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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28화 (104/280)

128화 쉿, 열렙 중

나는 탈락자답게 살살 찌그러져 경기장을 나왔고. 관객석 입구 부분에 죽치고 앉아 들어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자니 관객석 쪽에서 타이밍 좋게 쪼르르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세스나와 루시였다.

“헹. 호다닥 도망 나오는 모습 자알 봤다 용사! 죽을까봐 쫄렸냐? 쫄았구나? 캬하핫!”

일단 잔망스러운 루시의 조동아리를 쭉쭉 잡아당겨 혼내줬다.

나는 어제처럼 세스나의 인도를 받아 무난하게 관중석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정된 좌석으로 가자, 어김없이 적랑과 카르할라스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쉽게 됐군. 수고했네.”

“… 예. 감사합니다.”

이 사람들도 내가 탈락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세스나가 바로 나타나준 거였구나.

수긍하는 한 편. 항복이라도 지는 꼴을 보인 건 마찬가지니 입맛은 씁쓸하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 기권한 겐가?”

세스나와 함께 털썩 주저앉자, 곧바로 적랑은 그런 질문을 날렸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시선은 잔류사념이 번쩍거리는 33번 경기장에 박혀 있었다.

“그 사람 카발리어죠? 그래도 되는 겁니까. 완전 양민학살이잖아요.”

“포티아 양에 한에서는 가능하지. 그래서 출전시킨 걸세.”

“흐음….”

“그리고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 이름 없는 기사는 자네보다 약할 텐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 없지.

난 그녀의 상태창을 떠올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양반은 나X위키도 없으면서 귀신같네.’

내가 포티아보다 강하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게 진짜 고수라는 건가. 그냥 주먹을 맞대 보면, 시내버스에 교통카드 댄 것처럼 ‘삐빅, 좁밥입니다’ 하고 견적이 뜨나?

“어쨌든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오후에 있을 국빈회의나 참석해주면 어떤가?”

적랑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묵직하게 두들겼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내 표정은 자연히 썩어 들어갔다.

“거부권 있나요?”

“없네.”

“…….”

근데 뭘 물어봐 물어보긴.

내가 한숨을 패액 내쉬자, 적랑이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내일은 또 패자부활전에 나가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국빈회의에 참여할 기회는 사실상 오늘 밖에 없단 말일세.”

“… 패자부활전이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들려오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자 적랑이 오히려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내 카르할라스에게 질책의 시선을 뿌린다.

“사적인 일에 손님을 말려들게 해놓고,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해준 게냐?”

“그, 그게… 정용의 실력이면 패자부활전은 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죄송해요.”

카르할라스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쪼그라들어서 더듬더듬 변명했다.

나는 두 부녀에게서 어색하게 흐르던 공기의 원인을 그제야 간파했다.

‘외부인을 끌어들인 게 문제였군.’

적랑의 성격은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 대충 파악했다.

실력만능주의. 어지간히 융통성이 없는 독불장군. 괜히 변경백과 친구먹은 게 아니다 싶은 괄괄한 성격이지만. 지금 카르할라스를 꼽게 여기는 걸 봐선, 변경백처럼 책임감도 강한 듯하다.

적랑이 딸내미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한숨과 함께 내게 설명해줬다.

“오늘 치러지는 경기에서 총 400석까지의 본선진출자를 선출할 걸세. 그리고 내일은, 탈락자들 중 재도전 의사가 있는 자들을 추려서 나머지 100석을 놓고 패자부활전을 거치게 되지.”

“아하… 그, 그래서 예선전이 3일씩이나 걸렸군요?”

피에 젖은 달그림자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불사조처럼 패자부활전에서 부활한 의문의 고수가 압도적 실력차로 모든 경기를 석권. 이건 이거 나름대로 괜찮은 시나리오인데?

‘… 진짜 국빈회의만 없었으면. 최상의 시나리오인데.’

희망찬 내일을 생각하며 밝게 피었던 표정은, 시궁창 같은 오늘을 떠올리자 그늘이 우장창 졌다.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본 적랑이 피식 웃었다.

“죽을상이군. 국빈회의 참석이 그렇게나 싫은가?”

“예. 솔직히 드럽게 싫은데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이 박정용. 자기 감정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거부하자 오히려 적랑이 놀랐다. 의외라는 반응이다.

“자네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계 유력자들에게 알릴 기회일세. 인맥을 늘려놓으면 좋잖나.”

“적도 늘릴 찬스잖아요. 밑장 빼지 마십쇼.”

‘걸출한 인물’ 같은 소리로 포장해 봐야 안 먹힌다.

일단 거기 모인 사람들 전부가 나한테 호의적일 리도 없고. 켕기는 점이 있는 것도 꺼림칙함에 한 몫 한다. 루시라던지, 불사의 마왕이라던지, 루스티카라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태생이 쌍놈이라 딱딱한 자리엔 일단 거부감이 듭니다. 제가 없던 적도 만들기 쉬운 성격이라서.”

이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알지만 안 고칠 뿐이다. 사람 원래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적랑이, 이내 허파에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적랑이 그렇게 크게 웃는 건 기억상 처음이었다.

“흐하하!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왜 요한이 자네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군.”

“왜 마음에 들어 했는데요?”

“태생이 쌍놈이고. 없던 적도 만들어내는 성격이니까. 나도 그렇고 요한도 그렇다네.”

“아….”

나는 공감의 탄성을 흘려버렸다.

변경백의 태생이 쌍놈인 건 모르겠고. 없던 적도 생기는 성격인 건 맞으니까.

그런 고집불통 외골수는 나랑 좀 다른 이유로 적을 달고 사는 법이다.

“아무튼 그러면. 나 한 번 살려주는 셈치고 참가해주게. 나도 그런 자리는 질색이라, 같이 뒷담 할 친구가 좀 필요하단 말이지.”

“…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뭐….”

어차피 적랑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정보를 적극 제공하기로 케른에서 약속도 했다. 선택권도 없는 일이다.

적랑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시늉을 해 줬으면, 이쯤에서 수긍하는 게 강호의 도리지.

“음?”

실소를 픽픽 내뱉다가, 이내 고개를 휘적거려 주위를 둘러봤다.

있어야 할 얼굴 하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설백이 안 보인다?”

세스나가 내 말에 반응해 대꾸했다.

“아. 설백 씨는 수련을 위해서 적랑님이 알려주신 동굴에 들어갔어요. 무신제가 진행되는 동안엔 계속 거기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수련…?”

나는 곧장 눈썹을 튕겼다.

“수련을 위한 동굴? 그런 게 있다고?”

“있다던데요? 저도 적랑님한테 전해만 들은 거라 잘은 몰라요. 헤헤.”

“음….”

나는 침음을 흘리고 잠시 고민해봤지만. 결국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역시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니 뭐, 몬스터가 끊임없이 나오는 동굴 같은 게 있단 말이야?”

이 땅에 소환된 용사는 용사지원 시스템을 통해 레벨을 올려서 강해진다. 그리고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몬스터 사냥 밖에 없다.

용사 간 전투나, 원주민과 용사의 전투는 레벨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있다네. 오래전 토벌된 아스타르트의 잔재인 청염의 동굴. 크로스페이드의 지하에서 이 순간에도 수많은 몬스터들을 쏟아내고 있지.”

내가 중얼거리는 걸 어쩌다 들었는지 적랑이 한 마디 끼어들었다.

아스타르트라니. 익숙한 울림에 순간 허리를 빳빳이 곤두세웠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적랑을 쳐다봤다.

슬쩍 마주본 적랑이 입술을 히죽 비틀었다.

“100명의 카발리어 중, 열병식에 모인 카발리어가 왜 50명밖에 안 되는지 아나?”

“… 다른 지역에 파견나간 거 아니었습니까? 마왕소환을 경계하려고?”

“반은 맞지. 그러나 나머지 반은 지금도 이 아래에서 싸우고 있네.”

적랑이 발밑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반사적으로 흠칫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적랑의 말은 계속되었다.

“초창기의 무신제는 격투대회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례였지.”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뭘 기리고 어떤 것을 기원하는 제례였을까.”

“…….”

“아스타르트의 동굴. 이 경기장 지하에 뼈를 묻은 카발리어들의 안식을 바라는 걸세.”

채앵! 채챙!

와아아아―!

함성과 병장기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는 와중에, 유독 적랑의 주변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카르할라스와 세스나, 루시도 그걸 느꼈는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아스타르트를 지옥에 처넣을 때도. 그 외에 수많은 마왕을 쳐죽일 때도. 그리고 동굴을 막는 지금도.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이들이.”

염불처럼 중얼거리는 적랑.

시선은 경기장에 향해 있지만 경기를 보고 있지는 않다. 초점이 흐리멍텅하다. 지하에 있다는 그 동굴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분노도 슬픔도 없다. 적랑의 눈동자 색처럼 다 타버린 잿빛 감정만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동굴을 담당하는 기사들에겐 유능한 회복술사가 절실하지. 반지의 해주를 위해 대화를 하다, 우연히 설백 양이 강해지길 원한다는 소리를 들었네. 상부상조하겠다 싶어 간단한 테스트 후에 바로 영입했다네.”

그것이 적랑이 밝히는 전모였다.

참고로 테스트는 초고득점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하긴. 설백은 아란 덕분에, 그 레벨 대에 맞지 않는 엄청난 회복 능력을 가진 회복술사다. 통과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나는 납득한 나머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적임자긴 하네요. 설백이.”

설백에게 단점이 있다면 아란을 매개로 하다 보니, 시전 대상이 무조건 단일 타겟이라는 점인데. 어차피 카발리어 자체가 극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녀만한 적임자가 또 없다. 본인 의사라면 말리기도 뭐하다.

게다가….

‘차라리 잘됐어.’

아직도 설백을 보면 케른에서 목 없는 시체가 됐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두 번째는 아스타르트의 파편의 끔찍한 털북숭이 면상이 떠오른다.

만에 하나라도 이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 동굴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많이 강합니까?”

“때에 따라 다르네. 자네가 토벌한 엘더리치처럼 강대한 상위개체가 나오는가 하면. 그냥 200레벨 이하의 규격화된 몬스터가 나올 때도 있지.”

“그렇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잠시 입을 닫고 경기를 관전했다.

많은 이들이 격렬한 사투를 벌였다. 순식간에 경기가 진행된다. 시간이 살살 녹았다.

“죽여버려라 철퇴녀!”

“잘한다! 그래!!”

“와아아아!!”

별의 별 사람들이 경기장을 스쳐지나갔다.

사슬낫을 든 소년. 철퇴를 든 여자. 활, 창, 도끼, 검, 총… 중갑과 방패로 온몸을 두른 떡대 중년이나, 산만한 작두를 들고 나온 우락부락한 아지매까지.

정말 다양한 면면들이 보였고. 승부가 난 뒤엔 하나 같이 울거나, 웃거나, 죽었다.

“하아아압!”

우지직! 한 경기장에서, 작두를 든 아지매가 떡대 중년을 중갑 째로 썰어버린다.

반토막 난 남자는 즉사했다. 장기와 살점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함성소리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와아아아아!!”

“도살자 마리! 최고다!”

“강한 여성! 왜곡된 승부욕!”

적어도 이 순간은 죽은 이의 애도보단, 승자를 향한 함성이 먼저였다.

아지매 역시 흥이 올랐는지, 작두로 시체를 마구 내려쳐 헤집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함성은 절정에 달했다.

“…….”

딱히 관중들이 역겹다는 생각은 안 든다. 무서우면 무서워졌지. 분위기와 집단광기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거다.

평소엔 무릎 까져서 피만 나도 졸도하는 사람이 여기에 와봐라. 피가 튈 때마다 성난 황소처럼 환호성을 지를걸?

‘저건 뭐 당연한 현상이고.’

이런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흥분하는 건 이상할 게 없다. 저러지 않는 게 더 위험하지.

사람 죽는 걸 봐도 흥분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눈썹 끝자락도 까딱 안 하는… 지금의 나 같은 놈.

그런 놈들이 진짜 위험한 놈이란 소리다.

“…….”

옆에서 차가운 무표정으로 경기를 관람하는 적랑을 훔쳐봤다.

나는 씁쓸한 동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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