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로망 폭발 무투대회
다음날.
무신제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과 의뢰주의 요구사항을 모두 숙지한 뒤. 출전 준비를 하고 있던 내게 카르할라스가 찾아왔다.
“있잖아… 정용. 잠깐 괜찮아?”
참고로 카르할라스에게는 어거지로 반말을 시켜놓은 상태다.
왜냐고? 그녀도 ‘정용님’ 이지랄 하면서 극존칭을 하려고 하길래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정용님 3스택은 버틸 자신이 없다. 나 같은 진성 밑바닥 인생들은, 오히려 팔자에 없는 존칭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고.
결과는 만족스럽다. 조만간 설백과 세스나의 말투도 개조시킬 요량이다.
“어 왜, 카르.”
“그… 여기 적은 거. 그대로 제출하려고?”
종이 한 장을 들고 머뭇거리는 카르할라스. 무슨 종이인고 하니, 내가 아까 넘겨준 출전자 인적사항이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건 왜 아직 제출 안 했냐?”
“그, 그게….”
카르할라스는 종이를 한 번 더 훑어보더니, 다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곤란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가명(假名) 출전은 대회법상 허용되니까 괜찮은데… 가명을 정말 이걸로 할 거야?”
“문제 있냐.”
“문제는 없지만….”
“없지만?”
“피, ‘피에 젖은 달그림자’라니…. 이,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그 부분이 문제였군. 나는 해명을 위해 입을 열었고.
―푸헤헤헤! 피젖달은 선넘긴 했지! 오우야 X바, 내가 다 소름 돋네!
해명보다 한 발 앞서 수호 형님이 박장대소했다.
솔직히 반쯤 장난은 맞았는데. 저렇게 대놓고 비웃으니 박정용 고유스킬 ‘뒤틀린 오기’가 불쑥 고개를 든다. 무심결에 부루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왜. 피에 젖은 달그림자가 어때서.”
이런 중2병스런 가명의 복면 사내가 무투대회를 휩쓴다. 그런데 그게 사실 나였다. 그런 상상 중학교 때 한 번씩은 해보잖아. 나만 해봤냐?
어쨌든 그런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왔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냥 그대로 제출해. 가명은 뭐로 하든 상관없다면서.”
“뭘로 하든 상관은 없지만. 이런 오글… 아니! 자, 장황한 가명을 쓰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어서.”
“우리가 새로운 유행의 지평을 여는 거지.”
“아….”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리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끝까지 아득바득 우기며 내 의지를 관철했다. 결국 카르할라스는 완강한 내 태도를 꺾지 못하고 털레털레 되돌아갔다.
그러자니 잠시 후 철커덕. 방문이 다시 열렸다.
카르할라스가 아직 미련을 못 버렸나 싶어 퍼뜩 돌아봤더니. 거기엔 설백과 세스나가 서 있었다.
“이제 출발하시나요 정용님?”
“와아. 정용님이 대회에서 싸우시는 모습, 기대되네요!”
의외로 두 사람은, 내 갑작스러운 ‘상금이 탐나서 무신제 출전한다’ 선언에도 순순히 받아들여줬다. 오히려 응원을 해줬다.
내가 왜 그런가 슬쩍 물어본 결과. 그 이유는 대충 이랬다.
“그… 적랑님이랑 대련하시는 걸 보고 느꼈어요. 정용님은 이미 저랑 차원이 다른 경지에 있다는 걸요. 그러니까, 저도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제가 말린들 들으실 분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정용님이 쉽게 당할 것 같지도 않구요!”
뭐 말리지 않은 이유는 살짝씩 달랐지만. 아무래도 적랑과의 대련에서 두 사람이 느낀 것들이 있는 듯하다.
특히 설백은 카르할라스 주변을 기웃거리며 친해지려 부던히 노력했는데. 카르할라스에게서 들은 바로는, 단시간에 강해지는 비결 같은 것을 물어봤다고 한다.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그녀다운 생각이라서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설백. 너는 오늘 적랑님한테 꼭 그 반지를 해주해달라고 해. 알겠지?”
“네. 그건 걱정 마세요. 저도 한 시라도 빨리 빼 버리고 싶은 걸요.”
“좋아.”
나는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확답을 받아낸 후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올게.”
나는 손을 휘적거려 두 사람에게 흔들어줬다.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그에 응했다.
“힘내세요 정용님. 응원할게요!”
“상금 타서 저희 맛있는 거 사주세요! 응원석에서 지켜볼게요!”
설백과 세스나가 격려의 말을 쏟아냈다. 나는 믿음직하게 따봉을 치켜들어주고, 곧장 경기장 방향으로 향했다.
와아아아―! 멀리 경기장 쪽에서 먹먹한 고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 *
“본선 마지막 경기까지 가서, 카발리어 타이틀전 직전에 기권….”
나는 개회식 참석을 위해 수도 중앙의 경기장으로 향했고. 카르할라스에게 하달 받은 미션을 되새김질 했다.
전날, 카르할라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해주던 상황이 머릿속을 채웠다.
―예선은 네가 보여준 실력이면 어려울 게 전혀 없을 거야. 그리고 본선에 올라가면, 내가 말한 상대들을 지명해서 돌파해주면 돼.
―그리고 카발리어전에선… 네가 카발리어가 될 생각이 있다면 도전하고. 그럴 생각이 없다면 기권해도 괜찮아. 알겠지?
카르할라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무신제는 예선전, 본선전, 그리고 카발리어전까지. 총 세 단계로 나뉜다.
‘우선은 예선전.’
수많은 쭉정이들을 걸러내는 단계다. 제비뽑기로 무작위 선발된 상대를 토너먼트 형식으로 쳐부수고 올라가, 최종 선별인원을 500명 안팎까지 줄인다.
‘그 다음이 본선전.’
예선전이 토너먼트였다면, 본선전은 변형된 리그 형식이다. 선발된 500명의 도전자가 싸울 상대를 자기 의지로 골라 10경기를 치른다. 같은 선수 중복 대전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10전이 끝난 선수는 결과가 어떻든 거기서 시합 종료. 10전의 결과로 승점을 매기고, 그 순위로 최후의 100명을 발탁한다.
단 여기서 특수 규칙이 하나 있는데. 만약 9전 9패를 해서 승산이 절망적이라도, 현역 카발리어를 대전 상대로 불러내 승리하면. 그 사람은 예외적으로 무조건 승자조에 편입되고, 대신 기존 승자조의 최하위 한 명이 탈락한다.
‘마지막 카발리어전.’
여기까지 살아남은 100명 중. 카발리어에 도전 의지가 있는 사람은, 사실상 ‘예비 카발리어’다. 카르할라스의 말에 따르면 여기부터가 무신제의 꽃이란다.
본선전을 통과한 예비 카발리어 100명이 현직 카발리어와 본격적으로 대전한다. 왕좌를 꿰차는 혈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만의 랭크 매치이자, 정권 교체로 돌입하는 격인데. 목숨을 건 경쟁을 뚫고 온 최후의 100인이니만큼 경기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고. 신세력과 구세력의 대결이라는 구도 때문에 인기도 폭발한다고.
‘어쨌든 나는 본선전까지만 이기면 되니까. 그 뒤론 알 바 없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카발리어고 나발이고 모기 뒷다리만치도 관심없다.
무조건 카발리어전 가기 전에 기권할 거다. 상금이나 상품 나오는 것도 딱 본선전까지니까 그래도 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매력적이다만. 카발리어라는 벼슬은 따르는 책임이 너무 크다.
‘적랑급의 카발리어도 지방파견 나가는데. 견적 딱 나오지.’
왜 나가 있었겠는가. 시도 때도 없이 대륙 곳곳에 창궐하는 마왕을 막기 위해서다. 아마 지금은 적랑이 돌아온 대신, 다른 카발리어가 파견을 나갔겠지.
쉽게 말해 근무교대를 한 거다.
카발리어는 마르크트레스를 수호하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자, 가장 단단한 방패.
말은 좋은데. 즉 카발리어의 주업무는 뭐 대단한 게 아니다. 중앙에 남은 놈들은 정치. 지방 파견나간 놈들은 경계근무다.
한국의 gop근무병들이 발작하는 북괴들 때문에 경계근무를 서듯. 다양한 장소에서 보초 서는 일개 병사새끼. 차이가 있다면 지위와 명예, 그리고 보수금액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뿐.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열정페이처럼 보이는, 소방관 같은 숭고한 직종.
‘미텔란트에서도 한 달 반 만에 마왕을 11번 만났는데.’
그걸 평생하라고? 극구사양이다.
국민들의 존경? 개나 갖다 줘라. 아마 개들도 질색할걸?
나도 군생활 최전방에서 해서 아는데. 시도 때도 없이 비상출동하는 게 진짜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여기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경기장에 도착했고. 설렁설렁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가만히 탄성을 흘렸다.
“이야. 생각한 그대로 생겼네.”
전형적인 콜로세움처럼 생긴 원형 경기장인데. 크기가 진짜 어마어마하다.
지구에서도 이런 규모의 경기장은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거의 수직으로 꺾어야 건물의 끝자락이 간신히 가늠될 정도다.
내부에는 여러 경기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기 위함인지, 사각형 경기장 수십 개가 늘어서 있었다. 관중석에는 벌써부터 자리잡고 앉은 관중들이 수두룩했고. 제들끼리 술렁이며 들뜬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전자님들은 이쪽으로 와주십쇼!! 개회식 순서와 기사의 경례법을 간단히 알려드립니다!”
“관람하실 분들은 이쪽입니다!”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불응시 무력 진압하겠습니다!!”
살벌한 기운을 흩뿌리는 진행요원들이 인원들을 인솔하고 있다.
무력 행사 운운하는 게 농담은 아닌지, 다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평균 레벨이 200을 웃도는 양반들이다.
‘레벨 200쯤 되는 고수가 흔하진 않을 텐데.’
저건 좀 놀랍다. 잘도 여기저기서 긁어 모아왔군. 정말 어지간히 큰 행사긴 하구나.
새삼 실감하며, 나는 진행요원들의 인솔을 따라 무신제 개회식을 참가하러 갔다.
“오. 자네도 도전자인가?”
그렇게 털레털레 걷고 있자니.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아저씨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흘깃 시선을 돌렸다.
“네. 근데 누구세요.”
뭐지. 그냥 어디에나 있을법한 배불뚝이 아저씨였다.
나이는 한 40대 초반쯤 됐을까. 키가 나보다 살짝 작고, 덩치는 펑퍼짐하지만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그런 몸 위로 마을 농부1 같은 멜빵바지 패션을 걸쳤다.
‘한국인… 은 아닌 거 같고.’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을 가졌는데, 그 검은 머리칼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자고로 옷은 반쯤 벗겨지면 두 배 야해 보이고. 머리카락은 반쯤 벗겨지면 두 배로 비참해 보이는 법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리색이 비슷하길래 말 좀 걸어봤네. 반가우이. 난 프레들일세.”
수염 가득한 얼굴에 호탕한 미소를 띄운 아저씨. 그가 선뜻 손을 내밀어 왔다.
그냥 붙임성이 지나치게 좋은 아저씨인가 보다. 이 아저씨도 무신제에 참가하는 건가?
예선 참가자만 1만에 달한다 그러더니. 정말 등급이 달인 이상이면 너도나도 다 참가하는 모양이다.
“… 박정용입니다.”
“바크 존뇽. 특이한 성씨구먼? 용사 출신인가?”
존뇽은 뭐냐. 곤뇽 친구냐?
게다가 그쪽이 성씨인줄 알고 있다. 하긴 당연한가? 나도 수호 형님 놀릴 처지는 못 되겠다. 앞으론 나 소개할 때 ‘존뇽 바크’라고 하든 해야지 원.
나는 체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편할 대로 부르십쇼.”
“그래 바크. 컨디션은 좀 어떤가?”
“그럭저럭요. 아저씨는요?”
“나는 최상이지! 오늘은 정말 20년만에 본선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네!”
“아….”
“상금 타가면 마누라도 한동안 바가지 안 긁겠지… 우흐흐.”
20년이면, 이게 5번째 참가라는 소리. 이 대회 터줏대감인가 보다.
게다가 참가 사유가 지극히 서민적이어서 호감이 간다. 방금 대화로 아저씨에 대한 친밀도가 대폭 상승하는 한 편. 걱정도 불쑥 들었다.
‘이거 사람 목숨도 픽픽 죽어나가는 살벌한 대회라고 들었는데….’
뭐, 바가지 긁히기가 죽기보다 싫은가 보지.
지구와 이세계 모든 가장들 파이팅이다.
‘근데 기분이 묘하네….’
시험의 장막 개노답 형제들. 변경백과 적랑. 그리고 이 아저씨까지.
막노동판에서 3년 내내 인생막장 아저씨들이랑 부대껴서 그런가. 어째 이세계까지 왔는데 또래보다 중년 아저씨들이랑 자주 엮이는 거 같다?
나는 혼자 몸서리를 쳤고. 아저씨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개회식은 5번째 참가하는데도 아직 가슴이 설레는구먼.”
“개회식에서 대단한 거라도 하나요?”
“뭐 별 거는 없네. 카발리어들의 열병식이랑 참가자들이 경례를 주고받고. 상금이랑 상품 소개하고… 그래! 가장 볼만한 건 운터란트와 용제국의 공중곡예랑 미텔란트의 마법쇼지! 그게 끝나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마지막일세.”
“… 오호. 그렇군요.”
옘병.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까지 한다는군. 나는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박힌 멜로디를 쫓아내느라 머리를 세차게 저어야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은, 이내 드높이 치솟은 관중석 끝자락에 향했다.
“그런데 개회식이라… 뭐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이거?”
경기장이 커서 수용인원이 많은 건 좋은데. 하도 크다보니 뒤쪽에 앉은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일 거 같다. 여기에 설마 거대 전광판 띄울 기술 같은 게 있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걸어가는데. 문득 탄성을 내지른 프레들이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 그거라면… 양반은 못 되는군. 저기 마침 오고 있네.”
“네…?”
문득 경기장 위로 훅,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프레들은 자신이 가리킨 하늘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자동적으로 쩍 벌어진 입으로, 간신히 프레들을 불렀다.
“아저씨. 저, 저게… 뭡니까.”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날아오고 있다.
처음 봤을 때 들었던 감상은 ‘하올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다리 대신 거대한 프로펠러 수십 개와 날개가 달려있다는 점. 훨씬 세련된 느낌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수많은 함포와 주포로 단단히 무장했다는 점이다.
무신제의 경기장보다도 한층 거대한 미확인 비행물체가, 웅장한 소리와 함께 경기장의 하늘을 뒤덮었다.
“기함(旗艦) 레비아탄! 이 파라이소의 모든 용사들의 기술력을 닥치는대로 빨아들여 만들었다는 최강의 마도공학병기이자, 요새화된 수도! 운터란트의 움직이는 심장일세!”
프레들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면 자기가 만든 줄 알겠다. 그냥 넋나간 내 반응이 재밌어서 저러는 듯하다.
나는 멍청하게 탄성을 흘렸고. 다시 홀린 듯이 하늘을 쳐다봤다.
―용제국은 몰라도. 운터란트는 확실히 특이하긴 하지.
제논이 헤어지기 직전에 던졌던 말이 뇌리를 훌쩍 스쳐지나간다.
특이하기 짝이 없구나 제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