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묵비권
우리가 머무른 곳은 크로스페이드 외곽에 넓게 펼쳐진 뒷골목이다.
사실 우리뿐 아니라 거처를 구하지 못한 이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묵으며 피로를 달랬다.
“저, 혹시 빈방 좀….”
“죄송해요. 이미 일주일 뒤까지 예약까지 꽉 차서….”
“아… 네.”
혹시나 해서 상인들이나 수도의 주민들에게 돈을 왕창 쥐어주며 투숙을 부탁해봤지만. 상상도 못할 금액을 미리 꼴아박은 여행객들이 수두룩했다.
결국 선착순에서 밀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꼼짝없이 수도 외곽의 골목에서 야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그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무신제의 인기를 새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저씨 아줌마들, 집 없어요?”
“왜 이러고 살아요?”
“엄마가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아저씨들처럼 된대요! 아저씨 공부 열심히 안 했어요?”
노숙을 하려니 마을의 꼬맹이들이 많이 엉겨붙었다. 가끔씩 선 넘는 잼민이들이 몇 있었지만. 오늘 하루 인파에 치이느라 지쳤다 보니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그런 고로 설백과 세스나, 그리고 나는 어른스럽게 대충 무시했지만. 루시는 아무래도 그게 안 되지 싶다.
“이봐 용사!”
“왜.”
“저, 저 발칙한 꼬맹이 놈이 혓바닥으로 나를 능멸했다! 어서 반으로 갈라버려라! 지옥에서 자신의 언행을 후회하거라 꼬마야! 아하하하!”
“…….”
나는 손날을 들어 마왕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반으로 가를 기세였다.
그녀는 “꺄욱!”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머리를 쥐어 싸맸다.
“이, 이… 왜 때려! 씨이…!”
마왕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꼬맹이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좋다 이거야! 내 직접 저 꼬맹이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와하하, 신기하게 생긴 아줌마다! 머리는 하얀데 눈이 새빨개!”
“아줌마 아니야!! 이놈들 게섯거라!!”
처음에는 그렇게 필사의 추격전을 벌이나 싶더니.
… 나중가서는 자기들끼리 의기투합해서 퍽이나 잘 놀더라.
“비석치기? 그런 꼬맹이들 유희로 이몸이 질 리가 없잖느냐! 이리 줘봐라!”
“와하하! 누나, 할 줄도 모르면서 잘난 척 하긴!”
“이익! 150년 세월을 살아온 연륜을 얕보지 마랏!”
저게 정말 30년 전에 전대륙을 공포로 물들였다는 불사의 뭐시기가 맞는 걸까.
동네 꼬맹이들이랑 죽이 저렇게 잘 맞는데?
그런 의문이 절로 드는 광경이지만.
뭐 아무려면 어떨까. 지금 중요한 건 당장 쉬는 것이었으니 자잘한(?) 건 무시하기로 했다.
“으음….”
“에헤헤… 정용니임….”
슬쩍 눈을 옆으로 돌리니 모포를 둘둘 만 설백과 세스나는 이미 자고 있었다. 피로가 많이 쌓였을 테니 그럴 법도 했다. 나도 지쳤을 정도니까.
… 근데 로봇도 지치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세스나의 비밀(?)을 깊게 파고들면 피곤하기만 해지니까.
“…….”
나는 아가리 꾹 닫은 채 두 사람의 잠든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예쁘길래 눈호강이나 하려고 쳐다본 거다. 미인의 얼굴을 이렇게 유심히 쳐다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러나 삐빅. 눈치없이 발동된 미미르의 눈 때문에 두 사람의 상태창이 시야를 가렸다.
[명칭: 설백]
[별칭: 154829771번째 용사, 눈(雪)의 기공사]
[LV. 106]
[체력: 370/370 마력: 1010/1010 신체상태: 정상]
[힘: 23 민첩: 31 지능: 133 히어로 센스: 8]
새삼 이렇게 보니 설백과 나의 전력차가 어마어마해졌군. 격세지감에 피식 웃었다.
대충 흩어버리고 다시 미녀감상회에 집중하려던 나는, 세스나의 상태창을 목격한 순간 손을 멈췄다.
[명칭: 세스나]
[별칭: 161829771번째 용사, 다목적 무장형 안드로이드, 폐기체 773호]
[LV. 표기불가]
[체력: 표기불가 마력: 표기불가 신체상태: 정상]
[힘: 표기불가 민첩: 표기불가 지능: 표기불가 히어로 센스: 표기불가]
“… 표기불가?”
물음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치가 정상적으로 표기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미미르의 눈도 만렙이다. 이제 이 대륙에 알아내지 못할 정보가 거의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버젓이 ‘표기불가’라는 문구가 떠 있는 것이다.
‘뭐지?’
혼자 고민에 빠져있길 잠시. 시스템의 개발자가 내 허리춤에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퍼뜩 베스타크를 꺼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일행이 깨지 않게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저 형님.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거럼.
대답은 즉각 나왔다.
요즘 하루종일 조용하다 보니 자고 있는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 내가 부르면 또 재깍재깍 튀어나온다.
뭔가 마검만의 특수한 매커니즘이 있는 모양이다.
“방금 세스나 상태창을 봤는데요. 표기불가라고 뜨는데 이건 뭔가요.”
―표기불가? 저 여자 특수개체였냐?
모르는 개념이 튀어나왔다. 나는 곧장 눈썹을 틀어올렸다.
“특수개체요?”
―소환된 용사가 내가 상정한 범위의 생물이 아니면 표기가 안 돼. 아마 개조인간 같은 게 아니고 100% 인조제작된 로봇인가 보다? 내가 개조인간까진 상정 범위에 넣었거든.
“… 아하.”
―왜. 능력치가 궁금하냐? 내가 대충 전투 데이터로 견적을 내보자면. 미사일의 광역 추적 공격이라는 특수성을 높게 따져서, 레벨 250 언저리쯤이다. 아직 안 보여준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더 높아지겠지만.
“궁금하진 않았는데… 일단 감사합니다.”
나는 불현듯 시험의 장막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세스나는 로봇이라는 이유로 사식 신청을 못했고. 그것 때문에 나와 친해질 계기가 생겼다. 상태창이 표기되지 않는 이유도 그것과 마찬가지라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다시금 입술을 뗐다.
“생각난 김에요. 몇 가지 더 물어도 괜찮을깝쇼?”
―거럼.
역시나 수호형님은 투머치토커답게 내 질문을 절대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질문할 건 다른 게 아니다.
난리통 때는 급박해서 미처 묻지 못했던 수호 형님의 정체. 그리고 디아나의 정체. 그 외 루시와의 정체 등.
지금처럼 한가할 때 아니면 물어볼 짬이 안 날 것 같아서 후딱 몰아 질문했다.
―아하. 뭐 대단한 거 물어보나 했더니.
그러나 수호형님의 대답은 생각보다 맥빠지는 것이었다.
내 질문의 대부분을 쌈박하게 긍정해버린 것이다.
―그냥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야. 불사의 마녀 디아나는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고. 한 번 멸망시켰다. 거기에 더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면 마녀의 기사… 형님에 대한 전설도…?”
―사실이야. 난 그걸 도왔지. 이 세상에 주기적으로 마왕이 소환되도록 만들었고. 몬스터를 풀었다. 희대의 후레잡 배신자 새끼? 맞는 말이야. 아신들의 입장에서는.
‘아신들 입장에서는’이라는 조건부를 건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에 대해 슬쩍 추궁했지만. 형님은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잘 기억이 안 나는걸.”이라는 뻔한 멘트로 얼버무렸다.
더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에 대해서 말인데.
그리고 수호 형님이 유일하게 내 질문에 부정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형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 딸내미일 리가 있냐. 게다가 아내가 디아나? 디아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그런 말 안 나와. 그 제나라는 엘프보다 어린데 큰일 날 소리!
“아… 그럼 루시도 그냥 다른 마왕들이랑 똑같이 소환된 건가요?”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거기서 형님은 잠깐 말을 멈췄다. 뭐지. 그건 또 아닌 건가?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수호 형님은 예상대로 내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음. 똑같진 않아. 디아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개체니까. 루스티카라는 이름을 붙인 것만 봐도, 디아나가 편애하고 있는 건 확실해. 그 애한텐 특별한 의미의 이름이거든.
“심혈을 기울였다라….”
―어떤 의미에선 디아나의 딸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네. 그렇다고 내 딸인 건 확실히 아니지만. 나 로리콘 아니다.
… 대화로 유추해 보건대. 아무래도 마녀 디아나는 어린 여자애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수호 형님이 직접 말해준 바로는, 하얀 머리에 예쁜 보라색 눈을 가졌다고 한다.
하얀 머리칼. 특징적인 면이 루시랑 닮아서 딸이라는 소문이 돈 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형님.”
―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내가 로리콘이 아닌 게?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이 사람아.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그에게 혀를 짧게 한 번 차준 뒤. 나름 목소리 깔고 다시 물었다.
“마왕이랑 몬스터를 출몰시키도록 도운 게 형님이랬죠. 근데 마왕 때려잡도록 용사 지원 시스템을 만든 것도 형님이라고요? 그건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통수에 통수라도 치셨습니까?”
―…….
“형님은 대체 누구편입니까. 디아나예요 아신이예요?”
그 질문이 최초였다.
수호 형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내 말을 묵살하고 침묵을 고수했다.
“… 형님?”
―…….
그리고 이 당시에는 모를 일이지만. 형님은 앞으로도 그 질문만큼은 절대 긍정도 부정도 해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등급 시험장으로 향했다.
개장 1시간 전부터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인파가 그쪽으로 몰려 있었다. 바깥의 인파를 생각해도 지나치게 많은 인구밀집도였다.
그걸 의아하게 생각한 나머지 사람들한테 캐묻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무신제에 참가하려면 등급 심사에서 달인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 다들 부랴부랴 어떻게든 참가해보겠다고 이러는 게지. 쯧쯔.”
그것이 이유라고 한다.
벼락치기충들 때문에 우리가 자격 심사를 보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새벽바람부터 기다렸던 게 무색하게,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우리 차례가 온 것이다.
“평가심사는 공격계, 회복계, 특수계 중에서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 공격계로요.”
“넵. 접수받았습니다!”
평가 방식은 심플했다. 공격계, 회복계, 그리고 특수계. 세 가지 평가 방식 중 한 가지를 골라서 그 능력을 측정받는다.
공격계는 펀치기계처럼 측정기를 후려쳐서 힘의 총량을 평가하고.
회복계는 말 그대로 상처나 상태이상에 대한 회복량을 테스트하고.
특수계는 그 외 특수한 기술을 심사관이 재량적으로 평가해 등급을 매기는 형식이다.
‘5시간 기다려서 펀치기계 치고 앉았네.’
나는 눈앞에 대령된 물컹거리는 샌드백 같은 것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엄청난 인파를 봤을 때부터 정밀한 평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허무함이 몰려와서 그랬다.
‘에라 모르겠다.’
최하급인 투사 칭호만 받아도 무신의 성전은 입장할 수 있다 그랬으니. 대충하고 후딱 나가야지. 다 귀찮아졌다.
“욥.”
나는 터덜터덜 샌드백 앞까지 걸어가서 툭. 손등으로 대충 샌드백을 후려쳤다.
그러자 퍼어엉! 엄청난 굉음과 함께 샌드백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 충격으로 지면이 한동안 낮은 울음을 토했다.
“…….”
아차 싶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힘 조절이 잘 안 된 모양이다. 나는 뒤에서 대기하던 담당관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담당관의 떡 벌어진 입이 닫힐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나….”
담당관이 중얼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너 뭐하는 새끼냐’라고 온몸으로 묻고 있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도망치듯이 시험장을 빠져나왔고.
[마르크트레스 한정 칭호: ‘달인’을 획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칭 항목 구석에 ‘달인’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넣을 수 있었다.
“아하하. 심사관님이 저보고 무신제 출전하라고 난리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세스나는 공격계 심사에서 무성(武聖)급을 받았고.
“… 어, 우리 아란이 좋게 평가받은 것 같아서 기뻐요.”
그렇게 말하는 설백은 회복계 심사에서 무성급을 받았다.
무신, 무선, 무성, 지존, 달인, 투사, 그리고 무사로 이어지는 단계. 거기다 무성급부터는 비율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하니까… 둘 다 꽤나 고평가를 받은 셈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루시는….
“…….”
뭐 설명이 필요한가? 당연히 최하위 등급인 무사급을 받았다.
애써 태연한 척, 수치심에 새빨개진 얼굴이 실로 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