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다시 만난 적랑
“… 예.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무신의 성전 앞. 나는 경비병과 눈싸움 끝에 입장 허가를 받아냈다.
의기양양하게 어제 그 경비병에게 내가 따온 등급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경비병은 어제와 다른 사람이다.
덕분에 나는 좀 김새는 느낌과 함께 무신의 성전으로 진입했다.
“국가의 중심부치고 경비가 굉장히 허술하네요. 이 나라 괜찮을까요?”
세스나가 관문을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로 대꾸해줬다.
“경비가 좀 허술하면 어때. 여기 거주민들이 담당일진들인데.”
“담당일진…? 그게 뭐예요?”
“이 나라 최고로 무서운 놈들이라고.”
“아하. 하긴 그건 그렇네요!”
세스나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무신의 성전 내부로 들어온 우리 중 가장 먼저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도시 안의 또 다른 도시 같아요!”
세스나가 내뱉은 감상은 그것이었다. 나도 대충 비슷한 감상이 들었다.
멀찍이서도 보였던 거대한 기와지붕의 탑이 중앙에 굳건하게 서있고. 그 주위로는 민가치고는 으리으리한 사택들이 들어서 있다. 거리는 철저하게 관리받고 있는지 굉장히 청결했다.
나는 서양풍과 동양풍이 절묘하게 섞인 그 건물들을 보며 세스나에게 대답해줬다.
“무신의 성전 자체가 카발리어의 집성촌이라고 하더라. 아마 여기 늘어서 있는 저택들이 전부 카발리어들의 개인 주택일 거야.”
“와. 그렇군요. 저 중앙에 특이하게 생긴 건물은요?”
세스나의 손가락이 우뚝 솟은 기와 건물에 향했다. 나는 히크와 제논에게 주워들었던 것들을 총동원했다.
“거인의 탑. 카발리어들이 국정회의를 하는 곳. 4개국 국빈 회의도 저기서 열린대.”
세스나는 물론이고 설백도 새삼스럽게 거대한 탑에 시선을 던졌다.
세스나가 “정용님 박식하시네요!”라며 띄워줘서 콧대가 석 자 정도 늘어났다. 평소에 정보 수집하던 버릇 덕에 가오 좀 챙겼군.
‘… 아니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는 대궐 같은 사택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적랑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사택의 입구 부분에 주인의 명패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어서,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물총새의 기사 - 아코르스]
[백은의 기사 - 기드나 폴 / 황금의 기사 - 에오스 폴]
[검림(劍林)의 기사 - 가트렉 로난]
명패는 대부분 ‘무슨무슨 기사’라는 이명 옆에 이름이 적힌 형식이다.
저 이명은 어떤 기준으로 붙는 걸까. 성향? 아니면 외형? 수십의 명패들을 스쳐보니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이름 없는 기사 ― 포티아]
어떤 명패에는 이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이름 없는 기사’ 자체가 이명인가? 딱히 관심은 없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깊숙이 들어간 뒤에야 겨우 발걸음을 멈춰섰다.
[적랑의 기사 - 베르슐츠]
“역시 적랑이란 건 이명이었네요.”
설백이 팻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하긴 아메리카 원주민도 아니고, 무슨 자식새끼 이름을 ‘붉은 늑대’로 짓겠냐. 나는 실실 웃으며 대문 옆에 떡하니 걸려있던 작은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계세요?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딸랑딸랑. 초인종이 맑은 소리로 울려 퍼진다. 나는 대문을 빤히 쳐다보며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니 뒤에서 마왕이 기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용사. 그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는 말은 대체 뭐냐?”
“나 살던 세상에선 수상한 놈들의 공식 멘트지.”
“엑….”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루시. 나는 깔끔하게 무시해준 채 초인종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후 문이 열렸고. 소녀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적랑의 기사님 사택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고급스러운 비단 드레스를 입고, 하얀 생머리를 비녀로 고정한 게 인상적이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는 은색이었다. 키는 적당하고, 체격은 탄탄한 편. 외관상 나이는 루시랑 비슷한 정도. 적랑이 모에선을 쬐면 저렇게 되지 싶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까딱 숙이며 용건을 내뱉었다.
“적랑님 만나러 왔습니다. 혹시 계신가요.”
“아버님은 본관의 수련장에서 개인 단련 중이십니다. 기별을 넣어드릴까요?”
아버님이라.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하며, 외모도 비슷하다 싶었더니 딸내미였군.
나는 곧장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바로 좀 부탁드립니다.”
“어떤 분께서 오셨다 이르면 될까요?”
“케른의 잔.악.무.도 학살자가 도장깨기 하러 왔다고 해주십쇼.”
“… 어, 어? 네, 네에….”
적랑의 딸내미가 뇌정지 온 얼굴로 탄성을 반복했지만. 이내 얼떨떨하게 대문 안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히죽거리는 내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든다. 설백이었다.
“저, 정용님. 굳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점수를 깎아먹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미안하다. 패기 보여주려고 어그로 좀 끌었다.”
“아… 네.”
설백도 아까 루시와 비슷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노빠꾸 노퓨처. 예스 상남자.
곧 덜컹. 대문이 다시 열리며 아까 그 소녀가 얼굴을 드러냈다.
“저, 아버님께서…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소녀의 얼굴엔 굉장히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이런 미친놈이 진짜로 자기 아버지의 지인이라서 놀랐겠지.
“예. 그럼 염치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들도 조심스럽게 내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너무 당당한 행색이어서인지, 눈을 뻐끔거리던 적랑의 딸내미였지만. 곧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할게요.”
우리는 넓게 펼쳐진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부지의 후미진 곳까지 이끌려 들어갔다.
부지의 구석탱이에 덩그러니 놓인 수련장에서는 둔중한 타격음과 묵직한 진동이 간간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땅울림이 입구 바깥까지 들려오는 박력을 보니 적랑 본인이 내는 소리 같다.
“들어가시죠.”
적랑의 딸내미는 수련장 입구를 열어주고는 그 옆에 다소곳이 섰다. 나는 예의상 목례를 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입하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피부를 찌르는 한 편. 그 열기의 중심에 선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확대된다.
“… 도장깨러 왔습니다. 적랑님.”
“그래. 일주일 만이로군.”
웃통을 까고, 온몸의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적랑이 그곳에 있었다.
주변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수수깡처럼 우그러져 뒹굴고 있었다. 인형의 복부에는 하나 같이 거대한 말뚝에 꿰뚫린 흔적이 있었다.
적랑의 건틀릿 속 파일벙커에 얻어맞은 흔적. 저걸 직접 맞아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쓰러진 인형들이 마냥 남일 같지가 않다.
“…….”
그는 케른에서 헤어질 때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먹을 치켜들어 내쪽으로 내밀었다. 나도 슬쩍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니 히죽. 적랑의 입가에 뒤틀린 웃음이 걸렸다. 호승심이 활활 타는 미소였다.
“그럼 어디, 도장 깨보시게.”
“예?”
“실력 좀 보자 이 말이야.”
“아, 아니.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갑작스런 적랑의 발언에 뒷걸음질을 쳤다. 멋쩍게 웃으며 뒤늦게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리고 직후. 베스타크를 빼들어 횡으로 후려쳤다.
“감은 쓸만하군.”
카아앙!
검과 건틀릿이 부딪친 거라곤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폭음의 여파로 충격파가 터져나간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당도해 주먹을 내지른 적랑. 그 눈에서 이글거리는 야수 같은 살기가 피부를 찌른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전력으로 덤벼보게. 자네의 처우가 이 대련으로 달라질 걸세.”
“… 그러시다면. 사양 않고!”
카가각! 검을 빗겨내 공격을 흘려낸 나는 곧장 백스텝으로 빠졌다가. 기습적으로 지면을 박찼다. 탄환처럼 날아간 내 신형이 적랑과 교차한다.
키이잉!
두 번째로 터진 굉음이 갑작스런 대련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 * *
“하하하하! 왜 그러나. 아까처럼 덤벼 보라고!!”
“크으…!”
나는 호기롭게 소리치는 적랑에게 다시금 달려들었다.
카카앙! 신형이 교차한다. 다섯 번의 합이 찰나에 지나갔다. 나는 옅게 스친 어깨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고. 적랑은 배에 흐르는 선혈을 보더니 더욱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에 즐겁구나! 방금 건 날카로웠다!!”
퍼엉! 그가 다시금 내게 성난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이성이 반쯤 날아간 듯한 저돌적인 공격. 도저히 태세를 가다듬을 시간이 없다.
나는 결국 자세가 무너진 채 그와 다시금 맞붙었다. 퍼걱! 왼팔에 둔중한 통증이 퍼지며 내 몸이 튕겨나갔다.
‘거리 조절이 장난 아니다…!’
이게 진짜 고수의 싸움이구나 싶다.
적랑은 내 공격의 대부분을 흘려내고 있다. 가벼운 풋스텝을 통한 거리조절로, 종이 한 장에 가까운 차이로 항상 공격이 빗겨나간다. 그것이 내 초조감을 한층 부추겼다.
“크욱!”
그러는 와중에 그의 건틀릿이 돌발적으로 급소에 날아온다.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인 공격이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스친다. 매 초, 매 순간마다 눈앞에 요단강이 와리가리 한다.
‘이렇게 되면!’
좀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언제는 안 치사했나.
원래 훈련을 실전처럼 하라고 하잖아. 실전에선 비겁이고 뭐고 없다!
‘물약전사 ON!’
나는 허리춤을 뒤져 곧장 에테르를 빨아재꼈다. 불, 바람, 땅의 에테르가 내 몸을 휘감으며 오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템빨전사 ON!’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망토를 변형시켰다.
시커먼 까마귀 날개가 깃털을 흩날리며 양 갈래로 펼쳐졌다.
“음…?”
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랑이 탄성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놀랄 틈도 주지 않겠다. 내 모토는 졸렬과 비열, 특기는 모략과 기습이니까.
나는 왼손의 에스파다를 적랑에게 냅다 던졌다. 초인적인 스탯 덕분에 에스파다는 광선처럼 적랑의 미간에 쇄도했다.
“흠!”
카앙! 적랑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어렵지 않게 그것을 쳐냈다.
그의 시선이 분산된 틈에 연화를 사용했다. 스슥, 그의 뒤로 고속이동 한다. 검을 찔러 넣는다. 적랑이 예상했다는 듯이 피해내며 반대로 내 얼굴로 건틀렛을 날려왔다.
나는 허리를 꺾어 그것을 피해내는 한편, 찔렀던 검을 그대로 다시 내리쳤다.
‘세븐 소드 피어스!’
카아앙! 휘두른 검은 막혔다. 예상했다. 어차피 진짜는 마력검 쪽이다.
그의 등 뒤에서 생성된 마력검 일곱 개가 적랑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다. 그리고 적랑은, 그 자리에서 풍차처럼 회전하며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어딜!”
카카캉! 전부 적랑의 주먹에 막혔다. 마력검이 흔적도 없이 허공에서 증발한다. 동시에 폭풍처럼 회전하던 그의 건틀릿이 내 관자놀이를 뭉개러 날아온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것을 검으로 받아쳤다.
“크욱!”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른다. 순간 적랑이 땅을 박차고 내 허리를 박살내기 위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공중에서 도망갈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걸렸다.’
미안하지만 내 등의 날개는 장식이 아니다. 나는 주먹이 닿기 직전 몸을 비틀어 날개를 퍼덕였고. 순식간에 그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입장이 바뀌었다. 공중에서 오히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건 적랑이 되었다.
‘페이탈 쏜즈.’
파바바박! 만렙을 찍어 30개에 이르는 가시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갔다. 적랑이 순간 멍한 얼굴로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투두두두! 순식간이었다. 가시들이 그의 주먹에 꿰뚫리고, 찢겨나가고, 으스러진다. 30개에 달하는 가시들 중에서 그의 몸을 스친 건 고작 3개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치명상은 없다.
“……!”
우리는 동시에 지면에 착지했고. 다시금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세븐 소드 피어스를 영창했다. 베스타크는 직전처럼 적랑의 미간에 던져 버렸다.
“두 번은 안 통하지!”
적랑이 목청을 높이며 날아오는 검날을 건틀릿으로 쥐어 버리더니, 손잡이를 고쳐잡고 내게 휘둘러 왔다. 쿠구구! 날아오는 마력검들이 그 풍압만으로도 휘청거린다. 모두 궤도를 벗어나 적랑을 빗맞혔다.
직후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발차기 추가타를 슬라이딩으로 피해냈다. 바닥을 튕겨 자세를 고쳐 잡은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철그럭. 최초에 튕겨나왔던 하얀 검. 에스파다가 다시금 내 손 안에 들어왔다.
“…….”
“…….”
첫 합에서 튕겨나갔던 검이 다시 내 손으로 착지할 때까지 단 몇 초. 쉴 새 없는 공방이 끝나고 나자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음, 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투 숙련도가 그야말로 경이롭군. 수십 번 사선을 넘나든 역전의 전사의 움직임이다. 그 나이에 이런 기발한 수싸움이 가능하다니. 요한이 눈여겨 볼만 해.”
“… 적랑님께 비할 바는 아닙니다만.”
적랑이 ‘너 좀 친다?’를 시전했다. 저쪽에서 물어주니 나도 빨아줬다. 칭찬 릴레이가 멋쩍었는지 클클거리던 적랑은, 이내 시선을 돌려 출입구 쪽을 바라봤다.
거기엔 넋이 반쯤 나간 채 대련을 지켜보던 우리 일행. 그리고 적랑의 딸내미가 있었다.
“카르할라스. 귀빈들이다. 정중하게 모셔라!”
“아… 네, 네!”
적랑은 자기 딸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내게 퍼뜩 다가오더니, 이내 우리를 저택의 본채 쪽으로 인솔하기 시작했다.
“… 음?”
순간 시선이 느껴져서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적랑의 딸내미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흠칫 고개를 돌리는 게 포착되었다.
‘뭐지. 반했나?’
나는 순간 고개를 모로 꺾었고. 대충 나한테 반한 걸로 치기로 했다.
나 같아도 웬 말뼈다구 같은 새끼가 이렇게까지 잘 싸우면, 반전 매력에 빠지지 않고 못 배길 거 같았으니까.
그제야 이 갑작스런 대련이 종결됐음을 실감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 귀빈이라.’
평가도 나름 좋게 받은 모양이다.
나는 적랑 안 보이도록 혼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