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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26화 (102/280)

126화 그게 나야 움비두바

나는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에 정신을 뺏긴 나머지.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적랑을 쳐다봤다.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는 파우치를 뒤졌다. 내 손에는 망자의 함이 쥐어져 나왔다.

‘이, 일단 갱신.’

망자의 함 아이템을 바꿔야 한다. 본능에 각인된 행동강령에 따라, 나는 망자의 함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우웅, 우웅. 음울한 보랏빛을 이미 무럭무럭 뿜어내는 망자의 함이 보였다.

[아이템 정보]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진짜, 지랄 났네.’

옘병. 진짜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나는 눈앞이 아찔해져서 확인하지도 못한 채, 망자의 함을 도로 집어넣었다.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헤집었다가 일순간 백지가 되길 반복한다.

“…… 후.”

한참 후에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망자의 함을 열어봤다.

회귀점 갱신 전에 넣어뒀던 도전자 확인증과 함께, 쪽지 하나가 들어있다.

[데스카운트: 1]

쪽지엔 떨렁 그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넣으려고 마음먹은 쪽지와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생각이 읽힌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하곤 한다.

[데스카운트: yee (2라는 뜻)]

나는 새로운 쪽지를 만들어 망자의 함에 넣었다.

지금 나처럼 시궁창이 됐을 기분도 좀 풀라고, 가벼운 개드립을 섞어줬다. 아마 웃진 않을 거고 욕 박을 확률이 높긴 하다.

적랑은 내 상태가 이상해진 걸 깨닫고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괜찮은가 자네?”

“예? 아, 예. 뭐… 예. 아마도요. 네.”

사실 그런 어정쩡한 대답을 한 시점에서 안 괜찮은 건 들켰을 거다.

안 그래도 켕기는 게 많은 입장에서 이런 관심은 곤란하다. 나는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겨, 경기가 재밌어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놔버렸네요. 하하.”

“자네 지금껏 경기장 쪽으론 눈길도 안 줬잖나.”

예리한 반박이 날아온다. 당신처럼 눈치 빠른 중년은 싫어해.

눈깔이 뱅뱅 돌아가는 와중. 나는 아가리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발사했다.

“아 그! 사람 구경! 지금까지 응원해주는 관객들을 보니 열기가 전해졌다 할까…?”

“… 흐음.”

영 의심쩍다는 눈초리가 절찬리에 쏟아졌다.

나는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열심히 경기를 관람하는 척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저건 또 뭐야.’

세스나가 내 반응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퍼뜩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저거. 33번 경기장인가? 시체가 생겼는데 방치하고 있네.”

“어? 어디요?”

내가 주시하고 있던 곳은 33번 경기장이었다.

시체 하나가 흉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목이 잘린 채 피를 철철 흘리며, 경기장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는데. 정작 심판은 본체만체 하고 있다.

‘곧 경기 시작할 거 같은데….’

심지어 다음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이 입장하는데도 그 모양이다. 오늘 대회의 끝자락이라 운영진도 주의가 산만해진 건가?

그런 생각에 탄식하고 있는데. 옆에서 세스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체라니… 대체 어딜 말씀하시는 거예요?”

“33번 경기장 말이야. 안 보이냐?”

“아뇨. 경기장은 잘 보이는데… 시체는 안 보이는데요?”

“…… 음?”

나는 이어지는 세스나의 반응에 눈썹을 튕겼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경기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33번 경기장, 개전!”

웬걸. 경기장 위로 올라온 도전자들은 시체 따윈 아랑곳도 않고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퍼벅! 그들의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는 와중. 시체가 그들의 발에 채여 속절없이 장외로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시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핏빛으로 빛나는 마법진과 음울하게 피어오르는 증기.

… 잔류사념이었다.

“아.”

나는 그제야 시신에서 멀찍이 떨어진 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칠갑을 한 채 혀를 빼물고 죽어있는 얼굴은… 거울 속에서 숱하게 봐왔던 얼굴이었다.

“나잖아 X발!!”

나는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는지. 옆에서 적랑을 비롯한 지인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상태였다.

* * *

“… 심란하구만.”

첫날의 모든 경기가 끝나고, 적랑의 저택에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작금의 사태를 반추하고 있었다.

‘나는 한 번 죽었다.’

일단 현재로서 확실한 건 그것뿐이다. 그것도 아마 경기를 치르다가 죽은 것 같다.

경기장 위에서 죽어 있었으니, 대전 중에 상대에게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 기억이 없다는 거다.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모른다. 예선전인지 본선전인지도 모른다. 그 기억을 되찾으려면 잔류사념을 회복해야 하는데. 정작 그 경기장에 접근할 수가 없다.

“경기장은 지금도 철통경비고….”

카르할라스에게 넌지시 물어본 결과. 무신제 기간 동안에는 경기장에 대한 출입이 불철주야 엄중히 통제된다고 한다.

아무리 도전자 자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중대한 사유가 없는 이상 경기장에 임의로 접근하는 건 안 된다. 경기장에 장난질을 쳐놓는 등, 부정행위의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결국 33번 경기장을 다시 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무신제 경기에 사용되는 경기장은 난수 추첨으로 결정된다.

완전히 랜덤 요소라는 말이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

즉, 시공회귀로 돌아오고 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미래다.

‘게다가 예선전은 대전 상대까지 제비추첨이고….’

내가 33번 경기장에서 전에 누구와 싸웠든. 본선이든 예선이든. 그놈과 이번에도 똑같은 라운드에서 다시 붙을 거란 보장이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럴 확률이 희박하다. 남은 도전자가 2500명이나 되니까.

“미치겠네 진짜.”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박박 긁으며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게 어지간히 꼴사나웠는지, 침대 옆에 세워둔 베스타크가 퍼뜩 진동했다.

―야동 보냐? 왜 자꾸 끙끙대.

“아. 형님….”

나는 뒤늦게 떠오른 그의 존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형님. 제가 몇 번이나 죽었는지 알고 있죠?”

―음? 그렇지. 143번이잖….

태연하게 이어지던 수호 형님의 말이 일순 막히더니. 곧 당황 어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네. 144번됐네? 그새 언제 뒤졌냐?

“… 그 반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 못하는군요.”

나는 제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궁금했던 건, 수호 형님이 루시처럼 ‘사라진 시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였다. 하지만 저 반응을 보니 아닌 게 확실해졌다.

수호 형님은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쌓인 흉마의 기운으로, 내가 몇 번 죽었는지만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 겹칠 일도 없으니 데스카운팅 하나는 루시보다 잘 하겠군.

‘… 결국 지금 상황에선 딱히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

이렇게 되면 답은 하나다. 나는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내일은 곧죽어도 루시 데려간다.’

루시가 죽을상을 쓰고 아무리 안 간다고 버텨도. 억지로라도 데려가겠다.

지금 내가 경기 도중에 사망해버리면, 기억해줄 건 루시 밖에 없으니까.

‘루시는 지금 피곤해서 곯아 떨어졌을 거고….’

꾀어낼 방법이야 무궁무진하니 걱정은 없다.

어차피 잠에서 깨어나고 나면, 오히려 루시 쪽이 어리둥절해서 찾아올 거다. 그녀 입장에선 자고 일어났는데 시간이 돌아와 있는 꼴일 테니.

물론 찾아와 봐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다.

‘지금 미리 가서 말해둘까.’

루시를 원만하게 무신제에 끌고 가려면 사전에 약을 좀 칠 필요가 있다.

나는 입술을 슬쩍 축이며 히죽 웃었고.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잠깐 루시 방에 갔다 오겠습니다 행님.”

―올 때 메론나.

“팔아야 말이죠.”

이쪽 세상이과 지구는 시간축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고 들었다.

파라이소 수백 년 전의 역사에 나오는 수호 형님이, 저런 드립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진짜 많이 다르긴 한가보다.

‘의외로 지구 기준으론 소환 시기가 얼마 차이 안 날지도…?’

나는 뇌리 한켠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방문을 열었고.

“어.”

“아.”

밖에 멀뚱히 서있던 카르할라스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거리며 눈을 피했다.

“미, 미안해. 그냥 대화나 좀 해볼까 했는데… 역시 그냥 갈게. 내일 대회 준비도 해야할 테니까….”

카르할라스는 그렇게 제 할말만 마치더니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켕기는 줄은 아나 보지? 마침 잘 만났다. 왜 내 방 앞에서 우물쭈물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얘한테도 할 말은 많으니까.

‘계획 변경이다.’

나는 오히려 방문을 활짝 열고, 도망가려는 카르할라스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녀가 새된 숨을 내뱉으며 나를 돌아본다.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카르할라스를 마주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섭섭하게 왜 그냥 가시나. 할말 있으면 하고 살아야지.”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침대에 아까처럼 걸터앉고, 내 옆을 툭툭 두들겼다.

게슴츠레하게 뜬 시선은 카르할라스를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앉아봐. 왜 그러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거고.”

“… 응.”

카르할라스가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착석을 확인한 나는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제1회 배신자 청문회 개정이다.

“카르. 나한테는 함구시키더니 조잘조잘 다 불었더라?”

“… 응. 미, 미안… 어, 어쩔 수가 없었어.”

“뭐가 미안한데.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기나 해?”

“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라고 말할 뻔했다가 참았다.

왠지 이유없이 화난 여자친구가 된 느낌이라서. 나부터가 이런 의미없는 말다툼은 싫어하니 대화를 억지로 끊었다.

그리고 나는, 가슴 한 켠을 불쾌하게 스멀거리던 의문을 내뱉었다.

“이번 무신제. 말도 안 되게 센 놈이 섞여 있던데?”

“!!”

반쯤은 그냥 떠보는 말이었다.

내가 죽을 정도면. 적어도 현역 카발리어급의 강자가 섞여 있다는 뜻이다.

혹시 나를 죽인 그 새끼가, 카르할라스의 무신제 참가 권유와 연결된다면. 그녀는 반드시 반응을 보일 거라는 계산이었다.

“… 역시… 너 정도면, 바로 알아채는구나.”

그리고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카르할라스가 경기 일으키듯 온몸을 움찔거렸고. 직후 눈에 띄게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적랑님. 딸내미 너무 열렙만 시켜놓은 거 아뇨?’

이렇게 포커페이스가 안 돼서야 사회생활 하겠냐고.

쓰게 웃길 잠시. 카르할라스에게 얼굴을 퍼뜩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왜 나를 참가시킨 거냐. 이젠 이유를 무조건 들어야겠는데.”

“…….”

그러나 카르할라스는 끝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 도망은 용서하지 않는다. 나도 목숨이 달려있으니까. 나는 그녀의 턱을 덥석 쥐었고. 내쪽으로 홱 돌려버렸다.

힉, 하고 낮은 탄성이 새어나온다. 그녀의 크게 뜬 눈이 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말하자. 말로 할 때.”

공포. 당황. 부끄러움. 여러 가지 이유로 파르르 떨리는 카르할라스의 눈동자에 대고, 나는 웃음기 싹 뺀 채 중얼거렸다.

카르할라스는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입술을 뗐다.

“아버님… 아니. 우리 아빠를, 지키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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