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어라?’
나는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에 정신을 뺏긴 나머지.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적랑을 쳐다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는 파우치를 뒤졌다. 이내 내 손에는 망자의 함이 쥐어져 나왔다.
‘이, 일단 갱신.’
망자의 함을 열고, 적랑 안 보이게 대충 메모를 적어 넣었다. 뚜껑을 닫고 함이 음울한 보랏빛을 토해내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적랑은 내 상태가 이상해진 걸 깨닫고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괜찮은가 자네?”
“예? 아, 예. 뭐… 예. 아마도요. 네.”
사실 그런 어정쩡한 대답을 한 시점에서 안 괜찮은 건 들켰을 거다. 옆에서 세스나와 카르할라스도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이런. 안 그래도 켕기는 게 많은 입장에서 이런 관심은 곤란하다.
“그, 그나저나 따님이 엄청 미인이시라 놀랐습니다.”
나는 상갓집 분위기도 쇄신할 겸. 입에 발린 덕담을 주워섬겼다. 원래 딸자식 칭찬하면 어느 세상의 애비든 껌뻑 죽기 마련이니까.
흘깃 반응을 훔쳐보니, 적랑이 히죽 웃었다.
“원한다면 혼례를 주선하지.”
웃자는 농담에 죽자고 달려드네 이 양반. 무슨 알고리즘으로 ‘따님이 미인이다’가 ‘따님을 주십쇼’로 번역되냐. 구굴번역기 쓰냐?
황당한 나머지 말을 못 잇자, 내 대신 카르할라스가 퍼뜩 끼어들었다.
“아버님! 저, 저는 이 사람이랑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넌 왜 또 그리 질색팔색 하냐. 사람 기죽게.
나 울리는 게 목적이냐? 안 그래도 지금 심란해서 울고 싶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갑자기 회귀점 갱신이라….’
루시가 없는데 갑자기 갱신됐다는 건, 나나 루시에게 뭔가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는 소리.
하지만 이 상황에? 그것도 이렇게 뜬금없이?
‘하긴. 전에는 뭐 뜬금 있었나….’
케른에서도 나중에 돌아보고 회귀점 갱신된 이유가 맞춰졌지. 갱신된 시점 하나하나만 봐서는 그 때도 충분히 뜬금없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다. 나를… 혹은 루시를 죽일만한 요소가, 이 근처 어딘가에.
‘뭐가 있지…?’
나도 모르게 슬쩍 훔쳐본 것은 적랑의 얼굴이었다.
솔직히… 살해당할 확률이 가장 높은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그이기 때문이었다.
[인물 정보]
[명칭: 베르슐츠]
[별칭: 4025703번째 용사, 적랑(赤狼)의 기사, 제13위 카발리어, 무신(武神)]
[LV. 381]
[체력: 3750/3750 마력: 1390/1390 신체상태: 정상]
[힘: 536 민첩: 611 지능: 109 히어로 센스: 63]
스테이터스도 나보다 살짝 높고. 적랑이 마음먹고 나를 죽이겠다 치면, 내가 질 가능성이 높다.
아까 대련으로 실력차를 확실히 가늠했다. 전투의 노련함… 특히 상대와의 간격 조절 쪽에서 차원이 달랐다.
‘옘병 저거, 히어로 센스 63인 것 좀 보라지. 괴물이라니까.’
게다가 동기도 충분하다. 지금까지 적랑이 보여준 ‘마녀’에 대한 증오를 생각하면, 차고 넘칠만큼 충분한 이유가 하나.
‘루시의 정체를 들켰을 경우.’
루시는 디아나의 딸이라고 불리는 마왕이다.
게다가 옛날엔 세상을 찜쪄 먹으려고 한바탕 크게 놀았다. 그 불사의 마왕이 루시라는 사실을 들키는 날에는… 이 회귀점 갱신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쯤에서 내 시선은 다시 경기장 쪽으로 향했다.
‘솔직히 저 안의 누군가라 치면… 그냥 답이 없고.’
2차 예선전 경기는 이제 3분의 1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려 수백 경기다.
내일 다시 모일 예선 참가자만 해도 2500명이란 말이다. 이 모든 인원을 전부 미미르의 눈으로 숙지하고 경계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가장 큰 문제점이 하나. 관중석에서 경기장까지, 미미르의 눈 스킬 사거리가 안 닿는다.
‘그렇다고 관중 속의 누군가라 치면… 그건 더 답이 없고.’
결국 아무런 정보가 없는 지금. 내 선에서 경계할 수 있는 것도 끽해야 적랑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슬쩍 엉덩이를 떼고 적랑과 떨어져 앉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소심하기 짝이 없는 대비책이었다.
“그나저나 정용님! 복면 쓴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요. 솔직히 그런 미친… 아, 아니. 특이한 사람은 정용님뿐일 줄 알았는데.”
세스나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중간에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긴 한데. 일단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할라스에게 설명으로도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복면맨들은 생각 이상으로 많다. 10명에 3명 꼴로 있어 보이니, 300명은 족히 될 것이다.
참고로 복면이 통하는 건 본선까지만이다. 카발리어전에 진입가면 전부 실명과 맨얼굴로 임해야 된다.
“어머? 그런데 왜 굳이 복면을 쓰고 참가하는 거죠?”
“뒤는 구린데, 상품이랑 상금은 타고 싶다 이거지.”
“아하!”
그렇다. 굳이 복면을 쓰고 참가하는 놈들은, 대부분 본선전에 걸린 상금과 상품을 노리는 뒷배 켕기는 놈들이다.
“본선 상품이 뭐길래 이렇게 복면 참가자가 많나요?”
“본선 진출자에겐 일단 금화 5천개씩 전부 지급. 상위 100명에겐 5천개 추가 지급. 그리고 상품으로는 본선 1위에게 무슨 검을 준다는데? 이름이… 멸룡검이었나? 아무튼 용제국에서 받아온 귀한 검이래.”
나는 아까 개회식에서 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말했고. 세스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본선 진출만 해도 5천 금화에, 상위 100위면 1만 금화요?”
“어. 그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목숨 걸고 치고받지.”
“저도 참가할 걸 그랬네요. 저희 둘의 노후 자금까지 마련할 기회였는데. 아까워라!”
“???”
참고로 무신제는 이런 복면맨들을 굳이 제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유하듯이 ‘본선전까지는 가명, 복면 쌉가능’ 조항을 규칙에 기재해 놨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마르크트레스 전역에 팽배한 실력지상주의.
상금충 잡배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든, 카발리어들 선에서 정리된다는 압도적인 자신감.
그리고 이들을 참가시킴으로써 카발리어전의 수준이 더욱 검증되길 기대하는 것도 있다.
“…….”
하지만 복면맨을 포함해, 오늘 치러진 모든 시합을 지켜본 결과.
‘눈에 띄는 놈은… 없잖아.’
딱히 나를 위협할만한 실력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 같은 힘숨찐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론 그랬다.
애초에 생각과 실력이 있는 놈이면. 전력노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예선전에선 최대한 힘을 숨기는 게 상식이긴 하다.
“오늘의 예선전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돌아가시는 길 조심하시고, 내일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요원이 관중석 여기저기를 돌며 외쳐댔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입구로 몰리며 금세 인파가 바글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내일도 경기에 참가하려면 국빈회의는 못 오겠군?”
착잡한 심경을 추스르고 슬슬 엉덩이 털고 일어나려는데. 적랑이 지나가듯 툭 내뱉었다. 화제가 화제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거 내일도 합니까?”
“카발리어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연일 치러진다네.”
“그, 그럼… 그 전에 광탈하면 참가하겠습니다.”
“끝까지 불참. 알겠네. 그렇게 전달하지. 자네의 증언이 절실한데 여러 모로 아쉽군.”
“…….”
좀 미안하긴 한데, 한 편으론 기쁘다.
‘탈락하면 참가하겠다’를 ‘응 불참’으로 알아들었다는 건… 그만큼 적랑이 내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나는 난처하게 웃었고. 적랑은 그런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가자. 카르할라스.”
“아, 네.”
카르할라스는 퍼뜩 적랑의 뒤를 쫓아 경기장을 나갔다. 나를 지나치기 직전 슬쩍 내게 인사를 날린다. 나도 목례를 해줬다.
“역시 살벌하시네요~.”
“내 말이.”
세스나와 나는 한 마디씩 주워섬기고는 적랑의 뒤를 멀찍이 쫓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뒤. 적랑에게 고자질한 카르할라스를 추궁할까 해서 그녀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적랑의 말에 의하면 내 방으로 향하는 걸 봤다 그러는데… 정작 나는 카르할라스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회귀점 갱신에 대해서라도 의논해야겠다 싶어 루시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세스나의 방에서 세상 모르게 퍼질러 자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도.”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 방으로 돌아가 곧장 잤다.
내일 대회도 참가하려면 체력 유지가 중요하니까.
* * *
다음날이 밝았다.
나는 살짝 불편한 마음을 가슴 한 켠에 얹은 채, 예선전을 위해 경기장에 갔다.
‘결국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고….’
카르할라스가 적랑에게 어디까지 불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적랑이 아니꼽게 봤던 건지 등등. 카르할라스와 대화를 좀 해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아마 그쪽에서 나를 피하고 있었던 거겠지. 나한테 미안한 게 있을 테니.
‘뭐, 시간은 어차피 많아.’
에스파다와 베스타크는 오늘도 역시 가져가지 않았다. 예선전까지는 숟가락 컨셉을 유지할 생각이다.
그래야 본선에서 무기를 들고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더욱 뜨거워질 테니까.
‘… 괜찮겠지. 아직 예선전인데.’
숟가락만 든 정체불명의 고수가, 본선전에서 본심을 발휘하는 그 순간.
쌍검을 들고 적을 유린하는 내 모습에 관중들이 얼마나 환호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불알이 떨려온다.
“112번 도전자와 512번 도전자! 33번 경기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불려나온 상대와 마주한 채 경기장 위에 서 있었다.
“청 측, 512번 도전자, 제리 레버논!”
오늘의 내 첫 상대는 나와 같은 복면의 남자였다.
가명이 분명할 남자의 이름이 소개되었고. 복면 남자는 준비를 마쳤다는 양 검을 들어올렸다.
스르릉.
카타나와 비슷한 외날 곡검이 낮게 울었다. 날붙이의 서늘한 광택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홍 측,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와아아아―!
반대편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열광적인 환성이 쏟아졌다. 당사자인 나도 놀랄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 나에 대한 입소문이 꽤 퍼졌나보군. 나는 입꼬리가 씰룩대는 걸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33번 경기장, 개전!”
경기가 시작됐다. 그럼 엑스트라3아. 피젖달의 신화 창조를 위해 산화해라.
나는 나이프를 꺼내들고는 곧장 흉인 살포를 시전했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흉흉한 살의의 칼날이 복면 남자를 덮쳤다.
‘옳거니.’
복면 남자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검을 잡은 자세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었다. 본새를 봐서는 흉인 살포가 먹힌 듯했다.
레벨이 150도 못 넘는다 이거지? 복면 차고 상금 타갈 생각은 어떻게 했대. 양심도 없지.
‘그래도 만의 하나가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날 위협할만한 강자로는 보이지 않지만. 어제 봤던 회귀점 갱신 패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마지못해 놈의 상태창을 시야 맡에 띄웠다.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대사를 내뱉었다.
“들어와라. 첫 공격은 양보….”
대사가 끝나기 직전. 나는 놈의 상태창을 슬쩍 훑었고.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 어라?”
검광이 눈앞에서 아찔하게 번득였다. 내가 본 건 그게 다였다. 세상이 기우뚱, 뒤집어졌다.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시야가 허물어진다.
스으― 스으―….
그런 가운데.
복면 남자의 기괴한 숨소리가 생에 마지막 의식을 간질였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21일, 20시 58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수도 크로스페이드, 무신의 투기장]
“난 거짓말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네.”
적랑이 나지막이 남긴 한 마디가 멍한 머리로 윙윙 울렸다.
와아아― 하는 함성소리가 그것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
풀려버린 두 눈은, 시야를 가득 메운 회귀점 갱신 알람을 멍하니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