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정치판은 어디든 개판이다
국빈회의의 정식 명칭은 ‘파라이소 4국 불사의 마녀 재난 정기 대책회의’다.
마왕출몰이나 불사교 등등. 마녀 디아나 관련 재난대비책을, 혈맹을 맺은 네 나라가 정기적으로 회의하는 건데. 원래 1년에 한 번씩 시계방향으로 개최국이 변하고, 무신제가 있는 해에는 마르크트레스에서 열린다.
어쨌든 내가 봐도 명칭이 너무 길다. 그래서 그냥 ‘국빈회의’라고 줄여서 부른단다.
내가 적랑과 카르할라스에게 주워 들은 건 여기까지고.
“… 크흠.”
“… 허흠.”
“… 으흐흠! 크흠!”
그 회의의 분위기는 지금 직접 겪고 있는데.
무겁다. 졸라리 무겁다. 숨 쉬기가 괴로울 정도다.
“에효.”
원래부터 이렇게 줄초상 분위기였냐고? 그건 또 아니다.
지금 이렇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만든 건 내 옆에서 이죽거리는 적랑. 그리고 새하얀 원탁의 반대편에 앉아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백발 성성한 흑백 로브의 노인.
이 두 사람이 원흉이었다.
“허헛. 역시 적랑은 이런 데 데려오면 안 됐나?”
“내가 뭐랬냐 황금. 저 양반은 없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까.”
“저 정도로 과민반응할지는 몰랐지. 백은.”
내 옆에서 두 청년이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30대 초반 정도의 외모이고. 한 명은 번쩍이는 금색 경갑, 그리고 한 명은 맨질거리는 은색 경갑을 입었다.
둘 다 푸석한 백금발 곱슬머리에 녹색 눈. 쌍둥이인지 생김새가 거울 보듯이 똑같다.
‘백은의 기사 기드나 폴. 황금의 기사 에오스 폴.’
이번 국빈회의에 적랑과 함께 마르크트레스 대표로 참가한 두 카발리어다. 베르슐츠를 ‘적랑’이라 부르듯, 얘네는 황금, 백은으로 부르더라.
아무래도 이명으로 부르는 게 카발리어 전체의 관례인 듯하다.
“베르슐츠 경. 그대는 예의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그리고 흑백 로브에 백발 성성한 노인… 이름이 베르켈이었나?
미텔란트의 칠마존인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적랑을 향한 가시 돋친 언사였다.
그래. 화날 법도 하다. 시비는 적랑이 먼저 털었으니까.
나는 방금 전, 적랑의 급발진 비난쇼를 떠올렸다.
“마녀 같은 건 이제 안중에도 없어지셨다? 아무렴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미텔란트 왕성에 틀어박혀서 돼지새끼마냥 잘 처먹고 잘 싸셨으니. 사람들이 뒤져나가든 터져나가든 뭐 알 바겠습니까. 어디서 축사냄새 올라오지 않습니까? 베르켈 경.”
이상. 적랑이 베르켈에게 던진 폭탄 발언의 전문이다.
베르켈은 “마녀 추종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으니, 지금은 얌전히 동태를 지켜볼 때다.”라고 말했을 뿐인데. 그 대답이 저거였다.
장내가 갑분싸가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떠올려도 그 순간은 아찔하다.
‘뒷담화 같이 할 사람 필요하다는 게 구라가 아니었네 X발….’
그렇다고 공식 석상에서 욕을 저리 싸박을 줄은 몰랐지. 그것도 남의 나라 귀빈한테.
‘애초에 뒷담화도 아니잖아.’
대놓고 앞담화 하고 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추임새 넣으라고?
적랑님. 아무리 마녀 때문에 네 나라가 굳건한 동맹을 맺었다지만… 전쟁은 생각보다 시답잖은 이유로 일어나는 거 아십니까?
“저, 아니 그, 스승님…! 체통 좀… 이, 이제 고정하세요…!”
그렇게 말한 것은 베르켈의 옆에 자리한 타오르는 붉은 머리의 여인. 칠마존 베라였다. 베르켈과 함께 무신제의 개회식에서 마법곡예를 했던 그 여자다.
그녀는 안절부절하며 베르켈을 위로하기 바빴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는 게 심히 눈물겹다.
그런데 의외로 그게 먹혔는지, 베르켈의 노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후우…. 그래. 예의도 모르는 잡종개새끼에게 흥분하는 것도 이상하지.”
“그, 그래요. 스승님이 세계평화를 위해 누구보다 힘쓰는 건 제가 잘 아는 걸요!”
베라가 어색한 애교까지 부리며 연신 맞장구를 쳐줬다.
너도 고래 싸움 속 새우 포지션이구나. 나도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제가 조만간 저세상 갈 노친네한테 예의 차려 뭐합니까.”
방금 이건 적랑이 곧 죽어도 안 진다고 내뱉은 거다. 선 오지게 넘네 이 양반. 줄넘기 챔피언십이냐고 야발.
베라의 고군분투로 간신히 누그러지던 베르켈의 안면은 당연히 굳었다.
“지금 뭐라 했나?”
“예의 말고 제사상이라면 차려드린다 했습니다.”
“이놈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다만 마르크트레스엔 돼지를 장례 치르는 풍습이 없으니, 죽을 때다 싶으면 꼭 미텔란트로 초청해 주시지요 베르켈 경.”
적랑님. 지금 발언은 한국이었으면 나X위키에 적랑/사건사고/논란 항목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드립이었습니다. SNS가 당신 얘기로 불바다가 됐을 거예요.
“쓰읍.”
내가 한숨 쉬는 것과 동시에, 신경을 단숨에 사로잡는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히히. 이럴 줄 알았어. 느, 늑대 오빠는 마녀 얘기만 나오며언… 어엄청나게 흥분한다니까아. 회, 회의가 진행이 안 되네에.”
베라의 옆에 앉아있던, 흑발청안에 시커먼 로브 차림의 여인이 낸 목소리다.
나이는 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됐을까.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눈에 띄게 왜소한 체형과 엄청 짙은 다크서클이 인상 깊다.
적랑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한 마디 찍 내뱉는다.
“넌 다물고 있어라 엘프리데. 입 열면 대가리를 쪼개버리겠다.”
“으, 흐… 히히. 느, 늑대 오빠는 오늘도 무섭네에… 진짜아, 박력 있어서 너무 멋져어.”
“닥치라고 두 번째 말한다.”
칠마존 엘프리데. 저주술과 고대 흑마법에 통달한 마법사. 그리고 적랑의 오랜 지인. 무려 설백의 반지에 걸린 주술을 풀어준 당사자가 바로 그녀다.
엘프리데는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며 적랑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늑대 오빠아… 여, 여기는 내 얼굴을 봐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게… 어때애?”
“네 X같은 면상을 보면 더 화가 나겠지. 농담이랍시고 씨부린 건가?”
“아하악…! 조, X같은 면상이라니이… 한창 때 여자한테 너무해애….”
적랑의 반응은 한사코 싸늘했다.
엘프리데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훔치는가 싶더니. 이내 희열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그래서 좋아!! 온몸이 짜릿해져! 으햐악! 역시 나랑 결혼하자 늑대 오빠아아!!”
승리의 더블 피스를 만들며 황홀경에 빠진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적랑이 똥씹은 표정을 짓는 건 물론이고. 주변의 칠마존들도 조금씩 그녀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나는 목소리를 죽여 적랑에게 슬쩍 귓속말을 날렸다.
“평소에도 적랑님한테 저럽니까?”
“평소엔 더 심하다. 공석이라 자제하는 것 같은데.”
“오우야.”
아까 회의에 들어오기 앞서 적랑 가라사대. ‘칠마존은 일단 다 미친놈’이라 했다.
지금 모인 세 명에 대해서 적랑은 이렇게 평가했다.
―베르켈은 마녀가 세상 두 쪽 내도, 마법연구 밖에 관심이 없는 마법광이다.
―베라는 100살 차이가 나는 스승에 대한 애착이 비정상적이다.
―엘프리데는 그냥 보면 안다.
이제 회의 시작한지 30분 정도 지났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적랑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나는 통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상대적으로 조용한 테이블의 두 측면을 쳐다봤다.
“저 두 쪽은 아까부터 통 말이 없네요.”
내가 쳐다본 것은 바로 운터란트와 용제국 케나인의 국빈들이 앉은 장소였다.
적랑도 그들의 면면을 흘깃 보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어제도 똑같았다. 관심이 없을 법도 하지. 저 두 나라는 상황이 특수하니까.”
“흐음.”
나는 탄성과 함께 인물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운터란트 쪽은 새파란 단발에 흰 가운 차림을 한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하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얀 가운에 안경을 쓴 공돌이풍 남자가 하나다.
‘여자가 나이트레아. 남자는 잭 오스올드였던가.’
여자 쪽은 공중 요새이자 운터란트의 수도 ‘레비아탄’을 제작 총괄한 기술부 장관. 그리고 남자 쪽이 그 레비아탄의 실질적인 설계와 건조를 맡은 지휘자라고 했다.
놀라운 점이 있다면. 상태창을 확인해봤더니 둘 다 용사가 아니다. 터무니없이 약해 빠진 이 세계의 원주민들이었다.
―운터란트는 다양한 세계 용사들의 기술력을 마도공학과 융합시켜, 독자적인 기술을 발전시킨 나라일세. 강력한 무장으로써 자주국방을 꾀했지.
나는 적랑이 들려줬던 운터란트의 정보들을 떠올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승리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그 결실이 개회식에서 보여줬던 기계식 비행편대와, 요새화된 비행도시 같은 것들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용사들의 정치계 침식율(?)이 가장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고.
“흐음.”
둘 다 아가리 묵념하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중요 인물인 건 확실하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뇌리 한 구석에 잘 각인시켜뒀다.
‘그리고 저쪽은… 허. 참내.’
반대편인 용제국 쪽을 쳐다봤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인생사 한치 앞을 모른다고, 기가 막혀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목격한 것인가. 저쪽에서도 알아보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
안 그래도 체구가 우람한데 고목나무 같은 팔을 마구 흔들어대니.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목이 살짝 쏠렸다.
적랑도 그 중 하나였다.
“자네. 용제국의 사절과 아는 사이인가?”
적랑이 조금 놀랐다는 듯이 물어봤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좀 친했죠.”
“놀랍군. 대체 언제 친해졌나? 그럴만한 틈도 없었을 텐데….”
“언제냐면….”
볼을 긁적인 나는 다시금 용제국 사절 중 하나를 향해 시선을 뒀다. 박력 넘치는 드래곤의 얼굴이 호의를 잔뜩 담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목 아래로는 거북이처럼 등껍질을 메고 있어서 좀 언밸런스하다만.
“시험의 장막 때요.”
용제국의 사절로 앉아 있는 것은 세 명. 그 중 둘은 개회식 때 공중 곡예를 하던 용기사 여인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무려 크라네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