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박수칠 때 떠나라
와아아아―!!
무신제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관객은 늘면 늘었지 어제보다 적진 않았다. 환호성과 열기도 그만큼 후끈 달아올라 경기장을 팔팔 끓이고 있었다.
―이야. 나 리즈 시절에는 이렇게 사람이 바글대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용사가 많이 소환되긴 했구나 진짜.
그 광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허리춤이 진동하며 수호 형님이 중얼거렸다.
격세지감에 찌든 전형적인 꼰대멘트였다.
그렇다.
나는 오늘, 숟가락 살인마의 신념을 고이 접고. 흑백의 쌍검을 허리춤에 찬 채 예선전에 출전했다.
“크흡….”
치욕적이지만. 뭐 어쩌냐. 죽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 솔직히 쫄았다. 개무섭거든.
내가 죽은 건 아는데. 이유는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꼼짝없이 제발로 사지에 찾아가는 기분을 아냐?
오늘 아침에 경기장 오는데, 도살장 끌려가는 어린양이 된 느낌이었다.
“옘병… 가오 상하게….”
죽음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몰라서 무서운 거다.
미지에 대한 공포. 그것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청측!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멍해있던 정신을 심판의 고함소리가 깨웠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념을 물렸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예선전이라지만 방심할 틈이 없다. 일단은 경기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한다.
진심 모드 박정용이 얼마나 추하게 양민학살을 하는지 보여주겠다.
“홍측, 1125번 도전자! 월희!”
조금 특이한 이름이 나왔다. 나는 대전상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인은 아니다. 머릿속엔 ‘월희’라고 인식됐지만 이국어가 번역된 산물이다. 원래 발음은 대충 ‘루나르 엘프라스’ 정도겠다.
꼴에 몇 개월 이세계에서 굴렀더니 자동으로 알게 된다. 이래서 사람들이 해외유학 보내는구나 싶다.
‘어디 소수민족 같은 건가?’
검은 머리에 진청색의 눈동자. 한복을 닮은 하늘하늘하고 풍성한 복식. 얼굴을 가리기 위함인지, 나풀거리는 하얀 복면을 쓰고 있다.
좌우지간 동양풍으로 생긴 여자. 그것만 해도 반자동적으로 동질감이 든다.
“2일차 제12경기장, 개전!”
심판이 손날을 내리치며 장렬하게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이 짙어진다. 우리 경기를 주목하는 관중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나다. 하룻밤 사이 내 스타성이 빛을 발해 입소문을 탄 모양이다. 입꼬리가 자꾸 덩실덩실 춤을 춰서 말리기 바빴다.
‘크흠. 미, 미미르의 눈.’
자중하자 박정용. 지금 꽤 심각한 상황이야. 이럴 때가 아니라고.
자꾸 증발하려는 심각함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곧장 그녀의 상태창부터 띄웠다.
[명칭: 포티아]
[별칭: 제93위 카발리어, 마녀사냥꾼, 이름 없는 기사, 월희, 무선(武仙)]
[LV. 311]
[체력: 2100/2100 ?마력: 2000/2000 ?신체상태: 정상]
[힘: 209 ?민첩: 442 ?지능: 363 ?히어로 센스: 23]
‘이런 미친…!’
증발하려던 현실감이 벼락처럼 등줄기를 후려쳤다.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은 나머지 세 번을 고쳐봤지만. 상태창에 표기된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명칭과 별칭 항목에 가져갔다.
‘포티아… 이름 없는 기사?!’
진짜였다.
어젯밤, 카르할라스가 내게 해줬던 말들이 모두 진짜였어.
내 눈앞에 서 있는 월희… 아니, 이름 없는 기사 포티아를 보니 확실히 알았다.
―나는 아버님… 우리 아빠를, 지키고 싶었어.
어젯밤의 내 방을 떠올렸다. 카르할라스의 절박한 눈동자와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때의 상황들이 천천히 뇌리를 물들여 갔다.
* * *
“무슨 소리야. 적랑님이 누구한테 보호받을 짬은 아닌데?”
적막한 내 방의 침대 위. 나는 카르할라스의 턱을 쥔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엄한 상황으로 착각하기 딱 좋지만. 당사자들 분위기는 그리 로맨틱하지도 유쾌하지도 못했다. 특히 한 번 뒤진 내가 그렇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불사교의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건… 알고 있어?”
카르할라스는 그런 말로 서두를 끊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체념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읽고 나서야 턱을 놔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하나는 내가 해결하고 오는 길인데.”
“응. 들었어. 널 처음봤을 땐 이 이상한 사람은 뭔가 싶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더라?”
카르할라스가 쓰게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뭐 꿇릴 것도 없으니 고개 빳빳이 치켜들고 대응했다.
“그게 뭐. 내가 무신제 참가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걸 설명하려면 우선 이번 국빈회의 의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데… 혹시 알아?”
“몰라.”
노빠꾸 노퓨쳐, 예스 상남자.
내가 즉답하자 오히려 카르할라스가 당황했다.
“다, 당당하네.”
“회의 참가를 안 했으니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
“아하하…. 그건 그렇네.”
물론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죄라고, 옛날 누군가가 말했지. 그래서 내가 아까부터 진실을 요구하는 불같은 눈빛을 뿜는 거고.
카르할라스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국빈회의 주제는 불사교의 암약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거였어.”
“목적?”
“응. 뭐랄까… 세계 각지에서 보고되는 불사교의 행각이 너무 불규칙했거든.”
“어떤 식으로.”
“본래 불사교는 마녀의 재림을 위해 인신공양 같은 테러를 일삼는 조직이었는데… 최근 들어 불사교가 마왕을 구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됐어. 마녀의 재림을 위해 행동하던 조직이 오히려 마왕을 토벌한다니. 지금까지 전례가 전혀 없던 행동이야 이건.”
“…….”
“결국 오늘 회의는 이렇다 할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났지만….”
나 그거 왜 그런지 알 것 같은데.
걔네가 카사스라는 애들한테 인수합병 당했거든? 모회사 방침이 극한의 중립충들이라 어쩔 수 없이 그랬을걸.
그런 생각이 퍼뜩 스쳤지만. 일단 이 발언이 몰고 올 파장을 예상할 수 없기에, 아가리는 고이 닫고 있었다.
그러자 카르할라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무신제를 준비하고, 불사교에 대해 조사하면서 비밀리에 입수된 정보가 있어.”
“뭔데.”
“무신제에 불사교와 관련한 모종의 세력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 그리고… 그놈들이 마녀사냥꾼을 노리고 있다는 것.”
마녀사냥꾼.
그 익숙한 어감에 나는 숨을 삼켰다.
―마녀에 관한 건 모두 처단한다. 마녀사냥꾼 적랑의 이름에 걸고.
적랑의 시그니쳐 대사.
말 그대로 마녀와 관련 있는 놈들을 죽일 때는 항상 그런 말을 했었지. 마치 자기가 ‘마녀사냥꾼’이란 것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것처럼.
나는 그제야 적랑이라는 남자를 둘러싼 거대한 호기심을, 카르할라스에게 성토했다.
“야. 대체 마녀사냥꾼이 뭐냐? 적랑님도 그거지? 무슨 단체 같은 거냐?”
“… 어, 응. 맞아. 알고 있었구나.”
“본인 입으로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하아. 아빠도 참. 그러지 말라니까 정말….”
카르할라스가 한 5년 늙은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예쁜 사람은 5년 늙어도 예쁘구나. 당사자는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그런 생각이나 떠올리는 내가 있었다.
어쨌든 시원하게 해명해줄 거라는 내 기대와 달리, 카르할라스는 표정을 흐리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함부로 말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듣고 싶으면 아버님한테 직접 들어야 해.”
“이제와서 쩨쩨하게 이러기냐?”
“아버님의 절대방침이라 어쩔 수가 없어. 미안.”
이번만큼은 카르할라스도 단호했다. 나는 입맛을 다시는 걸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카르할라스가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그 모종의 세력이 마녀사냥꾼들을 노리고 무신제에 침투해 있으니까… 마녀사냥꾼으로 잘 알려진 적랑님이 위험하다 그거지.”
“응. 맞아.”
카르할라스가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나는 지금까지 들었던 걸 바탕으로 결론을 말했다.
“그래서 그놈들을 시합에서 탈락시킬만한 대항마가 필요했다? 최소한 숨어든 놈들의 정보라도 끌어내도록 나를 고기방패로 내세웠다. 이거잖아?”
“고, 고기방패라니. 그럴 생각으로 부탁했던 건….”
“그럴 생각이었든 아니었든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 으. 미, 미안.”
아무래도 한 번 죽은 적이 있어서 그런가. 좀 가시 돋친 말투가 튀어나갔다.
그러나 카르할라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했다. 어느 정도는 본인도 수긍한다는 거겠지.
나는 그 모종의 세력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봤다.
‘현역 카발리어급인 내가 죽을 정도다.’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진 인물이 있으면서도. 양지에 드러나지 않은 조직?
그런 게 흔할 리가 없다. 게다가 마녀사냥꾼이 정확히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상황에선 마녀에 관한 것에 개입한다는 점 자체가 힌트가 된다.
그 모종의 세력은 십중팔구 카사스의 사도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케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고 있자니. 카르할라스가 뒤늦게 첨언한다.
“혹시나 예선전에서 특이한 복식의 검은 머리 여자와 만나면… 그 사람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해줘. 만나면 바로 기권해도 좋으니까.”
이번에도 한 번에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가 나왔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언제는 본선까지 무조건 올라가라며?”
내 의아한 시선에 카르할라스는 목소리를 조금 내리깔았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나도 방금 들었는데… 아버님도 마녀사냥꾼을 무신제에 잠입시켰다는 모양이야.”
* * *
회상 끝. 현실로 돌아온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지리 운도 없지 씨벌.’
설마 2일차 예선 1회전에 바로 그 암행어사랑 맞짱을 뜨게 될 줄이야.
지금 2500강이니까 대충 확률이 1250분의 1인데 이게 걸리냐? 선 넘네 진짜.
‘… 사념 회수도 결국 못 했는데.’
33번 경기장 쪽으로 흘끔 시선을 돌렸다.
경기장 구석엔 아직도 목없는 내 시체가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잔류사념은 경기장 한 가운데서 음울한 빛을 무럭무럭 토해내고 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되면 남은 선택지가 하나뿐이니까.
나는 별안간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기권하겠습니다.”
나를 조용히 노려보던 포티아는 물론이고 심판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히 심판 표정이 가관이다. 나름 다크호스로 부상하던 내 경기를 기대했나 보다.
“…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내 상대… 이름 없는 기사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불쾌감이 잔뜩 어린 표정이다.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미녀에게 경멸받는 업계포상에 몸 둘 바는 모르겠다만….
‘의뢰주가 까라면 까야지.’
애초에 내가 원해서 참가했던 경기도 아니었고. 하고 싶었던 상황극은 대부분 성취했고. 하물며 이 대회에 관여하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마당이다.
뭐, 저 여자도 나름 카발리어니까. 나 없어도 알아서 잘 조사하겠지.
“욕봤수다.”
나는 경기장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장외로 내려갔다. 맥아리없이 끝나버린 경기 때문인지, 환호성은 단숨에 야유와 비난으로 변해 이쪽으로 쏟아졌다.
“우우우!”
“뭐야 이게! 돌아와서 싸워라!!”
“야 이 미친놈아! 내 전재산 물어내!”
그렇게 피에 젖은 달그림자 전설은 맥아리없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