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18화 (94/280)

118화 내가 마 적랑이랑 밥도 먹고

“아.”

나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저쪽 남매랑은 크로스페이드에서 헤어지는 게 약속이었지. 제논 입장에선 우리와 붙어있으면 리스크만 커지니, 서두르는 것도 당연하다.

고개는 선선히 끄덕였지만.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그녀에게 휘적거렸다.

“나중에 또 만나면 좋겠네. 잘 먹고 잘 살아.”

“아, 네…! 나중에 또 봐요 오빠!”

제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옆에서 제논이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뀐다.

끝까지 까칠하네. 너 그렇게 살면 평생 친구 못 사귄다.

“이봐. 박정용.”

그런 생각을 하며 탄식하는데. 문득 제논 쪽에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제논이 먼저 말을 거는 상황은 상상도 못해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음? 왜.”

“… 조심해라.”

뭔 말을 하느라 저리 무게잡나 했더니. 싱겁기 그지없다. 남자 츤데레는 사절이다 새꺄.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나 동생 간수 잘 하고. 앞으론 그런 이상한 데에 안 엮이게 조심해라.”

“… 그래.”

“이제 어디로 갈 거냐?”

“글쎄. 이 세계에 온 뒤로 자유의 몸이 된 건 처음이라… 일단 거주지구의 거처에서 제나와 쉬면서, 미래에 대한 상의라도 해보는 게 좋겠지.”

‘미래에 대한 상의’ 운운하는 제논에게서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편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제나도 그것을 느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빠 옆으로 바싹 달라붙는다.

“오냐. 알겠다.”

더 잡고 있는 것도 미안하니, 나는 그쯤에서 두 사람을 놔주기로 했다.

“오라버니랑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잘 가요 제나님. 다음엔 더 많이 친해지도록 해요!”

설백과 세스나도 손을 흔들며 덕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제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더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멀뚱히 서있는 루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인사 안 하냐?”

“내가 왜 하냐. 저 뾰족귀들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

그건 그렇다만. 새끼 정 없기는.

내가 루시와 대화하는 사이 제나와 제논이 금세 멀어져 버렸다. 두 사람의 모습이 앗 하는 사이 인파에 휩쓸려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제논 남매가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가,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원섭섭하구만.”

“후후. 그러네요!”

세스나가 내 혼잣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제나와 같은 시험장에 떨어졌던 세스나는 전에도 대화해본 적이 있다고 했었다. 세스나도 나름대로 아쉬움이 많았을 테다.

“슬슬 가볼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가지고 천년만년 감상에 빠져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우선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으면 여행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여행 물품부터 보충하고. 방이나 잡으러 가자.”

“네 정용님.”

“알겠습니다!”

“으… 어딜 봐도 인간이 너무 많다. 토할 것 같다….”

그리하여 나와 설백, 세스나, 루시로 줄어든 우리 일행은 곧장 상업지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히크에게서 얻어놨던 크로스페이드 구획도를 보며 일행을 인솔하고 있었다.

“음. 이쪽이구나.”

크로스페이드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케른과 딱히 다를 게 없다. 중앙의 널찍한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건물의 배치다.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의 도시 구획인데. 특이점이 있다면 세워진 건물은 동양풍에 가깝다는 것이다.

‘구역의 배치도 비슷하군.’

중앙 시가지를 기점으로 왼쪽 부분은 상업지구, 오른쪽은 거주지구로 나뉘어있다. 시가지의 위쪽으로 ‘무신의 성전’이라는 지구가 따로 분할돼 있는 점만이 달랐다.

“이런 미친.”

그리고 거주지구에 진입한 직후. 나는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달았다.

다들 눈앞의 광경에 넋이 나간 나머지, 한 마디씩 던졌다.

“와… 이건 정말… 엄청나네요.”

“정용님! 사람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널려 있네요!”

“으갸악…! 나 주, 죽어… 사, 사람이 너무 많다 용사!”

나는 특히 세스나의 말에 공감했다.

정말 사람이 쓰레기 같이 널려있다. 어딜 둘러봐도 사람 뒤통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마른 침을 삼키고. 인파를 뚫고 나가며 여관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용사님. 한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차서요.”

“저희 여관은 무신제 끝날 때까진 아마 방이 안 빠질 것 같습니다….”

“이제와서 여관을 잡겠다? 너무 늦었수. 꿈 깨쇼 이 사람아.”

여관의 행사 특수. 그걸 생각을 안 했다. 안일함 스택이 대차게 폭발해 버렸다.

10번 넘게 들른 모든 여관의 만실 선언을 듣고 나서야, 나는 틀어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케른에서 시간만 보내지 않았어도…!”

이럴 줄 알았으면 볼일 후딱 마치고 곧장 수도로 올라왔어야 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람들한테 욕까지 뒤지게 얻어 처먹으며 케른에 일주일이나 있었을까. 새삼 후회가 된다.

―꼬우면 죽어서 돌아가시든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수호 형님이 한 마디 한다.

나는 입매를 히죽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소름돋는 소리 하지 마십쇼 행님. 죽는 게 쉽습니까.”

―어렵냐?

“…….”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근빳따죠 쉬바!’ 라고 말하고 싶은데. 거짓말이라는 걸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호 형님도 아는지, 이어지는 말투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까짓 거 144번째인데 죽는 게 어렵겠냐. 점점 익숙해지는 X같은 느낌 때문에 어렵지.

“… 잘 아시네요. 심리학과 출신이슈?”

―불사신 심리학은 이미 박사논문 냈지. 마, 형이 그 느낌 다 알아 인마.

동네 친한 형 마냥, 불사신의 고충을 공감해주는 수호 형님.

하긴 저 양반도 인간 시절엔 불사신이랬지. 같은 한국인이기도 하니, 그쪽으로 고민생기면 진지하게 상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입장이 비슷한 건 사실이니까.

어쨌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낮게 쉬었다.

“돌아가도 아마 똑같이 존버했을 겁니다.”

―오호. 왜지?

“케른에서 마냥 노닥거렸던 건 아니라.”

내 후유증의 치유는 사실상 부수적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타라가 걱정된 나머지 에프터 케어를 위해 남은 거였다.

졸지에 고아가 돼 버린 타라를 플릭의 신전에 맡겼고. 랜덤박스 까서 나온 보석과 룬은 죄다 히크에게 팔아치웠다. 양육비 겸 뇌물로 그걸 플릭의 신전에 기부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둘이서 신전 리모델링 계획이라도 짜고 있겠지.

나는 마지막에 봤던 두 사람의 미안한 표정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좋은 일 했구만. 그러면 후회할 것도 없네.

“뭐 그렇긴 한데… 저런 반응이 나오니까 그렇죠.”

―아하. 이해. 살벌하구먼.

나는 등 뒤에서 조여오는 무지막지한 시선을 느끼며 그쪽을 가리켰다. 수호 형님도 곧장 이해했는지 깊은 침음을 흘렸다.

무지막지한 시선의 주인공은 설백과 세스나였다.

“정용님. 그러게 제가 수도에 먼저 가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나 말씀드렸는데….”

“왜 남겠다는 건지 이유도 말씀해주지 않으시고. 너무하세요 정용님….”

둘이서 번갈아가며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두 미녀의 한탄이 폐부를 쑤시고 들어온다.

그렇다. 케른에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피운 건 다름 아닌 나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먼저 수도로 올라가자는 파였다.

‘그나저나 저 정용님이라는 호칭.‘

한 명일 땐 그냥 넘어갔는데 둘이서 쌍으로 정용님거리니까 매우 듣기 오글거린다. 얼굴 보기 전에는 구별도 잘 안 된다.

조만간 호칭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아… 그 때가 그립다.’

시험의 장막 개노답 사형제 시절을 떠올렸다.

타의로 모인 사내집단 특유의 분위기가 그리워졌다. 나랑 관련된 일은 내 일처럼 참견하지만. 그게 아니면 조또 관심이 없는… 막노동판이나 군대에서 물씬 나는 그 분위기.

‘… 빨리 개노답 형제들 찾으러 가자.’

난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우리 파티엔 중대한 단점이 있었다.

남자 성분이 너무 부족하다. 나 하나 밖에 없다. 기빨린다. 하렘마스터는 내게 너무 무거운 직책이다.

“일단 따라 와. 의지할만한 데가 있으니까.”

나는 두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인파를 헤쳐나갔다.

두 사람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었지만. 뭐 어쩔 텐가. 결국 내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아무리 후진 데라도 이래선 전부 만실일 것 같은데….”

나는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는. 가지고 있던 지도의 한 지점을 턱. 가리켰다. 두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리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눈빛을 마주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인맥이지.”

내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무신의 성전’이라 쓰인 수도의 북쪽 구역이었다.

나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경기장과, 그 너머로 자리 잡은 화려한 기와지붕을 눈에 담았다.

“적랑님 만나러 가자.”

* * *

‘무신의 성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나라의 왕도이다.

다만, 애초에 마르크트레스는 왕정이 아니다. ‘카발리어’라는 마르크트레스 최강의 기사 100인이 모여서, 의원제나 선거후 비슷한 제도로 정치를 하니까. 왕도보다는 국회의사당인가?

그래서 그런가. 의외로 무신의 성전은 개나 소나 출입할 수 있는 오픈된 공간이었다.

딱 한 가지. 더덜 말고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고 있다면 말이다.

“아니 글쎄, 등급 심사를 치르지 않으신 분은 들어가실 수가 없다니까요. 용사님.”

내 앞에 서있는 경비병은 아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 무신의 성전 경비병이다. 연신 곤란한 표정으로 출입구를 단단히 틀어막은 채 우리를 절찬리에 방해하는 중이다.

“용사님. 일단 심사를 받으시고, 최하 계급인 무사 계급이라도 따서 오십쇼. 그러지 않으면 무신의 성전엔 입장할 수가 없습니다요.”

그렇다. 무신의 성전에는, 마르크트레스 공식의 무예 등급 심사를 치른 사람만이 진입할 수 있다.

‘와…. 이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네.’

내가 케른에 도착했을 때부터 치러야지, 치러야지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그것.

카사스의 사도와 불사교도의 계략에 말려들어 무수한 죽음을 반복하다 보니, 완전히 까먹고 치르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다.

“당신 적랑 알지? 내가 어? 적랑이랑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어?! 당장 비키지 못해요? 적랑님이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칵 씨! 당신 바로 모가지라니까 모가지!”

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개추하게 발악해 봤다.

나도 이런 갑질은 좋아하지 않지만. 좀 추하긴 해도 지금은 이래야 한다. 왜냐하면….

“심사장까지 다시 어떻게 가냐고!! 저 인간 만리장성은 당신이 뚫어줄 거야?! 앙?!”

“무, 무신제 때문에 사람이 많은걸,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요….”

엄청난 인파. 그게 문제다.

원래라면 우리가 있던 거주지구에서 무신의 성전까지는 도보 1시간 정도 거리다.

하지만 얼마나 걸렸는지 아는가? 꼬박 반나절 걸렸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녹초가 돼서 주저앉아 있는 상황이라고.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지금도 거리를 가득 메운 저 인파가 빠지려면 밤이 돼야 하는데. 밤이 되면 심사장도 문 닫을 게 뻔하잖아!

그러면 기껏 수도까지 와서 노숙을 하게 된다. 나는 상관없지만, 설백과 세스나의 바가지 때문에라도 그건 사양하고 싶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쇼! 적랑님을 만나야 한다고!!”

“성전의 규율은 지엄한 것! 제 목숨이 날아간다 해도 절대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랜절까지 박았지만 경비병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실력행사까지 생각했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쓰읍….”

안 그래도 큰 목소리로 실랑이를 벌인 탓에 주위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더 이목을 끌어서 범죄자로 낙인이라도 찍히는 날엔, 앞으로의 계획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일단은 한 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얘들아.”

나는 빈손으로 터덜터덜 일행에게 돌아왔고. 오징어처럼 흐물거리는 마왕을 제외한 두 사람의 지친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그 시선에 깃든 일말의 희망을 처절하게 부숴야 했다.

“오늘은 그… 노숙해야겠다.”

설백과 세스나의 낙담하는 표정이 가슴에 꽂혔고. 루시의 불꽃 로우킥이 내 다리에 꽂혔다.

아. 수도까지 찾아와서 노숙하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