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나는 적랑이 던진 말로 깊은 고민에 빠졌고. 그런 나를 더욱 시험에 빠뜨리는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자네가 언급했던 시체를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말일세. 상위마족 계집을 이용해 전언을 남겼네.”
“예?! 어, 어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빛살처럼 빠르게 적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적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훌륭했다. 다음 만남도 기대하길 바란다, 불사의 마왕의 계약자.”
“……!!”
“불사의 마왕의 계약자… 그래. 그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
카사스의 수장. 그놈의 전언에 굳어있던 나는 아차 싶었고. 뒤늦게 적랑의 안색을 살폈다.
―마녀에 관한 건 모두 처단한다.
전생에서 내 가슴을 꿰뚫었던 그 엄청난 살기가 오버랩된다. 긴장감이 온몸의 신경다발을 두들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평온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전투 전에 약조를 했었지. 나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눠주기로 말이야.”
“… 아, 네. 그랬었죠.”
“자세한 얘기는 그때 마저 듣겠네. 상당히 흥미로운 대화가 될 것 같군.”
… 저는 살 떨리는 대화가 될 것 같습니다만.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적랑을 보니 온몸에 오한이 치달렸다.
적랑은 이내 걷는 방향을 틀었다. 서부 관문으로 향하는 가도 쪽이었다.
“나는 먼저 수도에 가 있겠네. 수도에 도착하면 나를 찾게. 일주일 뒤, 무신제라도 즐기면서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적랑은 제 할 말만 줄줄이 내뱉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케른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그를 불러세웠다.
“적랑님.”
“음?”
적랑이 돌아본다. 야수처럼 흉흉하게 빛나는 하얀 시선이 날 정면으로 향한다.
나는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 수라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문답 같은 소리만 던져놓지 말고. 명확한 해법을 달라 이 소리였다. 좀 오글거리나? 적어도 질문한 나는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수라인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내가 괴물이 되어가는 건 확실하니까. 당연히 진지할 수밖에 없다.
“강해져야지.”
그러나 돌아온 적랑의 대답은 역시나 별나라 꿈동산 얘기였다.
나는 미간에 사정없이 골을 파며 물었다.
“강해지다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누가 덤벼도 굴복하지 않을만큼 강해지고. 강해진 육체만큼 정신도 단련하면 된다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지.”
‘국영수를 중심으로 예습복습 철저히’는 저도 말할 수 있겠네요. 옘병 쌈싸먹을.
더 해봐야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그쯤에서 그만뒀다. 나는 한숨과 함께 질문을 좀 바꿨다.
“그럼 적랑님은 강합니까?”
“나 말인가?”
그러자 히죽.
적랑은 특유의 야수 같은 웃음을 머금은 채 건틀렛을 만지작거렸다.
“육체만큼은 용사 중 최강일세.”
엄청난 자부심. 거기에 깃든 근거 있는 확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적랑은 이내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며, 못 다한 말을 이었다.
“나는 정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수라가 됐네. 자랑할 건 무식하게 단련한 육체뿐이지.”
“… 그렇습니까.”
“돌이켜보니 누구에게 훈수 둘 상황은 아니었군 그래.”
적랑은 자조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나는 목청을 높여서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조만간 강해지러 찾아가겠습니다!”
난데없는 소리여서인가. 적랑이 눈을 흘깃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계속 말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 거래?”
“제가 가진 모든 정보를 순순히 불어 드릴 테니까, 저를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대륙 최강으로. 적랑님보다 더 강하게요. 그래만 주시면 정신머리는… 제가 알아서 단련해 보겠습니다.”
호기롭게 거래를 제시한 나. 적랑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나 싶더니. 이내 너털웃음과 함께 건틀렛 끼운 주먹을 내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멀리서 그걸 받아쳐주는 시늉을 했다.
“제자는 생각 없으나 대련이라면 환영일세.”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빠른 속도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비탄과 통곡.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가득한 케른 중앙 시가지의 한복판에서. 나는 틀어쥐었던 주먹을 가만히 쳐다봤다.
‘… 강해져야 한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발상은 없었다. 다만 막연히 그래야 한다는 실감은 들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적랑에게 물어본 거고. 수련을 요청한 거다.
적랑이 내 제안을 받아준 건지 아닌지 좀 애매하지만… 일단 부정은 아니었으니 반쯤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어떻게 보면. 일단 맞는 말이긴 하지.’
더 이상 괴물이 되지 않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죽지 않아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강해지면 된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간단한 정답이었다.
‘적어도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오늘 죽은 사람 숫자가 200대였겠지.’
더 강했으면 100대였을 거고. 더 강했으면 10대였을 거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했으면… 없지는 않아도 더 적어진다. 아무튼 그렇다.
‘무력했다. 정말 많이.’
다른 건 모르겠고, 그거 하나는 공감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거.
이번에 나를 수없이 갉아먹었던 절망감의 원인은 대부분 내 무력함이었다. 내가 더 강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자책 비슷한 것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물론 내가 얼마나 강해지든 어찌할 수 없는 일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강해지면 그런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을 단련이라….”
나는 적랑이 해준 말을 곱씹으며 막연히 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다른 곳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통곡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발을 멈추고 홀린 듯이 그곳을 지켜봤다.
“엄마… 흐흑… 으아아앙….”
아는 얼굴이었다.
뒤틀린 괴물 형상의 시체. 흉측하게 짓이겨진 외관에도 불구하도, 그 고깃덩어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다.
갈색 머리칼에 잔뜩 젖은 회색 눈. 피칠갑 넝마 차림의 조그마한 소녀.
내가 아까 구해줬던 이름 모를 여자애였다.
“… 으에? 아, 아저씨는….”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꼬마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탄성을 흘렸고. 황급히 눈물을 소매로 북북 문질렀다.
아무래도 내 얼굴을 기억해준 모양이다. 아저씨라는 호칭도 여전하고. 쓰읍.
“엄마냐?”
무심하다 싶은 어조로 물었다. 시선은 피에 잠긴 괴물의 시체에 가 있었다.
그리고 타라는 어깨를 흠칫거리더니 다시금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연신 움찔거렸다.
“우… 흑. 으아아앙…!”
“어. 야, 잠깐…!”
미친 갑자기 왜 울어. 뭔가 내가 울려버린 기분인데 이거.
괜히 찝찝해진 나는 주머니와 가방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말로는 애초에 달랠 자신이 없으니 선물 공세라도 해보려는 거다.
‘아니 뭐 이렇게 가진 게 없냐….’
그러나 먼지 나오도록 탈탈 털어서 나온 거라곤 건량 쪼가리와 휴대용 점화기. 망자의 함과 에테르 병을 비롯한 내 소울메이트들. 그리고 마왕 사냥 보상 등으로 얻고 묵혀뒀던 랜덤박스 몇 개뿐.
‘일단 이거라도.’
일단 급한 대로 갖고 있던 랜덤박스를 전부 그녀에게 넘겼다.
“아가. 이거 받아.”
“으에…?”
“그거 열면 비싼 거 들어있어. 그 돈으로… 음. 잘 먹고 잘 살아.”
물론 ‘랜덤박스’이니만큼 들어있는 물건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안 그래도 내가 마왕 사냥 보상으로 얻었던 걸 몇 개 열어본 적이 있는데. 능력치를 소량 증가시키는 물약부터 회복포션, 각종 효과를 담은 룬, 잡다한 보석들까지 별의 별 게 다 나오더라.
어쨌든 지금까지 열어본 경험에 의하면. 부랑자 입에서 ‘에게?’ 소리 나올 물건은 없었다. 효능은 둘째 치고 기본적으로 고가 아이템이다.
내가 건넨 박스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꼬마가 어느 순간 퍼뜩 시선을 들었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근데 아저씨.”
“어.”
“… 왜 저한테… 이런 걸 줘요?”
“… 음….”
그러게. 왜지.
괴물로 변한 사람의 유족이 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얘한테서 발길이 멈췄을까.
그냥 내가 구해줬던 애라서? 그건 또 아닌데. 애초에 유심히 보기 전까진 아까 구해줬던 걔인 줄도 몰랐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너의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에 이끌려서’인데. 오글거리는 건 둘째 쳐도, 발찌 차고 경비대한테 끌려갈까봐 말 못하겠다.
근데 실제로 이유가 그거 외에는 없다. 나는 뭐라고 포장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고.
“자요.”
“응?”
별안간 소녀가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무언가 건넸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찰그랑. 투박한 철제 반지가 손바닥에 떨어진다.
“우리 엄마가… 뭘 받았으면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하는 거랬어요.”
그 순간만큼은 눈물을 그친 채 똑 부러지게 말한다.
그런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져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고맙다. 증손자한테까지 물려줄게.”
“저도… 고맙습니다. 아저씨.”
타라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어렸다. 이후 밀려온 막대한 슬픔에 가려져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나는 꾸벅 인사하는 타라에게, 고개를 까딱 수그렸다.
“… 별걸.”
이럴 때 만큼은 빡대가리인 게 원망스럽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뭐라 한 마디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뭐라 말해주면 좋을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나는 그래서 평소 루시를 대하는 습관대로,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줬다.
“이름이 뭐냐.”
“… 타라.”
“그래. 타라… 힘내라.”
“…… 으, 흐흑.”
타라는 정수리에 수도꼭지라도 달린 것처럼. 내가 쓰다듬을 때마다 눈물을 줄줄 떨궜다.
나는 천천히 손을 떼고 타라를 등졌다. 다시 내가 묵었던 여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죽인 울음소리도 빠르게 멀어졌다.
시큼털털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중앙 시가지에서 거주지구까지, 걷는 내내 그랬다.
‘아. 넣어둬야지.’
타라에게 받은 반지를 어디에 보관할까 고민하던 도중. 재밌는 생각이 문득 번득였다. 나는 곧장 가방을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이거 귀중품 보관하기엔 딱이네.’
망자의 함은 나만 보고 만질 수 있으니 도난 걱정도 없고. 마침 큰 사건도 하나 해결됐으니 망자의 함도 갱신할 때고. 여러 모로 이득이다.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내다니. 역시 나는 사실 천재가 아니었을까? 빡대가리 반성회 10분만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있었다.
“…… 음?”
그런 생각과 함께 망자의 함을 열었는데.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찰그랑. 망자의 함 안에서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철제 반지. 그것을 목격한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 똑같네?”
나는 함 안에 있던 반지를 가만히 들어올려 방금 받은 반지와 비교해 봤다.
똑같다. 생긴 것은 물론이고 낡은 정도를 보아하니 제조일도 비슷해 보인다. 같은 반지를 그대로 복사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아니, 설마?’
나는 타라가 있던 시가지 방향을 퍼뜩 돌아봤고. 이내 기억을 짜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타라와 만났던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잃어버린 전생 중에 타라와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아니. 설마.’
나는 금세 코웃음을 치며 일축했다.
이렇다 할 장식도 안 달린 싸구려 철제 반지다. 케른의 시장판만 가도 똑같은 게 발에 채일 정도로 굴러다녔다. 내가 봐서 안다.
케른 인구가 얼마인데. 이 반지 하나만 보고 그렇게 기막힌 우연을 떠올리는 건 억측이 심했다. 차라리 어디서 굴러다니던 걸 주워서, 죽기 직전에 급한 대로 넣어 놨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겠다.
‘… 그리고 사실이래 봐야, 뭐 어쩔 거야.’
죽어서 시간이 돌아오고. 나조차 기억 못하면.
그냥 일어나지 않았던 일일 뿐이다.
두 반지를 놓고 고민하길 잠시. 나는 함에 원래 들어있던 반지를 아무데나 던져버렸다.
탱그랑. 반지는 천천히 가도를 굴러가다, 하수구 구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예스. 홀인원.”
하룻밤을 새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데다, 그 기억이 자그마치 12번이다.
피를 토할 정도로 마력을 쏟고 난 뒤라 그런가.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솔직히 지금은 밥 생각 때문에 다른 복잡한 생각이 낄 건덕지도 없다.
“밥이나 먹자.”
밥 먹을 생각을 하자 다운되었던 기분도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란 새끼, 단순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