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형이 거기서 왜 나와
첫 날은 한 번 더 경기를 치른 뒤 끝이 났다.
모든 선수의 1경기가 끝나서 약 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탈락했고. 남은 5000명이 다음 대진을 기다리던 중, 날이 어두워지기 직전에 내 경기가 잡힌 것이다.
“청 측,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내가 무대 위로 올라오자, 아까 같은 비웃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가까운 관중석 쪽에서 환호성이 살짝 커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드는 일부 관중들이 보인다.
“힘내라 피젖달!”
“너한테 역배로 전재산 걸었다!”
“이번에도 한 방에 끝내버려!!”
벌써부터 소수의 팬덤이 생긴 모양이다. 아무튼 이 주체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이란.
혼자 자아도취하며 지랄을 하고 있자니. 심판이 경기를 진행했다.
“제15경기장, 개전!”
나는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를 눈대중으로 슬쩍 훑었다.
금발 벽안에 플레이트 갑옷, 그리고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서양 기사풍의 미남. 아까 심판의 소개로는 ‘카멜 란트록’이라는 이름이었지.
하긴 외모든 이름이든 뭐가 중요하겠냐. 한성광에 이어서 나한테 퇴장당할 엑스트라2에 불과한 것을.
나는 식탁용 수저를 다시금 들어올렸고. 준비해온 ‘도발대사3’을 나직이 읊었다.
“덤벼라. 그럴만한 각오가 있다면.”
참고로 준비해온 도발대사는 총 10개다. 그 외 공격대사, 회피대사, 마무리대사까지 각종 상황에 맞는 대사를 10개씩, 어제 밤새도록 연습했다.
거울 보고 연습하는 장면을 카르할라스한테 들켰는데. 그 때 그녀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지.
“이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하아압!”
카멜은 잘생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내게 질주해왔다. 방패를 밀착하고 창을 내밀어 쐐기처럼 저돌맹진한다. 파고들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파고들 생각도 없으니 상관없다.
‘흉인 살포.’
쿠구구구.
투기장 바닥이 가볍게 진동하며 날카로운 살기를 흩뿌렸다. 반응은 굉장히 극적이었다.
“커헉…?! 이, 이건…!”
놈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목을 움켜쥐며 꺽꺽대기 시작한 것이다.
콰당탕!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성대하게 자빠지는 카멜 란트록. 그는 황급히 몸을 추슬러 일어났지만. 더 이상 내게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못했다.
“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완전 경직이 들어갔다. 딱 봐도 줫밥 같길래 상태창 확인도 안 했다만. 놈은 아무래도 레벨이 148 이하였던 듯하다.
나는 흉인 살포를 멈추지 않은 채,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다.
“와라. 나는 여기에 있다.”
도발대사5와 함께 한 발자국.
“선제공격은 양보하겠다. 발버둥 쳐봐라.”
도발대사8과 함께 다시 한 발자국.
“왜 그러지. 내가… 두렵나?”
도발대사10과 함께 마지막 한 발자국.
현란한 인성질 끝에 나는 카멜의 코앞에 도달했다.
완전히 굳어서 바들바들 처량하게 떨리는 몸. 카멜의 목에 금속 수저를 갖다댔다. 서늘한 감촉에 놀란 건지 카멜은 경기를 일으키더니.
“사, 살… 살려주시오.”
손에 힘이 풀리며 창과 방패를 놓쳐버렸다. 탱그랑. 창이 바닥을 구르며 청명한 소리가 났다.
시합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스… 승자. 112번 도전자! 피에 젖은 달그림자!”
나는 이번에도 일언반구 없이 등을 돌렸고. 망토를 크게 펄럭이며 유유히 걸어갔다.
내 덕분에 토토에서 크게 딴 역배충 아저씨들이 많았는지, 함성이 유난히 커졌다.
“지엔장 피젖달! 믿고 있었다고!!”
“와아아아!”
토토 역배에 성공했을 때의 그 쾌감. 내가 아주 잘 알지. 앞으로도 이 박정용만 믿으라구 아저씨들.
나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오늘 2경기까지 마치신 분들은 숙소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내일 아침 7시까지 다시 이곳으로 집합해주십시오! 지각하실 경우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으니, 행여 지각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기실에 앉아서 이어지는 경기들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진행요원 한 명이 그런 통보를 남겼다.
‘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전광판에 표기된 시각을 보니 저녁 8시가 다 됐다.
역시 싸움구경. 시간이 겁나게 잘 간다.
‘오늘 경기는 2경기까지인가 보지?’
앞으로 500명까지 줄이려면 예선에서 최소 3경기는 더 치러야겠지만… 인원수가 반씩 뚝뚝 잘려나가니 경기의 회전율도 좋아질 테니까. 남은 경기는 생각보다 후딱 끝날 것이다.
“퇴장하시는 도전자분들! 증명서 하나씩 발부받아 가십시오!”
납득한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에 섞여 대기실을 나왔다. 나오면서 대회 참가자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하나씩 주길래 받아왔다.
[증명서 - 112번 도전자 / 피에 젖은 달그림자]
[위 증명서는 소유자가 제57회 무신제의 참가자임을 증명한다.]
이게 있어야 내일 다시 모였을 때 본인확인이 된다는 모양이다. 증명서 중앙에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하나 있는데. 이게 본인 확인을 해준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망자의 함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망자의 함은 언제나처럼 연보라빛을 잠깐 뿜어내고는 다시 잠잠해졌다.
‘아저씨는… 아직 안 끝났나.’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프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시 만나기 힘들 거라곤 예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덕담이라도 몇 마디 더 주고받을 걸 그랬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원형경기장 입구까지 되돌아왔다.
“… 그냥 구경이나 계속 할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 2회전의 남은 경기가 3분의 1정도 있다. 전력을 분석하든, 시간을 때울 목적이든. 지금 사실 경기 관람 외에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컨셉 겹치는 놈 있나 찾아봐야 돼.’
복면 컨셉까진 내가 봐줄 수 있다.
애초에 본선전까지는 복면 착용이 허용되는 대회다 보니, 개나 걸이나 다 쓰고 나오더라. 주최측에서도 막지 않은 걸 내가 뭐라할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숟가락 살인마 컨셉만은 용서 못하지.’
‘평범한 수저로 일격에 제압’이라는 컨셉은, ‘어떻게 하면 나를 가장 힘숨찐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각고의 고민 끝에 나온 컨셉이다. 표절은 용서 못한다.
물론 이걸 실제로 하는 미친놈은 아마 나 밖에 없겠지만.
“정지.”
딴에는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관객석의 입구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런 내 앞을 진행요원 둘이서 막아섰다.
“관람권을 제시하시오.”
“… 아.”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무신제 관람은 유료였다.
나는 도전자로서 들어갔던 거라 관객용 입장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아까 받았던 도전자 증명서를 보여줬다.
그러나 진행요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죄송합니다. 관객석은 원칙상 관람권 소유자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쩝. 알겠수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도전자님.”
진행요원들이 깍듯이 90도 인사를 박았다.
내가 무신제 도전자인 걸 알자마자 태도가 급변하는군. 다들 진지하게 임하는 무신제를 너무 장난처럼 즐기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싸움구경이나 하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털레털레 적랑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어머 정용님! 왜 여기 계세요? 그새 광탈하셨어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스나만 없었다면 말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번쩍 손을 들었다.
“오오. 세스나.”
뭐지. 세스나는 이미 안에서 관람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의 질문에는 재깍 대답해줬다.
입가엔 의기양양한 미소를 두른 채였다.
“광탈은 무슨. 2회전까지 광탈시키고 조기퇴근한 거야.”
“아아! 정말요?! 너무 아쉽다! 그걸 봤어야 했는데!”
“왜 밖에 나와 있냐? 싸움구경 질렸어?”
“아뇨, 그게 아니고… 제가 신세지던 여관에 잠시 작별인사 드리러 갔거든요.”
“아하.”
그러고 보니 일하던 여관이 있다고 했나. 그녀도 여러모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있었구나.
나는 납득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세스나가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내게 툭 물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오늘 남은 경기 구경하시러 온 거 아니에요?”
“맞는데… 관람권 없으면 못 들어간다 하더라.”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세스나가 방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꺼내든 종이 하나를 진행요원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진다.
“오, 오오옷…! 이, 이건…!”
뭐지. 전설의 누룽지탕이라도 먹은 마냥 찰진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진행요원들이 이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박았다.
“적랑의 기사님 손님분이시군요.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에요. 들어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세스나는 두 손을 흔들어 인사에 답해준 뒤, 나를 이끌고 관객석 입구로 진입했다.
여기서도 결국 인맥이 승리하는군. 변경백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러올 줄이야. 내가 진짜 라인을 잘 타긴 잘 탔다.
가면서 나는 세스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설백이랑 루시는 관람석에 있어?”
“아뇨. 설백 씨는 그… 칠마존? 그분한테 반지의 해주를 받는 중이구요. 루시 씨는 사람 많은 게 질색이라고 애초에 안 왔어요.”
“그렇군….”
루시는 인파에 휩쓸리면 멀미를 오지게 하더라. 30년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대마왕 주제에.
아마 마력이 고갈된 상태라 그렇지 싶긴 한데… 생각해보니 걔는 지금까지 왜 세상을 정복하려 한 걸까. 나중에라도 한 번 각 잡고 물어봐야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원래는 저 혼자만 오게 될 예정이었는데, 카르할라스님이 같이 동행해주셔서 공짜로 들어오게 됐지 뭐예요. 완전 땡잡았어요!”
“그러셨구만.”
“네! 헤헤.”
나는 세스나가 해준 얘기들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 순간.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객석을 가리켰다.
“도착했어요. 여기에요!”
“오오. 진짜 잘 보이네.”
도착한 곳은 경기장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데다, 레비아탄에서 내려온 대형 수정거울도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대회의 전경에 감탄사를 흘리자니. 세스나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덧붙였다.
“후후. 카발리어의 관계자들만 앉을 수 있는 특별석이래요.”
“인맥이 좋긴 좋구만. 진짜로.”
“생각해보면 이게 다 정용님 덕분이네요! 고마워요 정용님. 후후.”
나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내 세스나가 쪼르르 달려가 자리에 앉더니, 그 옆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자자, 여기! 제 옆에! 앉으시면 돼요!”
그녀가 가리킨 좌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즉시 웃음을 잃었다.
… 적랑이다. 미미한 웃음을 두른 적랑이 카르할라스와 함께 거기에 앉아 있었다.
“… ?!?”
잠깐 뇌정지. 상황이 이해가 안 간 나머지 몸이 굳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적랑의 유유자적한 목소리가 들쑤셔왔다.
“만나서 영광일세. 피에 젖은 달그림자 양반.”
숨이 턱 막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가공할 쪽팔림이 휘몰아친다.
이런 미친. 내가 피젖달인 건 어떻게 알았대. 카르할라스가 나 출전하는 거 비밀로 해달라 그랬는데. 티 날만한 행동을 내가 했던가? 아닌데. 분명 안 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눈부터 깔았지만.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눈초리가 피부로 느껴졌기에 금세 관뒀다.
이건 추궁당하겠군. 히어로 센스가 확신에 가까운 경고를 보내왔다.
“일단 앉게. 이렇게 된 거 경기나 보면서 얘기하지.”
“… 넵.”
나는 얌전히 적랑의 옆에 앉았다. 가시방석에 앉는다는 게 딱 이짝이군. 빵댕이가 따끔따끔한 것이,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와중에 적랑이 태연작약하게 말문을 텄다.
“오늘 아침에 말일세. 자네를 설백 양과 함께 국빈 회의의 중요 참고인으로 데려가려 했더니. 자네가 안 보이더군.”
“저, 저런.”
“카르할라스에게 몇 번을 캐물어서야 간신히 자네 소재를 파악했다네.”
야 카르할라스. 나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더니 네가 다 불어버렸냐? 그렇게 안 생겨서 생각보다 지조가 없다?
나는 흘깃 카르할라스를 노려봤지만. 아직 적랑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자네 정치에 관심 있는 친구였나?”
“… 아뇨.”
“솔직히 명예나 지위에 관심있어 보이지도 않았네만. 내가 잘못 봤나?”
“잘 보셨는데요.”
“귀찮은 일도 싫고. 숭고한 희생 같은 건 특히 싫어할 것 같은데.”
“족집게시네요.”
그쯤에서 적랑의 눈초리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그럼 무신제엔 왜 참가한 겐가.”
“… 그게, 그냥 급전 좀 땡겨볼까 해서… 데헷.”
분위기가 싸해졌다. 왜지. 데헷이 뇌절이었나.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저 시선은 내 말을 못 믿고 있는 거다. 아마 옆에서 카르할라스가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체 뭘 어떻게 말했길래 분위기가 이러냐 카르할라스.
“흐음.”
내가 카르할라스를 재차 노려보자, 적랑의 눈에서 압박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무신제 참가가 불법도 아니고 말이야.”
“그, 그렇죠? 하하.”
“이거 하나는 좀 물어봐야겠네. 피에 젖은 달그림자? 그 지랄맞은 이명은 뭔가? 그것도 내 딸의 지시였나?”
“…….”
그 질문만큼은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그냥 노코멘트. 카르할라스가 시킨 걸로 오해하도록 냅뒀다.
그러자 적랑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순간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 하나만 알아두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충 경기장의 아무데나 쳐다보며 필사적으로 적랑을 무시하고 있던 그 순간.
두둥. 음산한 효과음과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튀어나왔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21일, 20시 58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수도 크로스페이드, 무신의 투기장]
“난 거짓말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네.”
적랑이 나지막이 남긴 한 마디가 멍한 머리로 윙윙 울렸다.
와아아― 하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그것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
풀려버린 두 눈은, 시야에 가득찬 회귀점 알람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