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뜻밖의 습격
회의가 우여곡절 끝에 종료됐다.
나는 하품을 하며 적랑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유 씨바. 졸려서 기절하는 줄 알았네….”
사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크라네이드와 대화하러 달려갔었다.
당연하지. 거기 있던 누구보다 내가 제일 궁금했을 거다. 대체 왜 당신이 용제국 귀빈씩이나 돼서, 하품 쩍쩍 하며 거기 앉아있는 거냐고.
‘용기사 여자들이 접근도 못 하게 막아서 결국 대화도 못했고.’
크라네이드도 굉장히 아쉽다는 얼굴로 항의했지만, 용기사들의 기세가 워낙 서슬퍼래서 찍소리도 못하더라. 보아하니 끗발이 용기사 여자들보다 낮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눈빛만 교환하고 대화는 다음으로 미뤘다.
‘적랑은 엘프리데한테 갔고….’
적랑은 엘프리데의 대가리를 쪼개겠다며 나를 먼저 보냈다.
나중에는 엘프리데가 달려드는 적랑을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오히려 적랑이 기겁하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오늘 회의는 한참을 이어졌지만. 뭐 이렇다 할 결론도 나온 게 없이 끝났다.
“지리멸렬하구만.”
나온 게 있다면 ‘늙은이들이 싸우면 저렇게 추하구나’하는 소소한 깨달음 정도다.
그 전까진 나름 진중한 분위기였는데. 세계관 최강자들이 아가리 배틀에 들어가자,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한민국 정치판으로 변해버렸다.
뭐어, 정치판이 원래 그런 거지 싶다.
‘베르켈 쪽은 한사코 현상유지를 원하고. 적랑은 한사코 마녀척결을 원하고 있으니.’
가만 있기도 뭐해서 나도 열심히 토론에 참여했다. 내가 케른에서 겪었던 일을 대부분 보고했고. 대책이 필요함을 호소했다.
‘카사스의 사도’라는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
불사교는 이미 그놈들의 흑마법으로 이용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까지.
그 결과. 솔직히 적랑이 왜 그렇게 베르켈을 삐딱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용사 박정용 군. 미텔란트의 오랜 고름인 엘더리치에 이어, 불사교를 저지해준 자네의 공적을 폄하하는 건 아니네만.”
“지금껏 수면 위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조직이 사실은 불사교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겐가? 비약이 너무 심하군.”
“칠마존은 세치 혀에 움직일 정도로 가벼운 자리가 아닐세. 그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가져오시게.”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행색. 생판 남의 일 전해듣는 양 묵살로 일관하는 베르켈.
거기서 끝이 아니다.
“엘더리치 슬레이어. 나는 자네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다네. 자네가 불사의 마왕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도는 건 알고 있나? 그것부터 해명해 보는 게 어떤가.”
아니나 다를까 예민한 그 문제가 거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칠마존들은 물론이고. 운터란트와 용제국… 심지어 백은의 기사와 황금의 기사도 말만 안 했지, 그 말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나는 그쯤에서 꼬리를 말고 아가리를 묵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 자네의 유익한 고견. 아주 잘 들었네. 박정용 군.”
그 와중에 유일하게 내 증언에 격하게 동의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적랑이었다.
혼자 내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솔직히 좀 빡치네.’
비약은 X발 병아리 우는 소리가 비약이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내가 케른에서 겪었던 수많은 죽음을, 그 노망난 호구와트 노친네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 늙은이가 한국인이면 ‘비선실세’라는 단어로 비벼서 설명하겠는데. 이곳의 빈약한 어휘로는 카사스와 불사교의 관계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길이 없으니, 원통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이로서 확실해졌다.’
카사스의 사도. 그놈들을 제거하는 데 세계 유력자들의 도움을 바라는 건 쉽지 않다.
내 선에서 어떻게든 처리하거나.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건 당연히 이번 무신제에 얽힌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근데 그런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가장 믿을만한 적랑도, 루시 문제 때문에 반신반의 하는 상황이니 원.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무신의 성전 가도를 걸어갔다.
그러자니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용 군. 여기에 있었나! 다친 데는 없나?!”
누군가 다급하게 날 부르고 있었다.
적랑이었다. 그가 서슬퍼런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어, 일은 벌써 끝났습니까? 갑자기 저는 왜….”
말하다 말고 나는 숨을 삼켰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적랑의 복부에 향했다.
나도 모르게 좀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배는 어쩌다 그랬습니까.”
적랑의 하복부에 옅은 상흔이 있었고. 그 주위가 피로 흥건하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이제 보니 차려입은 의장복도 온통 새빨간 핏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적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네. 일단 좀 같이 가지!”
적랑이 내 소매를 덥석 붙잡더니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어, 하는 탄성과 함께 그대로 끌려갔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그 피는 뭔데요? 다치신 겁니까? 어쩌다?”
“…….”
미치겠네. 뭐 대답을 해줘야 말이지. 나는 답답함에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적랑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질질 끌려가던 나는 덩달아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적랑님?”
내가 퍼뜩 불렀지만. 적랑은 눈앞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볼 뿐이다.
“뭘 보시는….”
나도 멍하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사람 여럿이 우리 앞길을 막고 있었다. 총 다섯 명. 무신제에서 숱하게 봤던 복면을 쓴 채 각종 무기들로 우리를 겨누고 있다.
딱 봐도 우리한테 좋은 뜻을 품고 있어보이진 않는다.
‘미미르의 눈.’
나는 설마설마 싶은 마음으로 놈들의 정보창을 띄웠다.
[명칭: 헨릭 에코스]
[별칭: 98593375번째 용사. 소황의 붉은 매. 카사스의 사도. 투사]
[LV. 305]
[명칭: 탈리크]
[별칭: 131485563번째 용사. 카사스의 사도. 달인]
[LV. 259]
[명칭: 잭 페퍼]
[별칭: 135587692번째 용사. 카사스의 사도. 달인]
[LV. 288]
레벨과 능력은 제각각이지만. 5명 모두 카사스의 사도라는 이명이 붙어 있다.
냉수 한 사발 들이 부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뭐야. 그쪽에서 찾아와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곧장 쌍검을 빼들고 놈들을 겨눴다. 자연스럽게 파우치를 뒤져 에테르부터 빨아재꼈다. 몸이 빨강, 초록, 그리고 노랑으로 번쩍이며 신호등 박정용이 완성되었다.
철컹! 옆에서 적랑이 무겁게 잠긴 얼굴로 건틀릿의 파일벙커를 장전했다.
“… 두 놈은 부탁하네. 셋은 내가 맡지.”
“예.”
우리는 짧은 상의를 마치고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퍼엉! 석재 바닥이 터져나가며 놈들의 복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서걱! 내가 지나친 궤적으로 괴한의 팔 하나가 날아다닌다. 그것이 시야에 스친 순간, 다시 등을 돌아 스킬을 영창했다.
‘연화.’
서석! 당황하는 놈의 뒤로 접어 들어가,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쑤우욱. 칠흑의 베스타크가 놈의 목을 가볍게 뚫고 들어간다. 사람 하나를 죽였다는 촉감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크르르륵…!”
피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검을 팽개친 채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콰과앙! 무형의 충격파가 내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창을 든 괴한이 보였다.
자세를 보아하니, 놈이 찌른 창에서 나온 무언가가 나를 덮친 듯하다.
‘세븐 소드 피어스.’
나는 스킬을 영창해 괴한의 사방으로 마력검을 날렸다. 그러나 채채챙! 괴한이 곡예처럼 유려하게 휘두른 창에 허무하다 싶게 막혀버렸다.
‘이놈 봐라.’
좀 하는군. 나는 가소롭게 웃으며 스킬을 연발했다.
파바바박! 30줄기 가시로 변한 망토자락이 놈에게 일제히 날아갔고. 동시에 마력검들이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하아압!”
괴한이 기합을 일발했다. 동시에 창을 풍차처럼 돌려 가공할 칼바람의 장막을 형성해냈다.
파사삭! 가시는 속절없이 찢어져 나갔고. 마력검은 궤도가 강제로 틀어져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재롱 좀 부린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이미 연화를 사용해 놈의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퍼어억! 놈의 가슴에 베스타크의 날끝이 불쑥 솟아났다. 핏줄기가 하늘을 향해 터져나왔다.
“크욱…! 이, 럴…!”
당황에 찬 신음이 들린다. 반응조차 못한 것이 억울한 거겠지.
억울할 거 없다. 내 공격은 기습과 암습에 특화돼 있다. 첫 공격에 한해서 ‘눈보다 빠른 손’, ‘강맹한 기습’ 등 수많은 패시브 스킬이 터질뿐더러. 후방에서 공격하면 가공할 스피드와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는 ‘후방타격’ 스킬도 있다.
세븐 소드 피어스나 지뢰진 등으로 주의를 분산.
잠입과 연화로 후방을 점하고 후방타격으로 마무리.
이 공격 연계는 할센베르크 성에서부터 애용해 왔는데. 아직까지도 단일 개체 대상으론 최대 공격력을 뽑아내는 필살의 웜보콤보다.
‘적랑 쪽은….’
그리고 내가 두 놈을 처리하고 적랑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뿌각!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뭔가 하니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괴한이었다. 이미 사람이었다는 형체조차 거의 남지 않게 피떡이 되어 있었다.
“… 워우.”
적랑을 눈에 담은 나는 그런 탄성을 흘렸다.
아스라한 달빛 아래. 한 손에는 죽은 괴한의 목을 틀어쥐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쓰러진 괴한에게 먹일 주먹을 장전한 상태였다.
“보나마나 사로잡아도 자살할 테지. 구태여 살리는 수고는 덜겠군.”
적랑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괴한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무형의 파동이 주먹을 중심으로 쐐기처럼 쏟아져 나갔다. 주변 공기가 요동쳤고, 지면이 뜯겨나가며 움푹 파인다.
“끄…!”
푸확! 충격파에 얻어맞은 괴한은 비명을 내지르다가, 이내 온몸이 짓뭉개지며 폭발해 버렸다.
후두두둑. 사산(四散)한 괴한의 육체가 비처럼 사방으로 쏟아졌다.
“…….”
적랑은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혈향이 자욱한 빗속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띠리링, 하는 효과음과 함께 내 앞으로 패널 하나가 올라왔다.
[스킬 발동: 프로메테우스]
[복제 대상: 명칭 ― 베르슐츠]
미네르바에게 받았던 특전 스킬.
남의 스킬을 보는 것만으로 내 것으로 훔쳐오는, 졸렬 맥스 카피닌자 전용 스킬. 프로메테우스가 오랜만에 발동된 것이다.
‘변경백 이후로 처음이군….’
나 이 스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잊어먹을 뻔했다. 남의 스킬 쌔벼오는 게 원체 오랜만이어야지.
나는 탄성을 흘리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패널에 시선을 박았다.
[스킬 ‘스팅어’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스킬 상세: 무기에 마력을 응축하여 기탄(氣彈)의 형태로 발사한다. 공격력은 메인 스탯과 마력량, 연계스킬 ‘기공술’의 숙련도에 비례한다.]
프로메테우스 스킬이 카피를 성사하려면 꽤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로 내가 마법계가 아니다 보니, 마법이 아닌 육탄계 스킬이어야 하고. 둘째로 내가 흉내낼 수 있는 발동 원리를 가진 스킬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셋째.
나 자신이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강렬한 동경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
적랑. 여러모로 아직 수수께끼가 많은 사람이다.
본인을 마녀사냥꾼이라고 어필하고 다니며, 가끔씩 우수에 차서 무표정을 지을 때는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었나?’
시체와 피가 낭자한 무신의 성전의 가도 한복판.
수라도 한 가운데 고고하게 서있는 그 모습은, 본인이 말했듯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아수라 그 자체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오지게 간지나는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