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춤춰라 관짝소년단
적랑의 저택 창고 안의 음습한 한 구석.
나는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시신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명칭: 그렉 마렌트]
[별칭: 117153882번째 정식 용사. 카사스의 사도. 셀피 헬만. 달인]
[LV. 321]
[체력: 0/2360 ?마력: 0/1100 ?신체상태: 사망]
[힘: 452 ?민첩: 519 ?지능: 101 ?히어로 센스: 13]
“이 새끼 이름은 그렉 마렌트입니다.”
내가 붙을 뻔했던 포티아를 예선전에서 죽이고, 적랑을 습격했다는 이의 본명이다.
외관은 적랑이 설명해준 것과 거의 비슷했다. 수염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적랑과 비슷한 중년이었고. 키가 굉장히 크고 근육으로 뒤덮여 체격이 우람하다.
게다가 레벨 역시 적랑이 짐작한 그대로다. 300대 초중반이 맞았다.
―저 양반 개소름 돋네. 싸워 보면 레벨 견적이 딱딱 나와? 간지 좀 난다?
인간 스카우터를 자부하는 수호 형님도 감탄한 나머지 중얼거릴 정도였다. 남들 안 보이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줬다.
그 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적랑이, 이내 주위의 마녀사냥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렉 마렌트란 이름을 철저히 조사한다. 가용한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말도록. 움직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녀사냥꾼의 일원은 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엘프리데만이 “역시 너무 멋있어!!”라며 발광을 하긴 했지만. 적랑이 힘줘서 노려보자 금방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날카롭게 빛나는 적랑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럼 가지. 무신의 투기장으로.”
“… 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혹시라도 카사스의 사도 쪽에 움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유야 어쨌든 잠입 액션 영화 같아서 좀 설렜다.
그리고 경기장에 도착한 적랑은 모든 경비병력들을 빠르게 물려냈고. 그 사이 나는 드디어 33번 경기장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 후. 이건 몇 번을 해도 극혐이네 진짜.’
나는 토막난 내 시체를 훌쩍 뛰어넘고. 천천히 투기장 중앙에 다가갔다. 음울한 핏빛을 흩뿌리는 마법진 앞에서 잠깐 몸서리를 쳤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단숨에 이자나미의 심장을 마법진에 갖다댔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두근. 심장이 일순간 요동치며, 기억의 격류가 머릿속으로 쏟아진다.
잿가루가 된 전생의 시체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0,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아아악!”
적랑이 옆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참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리를 옥죄는 고통 때문이냐고?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괴롭힌 것은….
‘세상 X바! 이게 뭔 개쪽이야!!’
도발대사 찍찍 싸다가 한 방에 모가지가 썰려버리는, 상상 그 이상으로 개추한 행보를 보여준 전생의 나.
그것이 제1의 충격이었고.
‘이, X발… X발! 거기서 왜. 그 이름이….’
마지막의 마지막 기억 속에 각인된 대전 상대의 본명.
상태창 속 얼핏 보인 이름이 제2의 충격이었다.
“아니, 괜찮나 정용군? 갑자기 왜 그러나!”
여러 모로 충격을 받아 발을 동동 굴러대던 내게 적랑이 달려왔다.
걱정이 담긴 시선을 눈에 담고서야 나는 발광을 멈췄다. 황급히 머리를 세차게 젓고 정상인 코스프레를 시도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가시죠.”
“음? 용건은 벌써 끝났나?”
“예. 알아낼 건 다 알아냈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신속하게 경기장을 빠져나왔고. 적랑은 경비들을 다시 원위치 시킨 뒤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 나는 복잡하게 꼬여가는 머리를 정리했다.
‘일단 날 죽인 놈은… 기억났다.’
복면을 쓰고, 카타나와 비슷하게 생긴 곡도를 사용하는 자. 가명은 ‘제리 레버논.’
어차피 한 번 정한 가명은 본선전이 끝날 때까지 써야 한다. 아마 내일 시합에서도 그 새끼는 똑같은 가명, 그리고 똑같은 무기로 출전할 거다.
‘근데, 대체 왜 그런 상황이?’
죽기 직전에 봤던 상태창이 계속 오버랩된다.
혼란과 의문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어쨌든 지금은 고민이나 할 때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조치를 해놓는 수밖에.
“적랑님.”
나는 저택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를 불렀고. 적랑은 곧장 반응해 나를 돌아봤다.
“왜 그러나.”
“아까 경기장에서의 작업으로 숨어든 놈을 하나 더 알아냈습니다.”
적랑이 눈이 부릅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누구인가.”
잠시 고민했다. 본명을 말할까. 아니면 말하지 말까.
나는 적랑을 어디까지 신뢰하고 있지? 그리고 나는, 그에게 어디까지 신뢰받고 있지?
… 치열한 고심 끝에 결정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512번 도전자. 제리 레버논을 조심하세요. 그놈은 정말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니?”
“일단 저랑 동등하거나, 그 이상은 됩니다.”
모 카피닌자 선생을 연상시키는 한 마디.
적랑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언제나 보여주던 야수 같은 미소 대신 석상 같은 무표정이 떠올랐다.
심장이 얼어붙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적랑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흥미가 동하는군. 말해줄 수 있나?”
“…….”
말해줄 수 없다.
이유는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러려면 시공회귀와 루시의 정체를 밝혀야 하고. 결국 적랑의 건틀릿이 내 뱃가죽을 뚫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다물고 모르쇠를 시전하자, 적랑은 입술을 비틀어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자네와 겪었던 오늘 일들이 없었다면. 방금 전 침묵에 주먹으로 대답했을 지도 모르네.”
“… 하하. 재, 재밌는 농담이시네요.”
실실 쪼개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건 농담이 아니다.
얼른 말하라는 압박이 반. 그리고 말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배신이라도 하지 말라는 협박이 반씩 섞인 말이다.
“밤도 깊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게.”
적랑은 이내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했는지 먼저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아쉬움과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자네가 말한 자에 대해선 내일부터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천만에. 오히려 내가 고맙군. 모쪼록 내일 패자부활전, 주의하도록 하게.”
“네.”
나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나도 대문을 열고 내 방으로 흐느적거리며 들어갔다.
털퍼덕.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피곤함이 노도처럼 몰려왔다.
눈이 감긴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
가슴을 옥죄는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잠깐 뒤척인 뒤에야 간신히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나는 꿈을 꿨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어떻게 꿈인지 아냐고? 펼쳐진 광경이 너무 초현실적이어서 알게 됐다.
웬만한 비현실은 그러려니 할 꿈속의 나라도 ‘아니 이건 좀…’ 싶을 정도였다.
“…….”
“…….”
나는 지구 시절의 자취방 한 가운데 멍하니 서있었고.
창밖을 쳐다보니, 검은 상복 빼입고 썬글라스를 낀 흑인 형아가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현관문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은 칠흑 같은 어둠만 펼쳐져 있다.
“… 관짝소년단?”
그리고 어둠 한 가운데에는 상복을 입은 흑인 형아 6명이, 거대한 관짝 하나를 메고 있었다.
아아, 어디선가 익숙한… 매우 익숙한 EDM이 자동적으로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뚭 뚜두 뚭둡, 뚜두둡 뚜두두둡.
둠칫둠칫, 관짝소년단 6명이 조금씩 어깨를 으쓱였다. 흥겨운 탭댄스를 밟기 시작한다.
와아아아!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환호하며 떠들썩해졌다. 얼굴들을 보니 하나 같이 내 이세계 지인들이었다.
뭐야. 이 새끼들은 언제 생겼어.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그들이 일제히 관짝소년단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얏후!”
할센베르크 변경백이 발랄한 탄성과 함께 관짝으로 펄쩍 점프한다.
관짝은 변경백을 쑤욱 집어삼켜버렸다.
“하와왓 엣큥!”
다음은 적랑이 군필여고생 같은 탄성과 함께 관짝으로 점프했다.
관짝은 적랑을 쑤욱 집어삼켜버렸다.
“아하악! 늑대 오빠아! 나도 같이이… 커헉!”
엘프리데도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붙었으나. 적랑이 싸대기를 풀스윙으로 갈기자 튕겨 나왔다.
“아하하! 정용님! 인생은 야스예요 야스!”
세스나가 알아 처먹지 못할 말과 함께 관짝으로 뛰어들었다.
관짝은 세스나를 쑤욱 집어삼켜버렸다.
“오오 사랑하는 그윈! 당신의 이름은 왜 그윈인가요??”
“작가가 소울류 빠돌이 새끼라 그렇소!”
그윈과 레이라도 알아 처먹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더니. 서로 꽉 부둥켜 안고 관짝으로 뛰어들었다.
관짝은 두 사람을 쑤욱 집어삼켜버렸다.
“아핳! 넘모 즐겁다 아스타르트!”
“나… 도오… 즐… 겁… 다아….”
아스타르트의 파편과 설백이 손에 손잡고 폴카 댄스를 추면서 관짝으로 다이빙한다.
관짝은 설백과 아스타르트 파편을 쑤욱 집어삼켜 버렸다.
“뛰어 이 늙은 개구리야!”
“이런, 늦었다!”
“다 비켜라 비실이들아!”
시험의 장막 개노답 삼형제. 알드콘과 스칼로, 크라네이드도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다.
관짝은 개노답 삼형제를 쑤욱 집어삼켜버렸다.
“아니, 뭐야. 뭔데.”
그렇게 관짝 안이 좋아?
뭐가 있길래 뛰어드는 거야.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그러기야?
나도 EDM의 흥겨운 리듬에 맞춰 점점 관짝소년단을 향해 걸어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덜컹거린다. 천천히 걸음이 빨라진다. 폭주기관차처럼. 이제 나도 막을 수 없다.
덥석. 누군가 뒤에서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 루시.”
루시였다. 그녀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젓고 있었다.
입을 앙 다물고. 할 말이 많은 표정.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관짝소년단 흑인 형아들의 덩실덩실 춤사위가 점점 어둠 너머로 사라진다. EDM소리도 멀어진다.
필설로 형용 못할 루시의 표정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 *
―야 정용아! 정용! 박정용! 좀 일어나 새꺄! 왜 이리 안 깨냐 이새끼 이거!!
내 선잠을 깨운 것은 머리를 직접 울리는 수호 형님의 목소리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응커?”
―야! 밖에! 밖에 좀 봐봐! 아까부터 심상치가 않아!!
머리가 비몽사몽하다. 그런 와중에 본능은 내 손을 자연스럽게 베스타크의 손잡이로 끌고 갔다.
나는 머리를 마구 휘저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고. 이내 사방을 둘러봤다.
“…… 어?”
가장 먼저 얼빠진 탄성이 흘러나왔다.
창밖은 물론이고, 사방이 새빨갛다. 일렁거리는 붉은 빛이 타닥, 타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거칠게 집어삼키고 있다.
사방에 자욱한 연기 때문에 숨쉬기가 어렵다. 나는 코 주변을 소매로 가렸다.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직감했다.
‘이거…?!’
불이다.
적랑의 저택에 화재가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