처럼 난자당한 채 널브러진 카르할라스도 있다.
그뿐인가. 등에 길쭉한 검이 박힌 채 숨을 헐떡이는 엘프리데도 있었다.
“늑대… 오빠아… 지켜줘야… 하는데에… 미안… 미안해애… 나, 때문… 에….”
엘프리데는 울먹이며 적랑에게 기어간다. 그녀가 기어간 자리로 붉은 피가 질척하게 늘어져 있었다. 새빨간 달팽이 같았다.
의미없는 짓이다. 그녀를 제외한 두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진 게 확실했으니까.
“아아.”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사지가 절단된 채 죽은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세스나의 시신을 발견했다.
뇌가 잠깐 생각을 포기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꺾었다.
“아, 아?”
나를 향해서 밝게 웃어주던 얼굴에 시뻘건 피가 한 가득. 로봇 주제에 생기가 가득했던 눈동자가, 정말 로봇처럼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화르륵, 불티가 눈앞으로 거칠게 흩날린다. 머릿속이 지글지글 타는 느낌이다.
‘… 루시는?’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런 의문보다 먼저 뇌리를 후려치는 질문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위를 살폈고. 루시의 행방을 찾았다.
‘없어.’
그러나 어디에도 루시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도망친 건가? 죽지 않은 건가? 아니. 그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은 건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정말 무엇 하나 알 수가 없다.
“아아.”
일단 그녀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한 편.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 이 끔찍한 상황의 실감이 서서히 발끝부터 들어차고 있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 아아…!”
악몽이라면. 제발 지금이라도 좋다. 깨라.
깨라고. 제발.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만해. 제발 깨줘.
나는 연신 얼빠진 탄성을 내지르며,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악몽을 한껏 만끽했다.
우스스. 거침없이 타오르던 저택의 본채가 새빨간 불티를 하늘로 쏟아내며 주저앉는다.
스으― 스으―.
그리고 아비규환으로 가득한 핏빛 정원의 한 가운데.
시커먼 복면과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하나. 유유히 홀로 서있다.
스으― 스으―.
특유의 쇠긁는 숨소리가 복면 안에서 새어나온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복면 속에서 번뜩, 예광을 발했다.
키이잉. 놈의 손에 들린 곡도가 낮은 울음을 토해낸다. 달빛과 화마로 일렁이는 검날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옥의 불꽃이라도 휘감은 듯한 모양새다.
스으… 스으….
복면 속의 기괴한 숨소리. 특이한 모양의 검붉은 곡도. 나는 저놈의 정체를 알고 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 제리… 레버논.”
아니. 아니다.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건 가명이다. 저놈의 이름은 제리 레버논이 아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다시 벌렸다. 전생에서 봤던 상태창이 머릿속을 덕지덕지 채워간다.
증오와 혼란에 찌든 목소리를 뽑아냈다.
“야 제논. 뭐하냐고 이 개새끼야.”
씹어뱉듯이 중얼거렸지만. 그는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대신….
“흡!”
카아앙! 가까스로 들어올린 베스타크가 놈의 일섬을 막아냈다.
막아냈다고 하기도 민망하다. 히어로 센스로 날이 선 본능과, 전생의 경험에 따라 타이밍 맞춰 검을 들었을 뿐이다.
“이… 씨… 파알!!”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는 아찔한 작열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새빨간 곡도의 궤적이 몸 주변을 아른거렸다. 거세게 타오르는 시뻘건 화염이 검의 궤적을 쫓아 공기를 새빨갛게 달구고 있다.
착각이 아니었구나. 진짜 검신이 불꽃에 휩싸여 있는 거였냐?
“이 새끼…!”
검을 통해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과 가공할 열파.
부딪친 반탄력으로 날아가기 직전. 나는 놈의 면상을 향해 왼손의 에스파다를 휘둘렀다.
“…!”
서걱. 놈의 복면이 반으로 두동강 났다. 얼굴을 살짝 베었는지 핏줄기가 터졌다. 팔랑거리며 날아간 복면 쪼가리가 화마에 삼켜진다.
복면이 벗겨진 놈의 얼굴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스으… 스으….”
산발한 시뻘건 머리칼 아래에 뾰족한 귀.
이성의 쪼가리도 느껴지지 않는 검붉은 눈동자. 시커멓게 물든 흰자위.
징그럽게 불거진 혈관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면상.
연신 쇳소리를 내뱉는 메마른 입술.
“…….”
나는 상판을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은 나머지, 결국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명칭: 제논]
[별칭: 163400157번째 정식 용사. 갈란 숲의 열 번째 아들. 지존. 멸흉의 계승자]
[LV. 137]
[체력: ???/??? ?마력: ???/??? ?신체상태: 광증, 잠식]
[힘: ??? ?민첩: ??? ?지능: ??? ?히어로 센스: 11]
X발. X같은 물음표 투성이다. 상태창이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내가 알던 그 새끼가 아닌 것처럼.
“스으… 스으….”
다른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제논의 팔이 곡도를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키잉―! 검날을 타고 타오르던 겁화가 더욱 새빨갛게 타오르며 일순 시선을 장악했다.
―뭐야. 저 칼이 어떻게 저걸…!
그 순간. 베스타크가 잘게 떨려왔다. 당황에 찬 수호 형님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다.
나는 그 순간에도 곡도에서 타오르는 검붉은 겁화를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야 정용아! 일단 X발 전속력으로 빤스런해라!! 저 새낀 너랑 상성이 너무 최악이야!
수호 형님이 다급하게 일갈했다. 평소 같은 장난기와 유유자적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나 역시 위험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히어로 센스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황급히 시선을 떼고,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스으―.”
그러나 다음 순간. 제논의 일그러진 숨소리가 짧게 끊어졌다. 나는 일순간, 놈과 눈이 마주쳤다.
뺨에 한 줄기 바람이 느껴졌다.
“쿨럭.”
나는 이미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불티가 흩어지는 밤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놈이 내 몸을 가르고 지나친 것이다.
“…….”
제논이 대체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저리 강해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방금 건 분명 막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일격을 제외하면, 못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반응할 수 없었던 이유?
완전히 맛이 간 제논의 눈과 마주친 순간, 온몸을 끈적하게 속박하는 압도적인 공허와 허탈감. 그것이 결정적 순간에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허억… 커억….”
나는 쓰러진 채 시선을 내렸다. 대각선으로 길게 갈라진 내 상반신이 보였다.
갈비뼈와 내부 장기까지 그대로 토막난 상처였지만. 피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절단되자마자 살갖에 작렬하는 불꽃으로 바싹 지져졌기 때문이다.
“너, 이….”
나는 표독스럽게 제논을 노려봤고. 제논은 그런 내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리라.
“내가… X발. 조심, 하라고… 분명… 커헉.”
최후의 일침이라도 날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말을 할 때마다 끓는 듯이 뜨거운 각혈을 토해냈다.
나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비틀어 비웃음을 만들어냈다. 궁지에 몰릴수록 내가 더욱 그렇듯이.
“대가리. 딱 대고, 기다려라… 이, 개색….”
비웃음은 머금었지만. 흘러나오는 말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서걱. 내 욕은 완성되지 못했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21일, 20시 58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수도 크로스페이드, 무신의 투기장]
“난 거짓말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네.”
적랑이 나지막이 남긴 한 마디가 멍한 머리로 윙윙 울렸다.
와아아― 하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그것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
풀려버린 두 눈은, 시야를 가득 메운 회귀점 갱신 알람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어… 이, 일단 갱신.’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는 파우치를 뒤졌다. 익숙한 그립감이 느껴진다. 나는 망자의 함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우웅, 우웅. 음울한 보랏빛을 무럭무럭 뿜어내는 망자의 함이 보였다.
[아이템 정보]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 제발.’
옘병. 또냐? 지금 ‘그 상황’이야?
한참 후에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망자의 함을 열어봤다. 아까 넣어뒀던 도전자 확인증과 함께, 쪽지 하나가 들어있다.
[데스카운트: yee (2라는 뜻)]
쪽지엔 떨렁 그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나는 기가 찬 나머지 한숨을 흘렸고.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심지어 두 번째냐….”
그 와중에 개드립을 섞어 넣는 내 전생이 레전드다. 미친 1류 새끼.
나는 실실거리며 데스카운트를 ‘3’으로 고쳤고. 고친 쪽지를 망자의 함에 넣었다.
우우웅. 망자의 함은 언제나처럼, 불길한 보랏빛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