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괴라는 나물
농담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웃다 탈진해 기절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나를 반기는 것은 목조 건물 특유의 나무 냄새. 그리고 때깔이 고운 나뭇결의 천장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 모르는 천장이다.”
이 대사도 기어이 쓰는 날이 오는군. 이세계 생활 짬을 좀만 더 먹으면 웬만한 명대사 버킷리스트는 죄다 성취하겠다.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주위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했다.
“이세계 지인 정모냐?”
설백. 루시. 제나와 제논. 적랑. 그리고… 세스나까지. 의자를 끌어와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일련의 사람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과한 관심은 부끄러운데. 나는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약속의 쉼터다. 기어이 여기서 하루를 새게 되는구나. 쯧.”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시가 먼저 대답했다.
루시가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복잡미묘하다. 일단 부정적인 쪽은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대견함? 비슷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이 변태 같은 수호자. 나랑 뽀뽀하는 게 얼마나 좋으면 88번이나 죽고 그러냐.”
“… 하.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뭐 아무튼 결국의 결국엔 미치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고생했다 용사.”
“웬일이냐.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루시의 가벼운 농담에 실소를 흘렸다.
그녀도 잠깐 나를 따라 웃는가 싶다가, 이내 고개를 팩 돌리며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어,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은 나도 전부 잊기로 하겠다. 그러니 너도 다 잊어라!”
“어젯밤?”
나는 고개를 갸웃 꺾었다. 어젯밤에 루시와 무슨 일이 있었나.
루시가 키스 정도로 저리 멋쩍어하는 건 아닐 테고. 그녀와의 인상 깊은 해프닝이라고 해봐야, 전생의 죽음 직전에 나눴던 대화 정도인데….
설마 ‘끝까지 발버둥 쳐봐라, 나는 끝까지 지켜봐 주겠다!’라는 오글거리는 대사를 내뱉었던 게 이제 와서 쪽팔려진 건가?
‘그래. 뭐, 그 기분 모르는 건 아니지.’
흑역사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법이다. 나도 한 때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어서 잘 안다. 물론 내 경우는 아버지한테 복날 개 쳐맞듯 얻어터져서 바로 완치 당했지만.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정확히 뭘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잊어버리지 뭐.”
“그, 그래… 그러면 됐다.”
루시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그녀는 잠시 그 상태로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는 행색이다.
“음? 뭐 왜. 아직 할말 있냐?”
“아니… 그게. 음.”
루시가 아가리에 필터를 거치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흘깃거리며 날 쳐다보던 루시는 어느 순간, 얼굴을 슬쩍 붉혔다.
“뭐, 그… 소, 솔직히. 좀 강제적이긴 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 어?”
“그, 그런 건 처음이었는데…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조금 신기했어.”
“뭐요? 지금 뭔 소리를?”
“아 몰라 모른다! 잊어라 잊어!”
더듬더듬 말하다 머리를 마구 휘젓던 루시. 그녀는 이내 빠르게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쾅. 문이 거세게 닫힌다. 잠깐 동안 침묵이 강림했다. 그 침묵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정용님?”
“방금 그 얘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오빠. 대체 무슨 짓을….”
“이 새끼가 불사교 막으라니까 엄한 짓이나 하고 있었냐?”
설백, 세스나, 제나, 그리고 제논이 한 마디씩 돌아가며 내뱉었다.
아니 잠깐.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나도 모른다고.
오해다. 모함이다. 모략이다! 날 음해하려는 루시의 술수야! 새끼가 비겁하게 긴장 쫙 풀린 타이밍을 노려서 평소의 복수를 해? 악랄하기 짝이 없구나.
나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좌중을 둘러봤다.
“아니 나도 진짜 몰라! 쟤가 갑자기 뭔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 진짜 쟤한테 아무 것도 안 했어! 오히려 당했으면 당했지!”
“성범죄자스러운 변명은 됐습니다. 그러면 뭘 당했는지부터 말씀해 보실까요?”
세스나가 전에 없는 무표정으로 천천히 상체를 가까이 했다.
철커덕, 위이잉. 택티컬한 소리와 함께 멋들어지게 변형된 그녀의 오른손. 거기엔 날이 시퍼렇게 선 전기톱이 돋아나 있었다.
아. 전기톱. 훌륭한 대화수단이지.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키스를 조금….”
“키스요?”
“어 뭐. 감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비즈니스적으로 필요해서. 의, 의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어쩔 수 없이.”
“흐응.”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말들을 나불거렸다.
세스나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히어로 센스가 내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발동된 것이다.
가만히 콧소리를 내던 세스나는 이내 전기톱을 변형시켰다.
“더 큰 전기톱이 필요하겠어요. 겁나게 큰 전기톱이.”
“아니 왜?! 사실대로 말했는데…!”
“이제 정용님만 형편 좋게 기억이 없어져 버린 ‘좀 강제적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던 행위’에 대해 심문할 거라서요.”
“억울해!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기억이 안 난다니까?!”
“만취 상태의 범죄자가 상투적으로 그리 말한답니다.”
나는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주변으로 보내봤지만. 금세 절망했다.
설백과 제나는 의심하는 눈초리고. 제논은 이미 경멸의 눈빛이다. 잠깐 사이 곤두박질친 내 취급이 뼛속까지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적랑에게 구원을 요청해봤지만 역시나 실패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모르쇠를 시전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담그기 참 쉽구만. 나는 통한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쒸불… 억울하다….”
이내 ‘루시는 내가 전생하면 기억이 사라지는 걸 자주 까먹는다’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이 엄청나게 많다’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떠올랐고.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까지 도달한 나였지만.
“해.”
“명.”
“해.”
이미 나를 향한 의혹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 불어나 있는 상태였다. 루시는 이미 나가버려서 해명시키지도 못한다.
나는 모든 것을 해탈한 채 그냥 웃음만 흘렸다.
―캬. 이 새끼 이거 기만자였네. 나도 너 같은 청춘을 보내고 싶었다.
낮은 진동과 함께 울리는 수호 형님의 목소리가 두통을 심하게 만들었다.
나가 뒤지십쇼 형님.
* * *
내 오해가 풀리는 데는 장장 몇 시간에 달하는 해명과 변명이 필요했다.
나는 진이 빠진 나머지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몸은 설백이 지극정성으로 치료를 해준 덕분에, 거의 정상궤도에 돌아와 있었다. 아직 후유증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그리고 그런 내 옆에는….
“욕봤구먼. 고생했네.”
적랑이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따라붙고 있었다.
나는 그 태평하게 걸린 웃음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알면 좀 도와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런 공포의 치정극에 끼어서 뭘 도와주겠나. 그런 건 오롯이 자네의 몫이지.”
“고, 공포의 치정극이라니.”
말씀 무섭게 하시네.
애초에 치정극은 나를 두고 여자들이 싸우는 거잖아. 방금 건 내 범죄 의혹을 해명하는 공판장에 불과했지, 아침드라마 요소는 물론 러브코미디 요소도 일절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거주지구를 빠져나와 시가지로 들어섰고. 가만히 뒤를 따르던 적랑이 어느 순간 물었다.
“불사교의 마수로부터 케른을 구해낸 영웅이 된 기분은 어떤가?”
“영웅은 무슨… 희대의 학살자겠죠. 적랑님 아니었으면 감옥행 될 뻔 했잖습니까.”
“하긴….”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사실 내 청문회가 유야무야 끝난 데는 반강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있던 여관방으로 경비들이 들이닥쳤고. 곧장 날 포박하려고 달려든 것이다.
―잔악무도한 학살자가 여기 있다!
―놈을 잡아라!
그렇다. 전생에도 그런 적이 대부분이었지. 내가 먼저 불사교도를 잡아 죽이기 시작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
그것이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해명되지 않아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을 적랑이 조리있는 설명으로(솔직히 반쯤은 힘에 쫄아서) 납득시킨 뒤 돌려보내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사실 적랑에겐 지금 많이 감사하고 있다.
적랑도 그 때가 떠올랐는지 잠깐 쓴웃음을 머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질문을 좀 바꾸지. 살아남은 기분이 어떤가.”
“뭐 말할 게 있겠습니까. 당연히 존나게 째지….”
서슴없이 말하던 나는 시가지에 도착했고. 동시에 입도 다물어 버렸다.
“레이첼… 어, 어째서 이런 일이… 흐흑…!”
“으아아아앙!”
“아빠… 눈 좀 떠봐… 아빠아…!”
사방에서 비탄과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메아리치고 있었다.
여성의 잘린 머리통을 끌어안고 숨죽여 우는 남자.
피바다 위에 누워있는 시신 앞에서 하염없이 오열하는 남자아이.
가슴이 걸레짝처럼 난도질당한 사내를 향해 넋이 나간 채 말을 거는 소녀도 있다.
내가 미처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
누군가의 연인, 가족, 혹은 영웅이었을 주검을 악기 삼아. 유족들이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다.
“…….”
‘아직 300명밖에 안 죽었으면 희망이 있다.’ 불사교를 저지하려고 발바닥 불나게 뛰어다닐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광경을 보니, 300은 절대 ‘밖에’로 퉁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씨이팔. 기분 존나게 째지네요.”
나는 내뱉으려던 말 앞에 욕을 때려 박았다. 반어법이 되었다. 역시 욕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다니까.
나는 실실 웃었다. 뭐 잘했다고 질질 짜겠냐 내가.
“자네가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그 비참한 마음을 잊지 말게.”
인간으로서. 그 단어 선택에 퍼뜩 적랑을 쳐다봤다. 그는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 적랑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자네가 처한 시기가 가장 위험하지. 내 안의 괴물에 잡아먹혀 수라(修羅)가 되는가, 아니면 극복하는가. 모두 자네의 손에 달렸네.”
―내 안의 괴물? 크큭, 검속에 숨죽인 이 흑염룡을 말하는 것인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수호 형님이 혼자 개드립을 치더니. 또 제 혼자 실실 웃는다.
제발 나가 뒤지십쇼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