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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21화 (97/280)

121화 눈동자 꺼라

우리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에 방을 하나씩 얻었다. 지금은 적랑의 개인 단련이 끝날 때까지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개인 단련이 끝날 생각을 않는다. 이미 날이 꼴딱 새고 밤이 깊었는데 수련장 쪽에선 감감무소식이다.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 됐군.’

수도에서 머무는 내내 노숙을 했어야 될 지경이었는데. 적랑과의 대화가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주먹으로 나눈 대화였긴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지. 나는 복잡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단련 시켜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되나….”

그렇다. 애초에 난 무신제 구경하자고 찾아온 게 아니다. 빨아먹을 게 있어서 온 거다.

하지만 케른에서 적랑의 반응을 생각하면 쉬워 보이진 않는다. 제자를 받을 생각도 없어 보였고… 애초에 제자를 받을 성격도 아닌 것 같고.

부탁할 방법을 고민하며 한숨을 내뱉고 있자니. 문득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흘깃 시선을 돌렸다.

“예. 있습니다.”

“카르할라스입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카르할라스가 누구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하얀 머리칼의 여자 얼굴을 떠올려냈다.

이집 딸내미였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퍼뜩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십쇼.”

“실례하겠습니다.”

카르할라스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천천히 카르할라스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아한 발걸음으로 사뿐히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침대에 슬며시 걸터앉는다.

‘이제 보니… 적랑이랑 느낌이 많이 다르네.’

외관은 거의 여자 적랑을 회춘시켜 놓은 꼴이다.

하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절이 배어 있는 게, 특유의 야생동물 같은 기운이 없다. 딱 봐도 곱게 자란 양갓집 규수라는 느낌이다. 옆에 붙어 앉으니 뭔가 좋은 향기도 난다.

참고로 태생이 쌍놈인 나한테는 좀 거북한 부류의 인간이기도 하다.

‘미미르의 눈.’

거북한 인간에 대한 방어본능이 발동됐다.

정신차려보니 그녀의 정보를 스캔하고 있었다.

[명칭: 카르할라스]

[별칭: 어린 늑대, 적랑의 딸]

[LV. 221]

[체력: 1340/1340 마력: 880/880 신체상태: 정상]

[힘: 208 민첩: 301 지능: 117]

‘좀 친다?’

세스나는 확실하지 않으니 둘째쳐도. 설백보다는 확실히 강하다.

게다가 레벨이 220이면… 불사교와 혈전을 치르기 전의 나보다도 훨씬 셌다. 과연 적랑의 딸. 썩어도 준치라 이건가.

‘게다가 히어로 센스가 없다.’

나는 전에 봐놨던 적랑의 스탯을 떠올렸다.

[인물 정보]

[명칭: 베르슐츠]

[별칭: 4025703번째 용사, 적랑(赤狼)의 기사, 제13위 카발리어, 무신(武神)]

[LV. 379]

[체력: 3750/3750 마력: 1390/1390 신체상태: 정상]

[힘: 536 민첩: 621 지능: 109 히어로 센스: 43]

적랑은 분명히 히어로 센스가 있었다. 그는 이세계에서 소환된 용사다.

그렇다면 이 애는 원주민과 혼혈인가? 부모 중 하나가 용사더라도, 2세부터는 평범한 원주민처럼 취급되는 건가?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뚫어지는 시선에 슬쩍 눈길을 피하는 카르할라스.

나는 퍼뜩 헛기침을 하고 곧장 사과를 박았다. 워낙 오래 쳐다봐서 기분이 상했을지 모르니, 기분 띄워줄만한 칭찬도 곁들였다.

“아뇨. 죄송합니다. 너무 예쁘길래 무심코.”

“네? 아, 그… 가, 감사합니다.”

어째선지 그녀는 더욱 나와 거리를 벌렸고. 완전히 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슬쩍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대놓고 고개를 팩 돌려버린다.

뭐지. 외모보단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그런 부류인가? 지뢰를 밟았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밤도 깊었는데.”

이렇게 되면 화제를 돌려버려야 한다.

작전이 먹혔는지 카르할라스는 곧 내 쪽을 돌아봤다.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달싹이는 입술에는 어색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버님의 지인이신데다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시는데….”

“어 그래. 뭐하러 왔냐.”

전광석화 같이 말을 깠다.

사실 카르할라스가 말 안 꺼냈으면 조만간 내쪽에서 그냥 깔 생각이었다.

원래 나 같은 밑바닥 인생일수록, 잘나 보이는 연놈들은 일단 깔보고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노가다판에서 배운 생존 전략이랄까. 일종의 허장성세다.

신 언저리인 미네르바한테도 그렇게 개겼는데. 나보다 약한 놈들이야 오죽할까.

“… 아, 그, 그게.”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였지만. 이내 고개를 휘젓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보니 차분한 은색 눈동자가 적랑이랑 진짜 닮았다.

“아까 아버님과 대련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요.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 대화의 목적이 뭐냐 이거지.”

“아.”

“본론으로 넘어가자. 친목질 하자고 온 거 아니잖아.”

나는 칼같이 파고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정곡을 찔렸는지 몸을 움츠렸고. 팔다리를 안절부절 못했다.

지구에서 24년. 이세계 1년차로 단련된 날카로운 호구센서를 속이려 하다니.

10년은 이르다 카르할라스.

‘나한테 접근하는 미녀가 속셈이 없을 리가.’

… 사실 날카로운 감각 같은 거 필요없다. 나처럼 살면 저절로 깨우친다.

지금껏 나한테 접근하는 모든 여자가 그랬으니까. 그냥 일단 속내를 의심하면 대부분 들어맞는다. 잠깐 눈물 좀 닦고.

“네. 사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 염치불구하고 찾아왔어요.”

내가 상처뿐인 승리감에 빠져 있자니. 카르할라스는 우물쭈물 이실직고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즉각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데. 말해봐.”

“들어… 주실 건가요?”

“봐서.”

웬만한 거면 들어줄 거다. 카르할라스가 예쁘니까.

미녀가 간절하게 부탁하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간다. 호구가 괜히 호구가 아니다. 이러고 사니까 호구라고 욕먹는 거다.

곱상한 얼굴을 물려준 적랑한테 감사해라 카르할라스.

“저, 다름이 아니라… 아까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무위를 믿고,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엄청난 무위까지야.”

“무신제에 참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음?”

좀 이해 못할 부탁이 나왔다. 나는 곧장 눈썹을 틀어올렸다.

슬쩍 몸을 움직여 카르할라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지만, 아까처럼 떨어져 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한층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에 대고 반문했다.

“내일부터 열리는 그 무신제? 도전자 자격으로 참가하라고?”

“… 네. 그렇습니다.”

“이유는?”

난 이유 따위 묻지 않는 흥신소가 아니다. 이런 뜬금없는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이니 알 권리는 있다.

하지만 카르할라스는 표정을 흐리며 머뭇거렸다.

“혹시 내일 열리는 국빈회의에… 아버님과 같이 참석하시나요?”

카르할라스가 어렵사리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 유난쩍은 반응에 잠시 갸웃거렸고. 이내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내가 거길 왜 참가해. 나라님도 아닌데.”

“아. 그럼 지금은 말씀드리기가 좀….”

“뭐야. 이유도 모른 채로 그 귀찮은 짓을 하란 말이야?”

“그, 그게… 죄송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카르할라스는 이유를 얼버무리면서도 연신 나를 힐끔거리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내가 거절할까봐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저렇게 간절한데도 이유는 말해주지 못하는 건가. 침음이 흘러나왔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보지?’

원래 나 같은 놈이 저러면 ‘드럽게 비싸게 구는 것’이고. 카르할라스처럼 잘난 놈들이 저러면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이다.

나도 평소에 외모지상주의 엿같다 개같다 하는데. 현실이 이렇다.

‘… 흐음. 그래. 그러면 되겠군.’

그러다 문득, 기발한 생각 하나가 치고 들어왔다. 잘게 떨리는 카르할라스의 눈동자를 보며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곧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참가해줄게. 사실 이유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대신. 나도 자선사업가는 아니니 대가는 받아야겠다.”

도도한 이미지가 와장창 박살나도록 밝게 웃던 카르할라스였지만. 내 입에서 ‘대가’라는 말이 나오자 곧장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가 양팔로 몸을 감싸며 내게서 슬쩍 떨어졌다.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대가라니… 저,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눈동자 꺼라.”

대체 뭘 상상했길래 저러냐.

아니, 솔직히 예상되긴 한다만. 내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야스각 보는 정력왕처럼 생겼냐? 그럴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니라서 더 억울하다.

“그런 거 아니야! 너희 아버지! 적랑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다고!”

“네에? 아, 아버님의 몸을 노리고…!?”

“뭔 미친 개소리야?!”

얘 왜 사람을 금발 태닝 양아치로 만드냐.

카르할라스를 매개로 적랑과 더 단단한 연줄의 빌미를 잡고, 나아가 가르침까지 받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다.

나는 내 의도를 구구절절,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아아… 그렇군요. 그, 그런 쪽이라면야…. 저도 아버님께 최대한 잘 말씀드릴게요.”

카르할라스는 가슴 깊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체면치레는 됐군. 격투대회 한 번 참가해서 적랑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이러면 오히려 내쪽이 남는 장사다.

머리 굴려야 하는 문제를 몸으로 때울 수 있게 됐으니까.

“잘 부탁한다.”

나는 주먹을 쥐어 카르할라스 앞에 내밀었다. 적랑을 따라한 것이다.

“…?”

카르할라스는 성경 선물 받은 스님마냥 내 주먹을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자기 주먹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턱, 작고 하얀 주먹이 슬며시 내 주먹과 맞부딪쳤다.

반응을 보니 적랑은 의외로 자기 딸내미랑은 이거 잘 안 하나 보다. 미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뭐랄까. 쥐어짜내듯이 어색한 미소였다.

“무신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좀 있다 본격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그, 성함이?”

“박정용. 너는 카르할라스지?”

“네. 편하게 부르고 싶으신대로 부르시면 돼요.”

“그럼 카르할라스는 너무 긴데, 줄여서 카르로 불러도 되냐?”

“네. 그러세요. 후훗.”

그런 대화가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갔다.

역시 미녀와의 대화는 언제해도 최고다. 늘 새롭고 짜릿해.

뭐 어쨌든.

그렇게 나는, 예정에도 없던 무신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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