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데아 엑스 마키나
“그나저나 굉장하군. 엘더리치를 사냥했다는 것도 이 광경을 보면 믿을 수 있겠어.”
문득 내쪽으로 다가온 적랑이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히크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들은 플릭이 그러했듯, 내가 도처에 둘러쳐놓은 그림자 사슬을 보고 있었다.
“케른에 숨어든 불사교도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히크가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가 예상하던 숫자보다 훨씬 많았던 모양이다.
반면 적랑은 놀라는 한 편, 의심이 깃든 눈초리를 내쪽으로 보냈다.
“저들이 모두 불사교도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엘더리치 슬레이어.”
“… 증명이요?”
“최소한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지 않으면 곤란하네.”
하긴 그것도 그렇군.
불사교도들은 겉보기론 그냥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나를 방금 처음 만난 적랑으로선, 오히려 내가 악당으로 여겨져도 이상할 건 없다. 다른 케른의 시민들도 그랬으니까. 충분히 의심스러울 법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파우치를 뒤져 편지 한 장을 적랑에게 건넸다.
“불사교도는 증명 못하는데요. 저에 대한 신뢰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내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건넨 것은 바로 변경백의 서신이었다.
적랑은 의아한 행색으로 그 서신을 받아들었다가, 이내 발신인의 이름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 요한? 요한이 어째서 자네를….”
그의 놀란 눈초리가 내쪽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서신을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신을 다 읽은 적랑의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 외골수 자식이 이렇게까지 칭찬을 하다니. 일단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하군.”
적랑은 편지를 고이 접어 품에 집어넣었고. 건틀렛을 끼운 주먹을 내쪽으로 내밀었다.
변경백도 저거 하던데. 친하다 그러더니, 아마 어느 한 쪽이 영향을 준 모양이다. 나는 내 몸을 한 번 꿰뚫었던 그 건틀렛에 주먹을 맞대어 인사를 받아줬다.
“솔직히 지금 자네에게 궁금한 게 정말 많아. 하지만 일단은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하지.”
“아… 네, 네.”
“사단이 일단락되면 나와 진득하게 대화를 한 번 나눠주게. 이것만 약속하면 전적으로 자네를 믿고 협력하겠네.”
“예. 그럼요. 제 주니어 걸고 약속드립니다.”
“하핫. 좋아.”
그는 호탕하게 웃어넘기더니 곧바로 철컹! 건틀렛을 변형시켰다. 격철음이 울릴 때마다 건틀렛의 묵직한 손등부분에서 뾰족한 말뚝이 튀어나오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나는 잠깐 멍한 눈으로 건틀렛을 쳐다봤다.
‘와. 개간지난다.’
저런 걸 파일벙커라 그러던가? 남자의 로망이라 그러더니 빈 말이 아니다.
나중에 제작법이나 입수처를 알아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와중, 히크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되겠는가.”
“아. 그, 그게….”
나는 히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대략적인 현재 상황을 그들에게 알려줬다.
불사교도들의 목적이자 카사스의 목적인 아스타르트 파편의 소환. 그걸 위해 희생된 설백. 그녀에게 귀속된 반지에 걸린 주술. 그로 인해 학살되는 케른 주민들과, 그걸 막기위해 내가 발악했던 것까지.
‘최대한 진실에 가깝되… 나 불리한 건 빼고.’
… 놈들의 소환 목적이 아무래도 나와 루시를 제거하기 위함인 것 같다, 라는 긁어부스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해서 하등 좋을 게 없으니까.
어쨌든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문득 적랑과 히크가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아스타르트의 파편이라니. 마왕 아스타르트의 재림이라도 꿈꾸는 것인가. 마르크트레스의 수많은 카발리어가 목숨 바쳐 처단한 그 끔찍한 괴물을….”
“얼마 전부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 싶었지만. 설마 불사교가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내 적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시선은 당연히 내게 향해 있었다.
“엘더리치 슬레이어. 자네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국가적, 아니 전 인류적으로 중대한 사안이 될 수도 있네. 내뱉은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는가?”
“이미 주니어까지 걸었는데, 심장이라도 뽑아 드릴까요?”
“… 하핫. 됐네. 자네 심장 뽑아서 내가 어디 쓰겠나.”
그러게요. 쓸 데도 없는 거 전에는 왜 뽑아가셨습니까.
속으로 좀 꿍얼댔지만. 어쨌든 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적랑을 보니, 일단 내 말을 믿어주기로 한 듯하다.
나는 그쯤에서 두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며 조금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부터… 두 분이 해야할 일을 알려드리죠.”
일단 내가 묶어놓은 모든 불사교도를 처단하되. 그들을 케른 밖으로 빠져나가게 둬선 안 된다. 또한 이 테러를 주도한 집단은 시체를 움직이는 사술을 쓰니 죽인 후에도 방심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말해준 걸 요약하면 이 정도다.
“인간이 시신을 움직인다면 흑마법이겠군. 아스타르트 파편 소환도 흑마법의 일종으로 봐야겠어.”
내 말을 끝까지 유심히 들은 적랑은 턱을 쓰다듬었다. 야수의 그것처럼 흉흉한 날카로움이 그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중얼거린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 생각보다 마법을 많이 아시네요? 육체파 같으신데.”
“자네를 추천한 요한부터가 마법사 아닌가. 내가 미텔란트 칠마존 쪽으로 인맥이 좀 있네. 흑마법에 정통한 이와도 좀 친하지.”
“아하.”
“안 그래도 무신제 축하사절로 그 친구가 곧 크로스페이드를 방문할 예정이네. 그러니 자네의 일행이 걸렸다는 화신체의 의식 건은, 내 그 친구에게 접선해서 해결해 보겠네.”
“오오…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이 계속 걸렸었다.
지금 눈앞의 불사교도를 모두 제거한다 해도, 카사스의 수장… 이 극한의 관음충 새끼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 의식이 언제 다시 발동될지 모른다. 결국 반지에 걸린 의식 자체를 파괴하지 않는 한 불안요소가 지속된다. 그 가려운 부분을 적랑이 해결해준 것이다.
나는 삼보일배할 기세로 그에게 미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적랑은 배알 없는 내 행색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지. 다만 시신에 장난질을 못 치게 만들려면… 아무래도 사지를 분지르거나 흔적도 없이 으깨야 하니. 조금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 되겠군.”
태연작약하게 섬뜩한 소리를 지껄이며 치고나가는 적랑. 그는 본인이 내뱉은 말을 스스로 증명하듯, 즉시 불사교도들을 하나씩 쳐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푸직, 우드드득! 사람의 뼈가 뒤틀리고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연신 울린다. 그러고 나면 거기엔 전에 사람이었던 고깃덩어리가 피에 흥건하게 젖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으음. 일방적인 살육은 좋아하진 않는데.”
적랑 본인은 그렇게 중얼댔지만 보는 우리 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는 거침없고 잔인한 손속.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닌 듯한 무표정. 이렇게만 보면 누가 불사교도인지 모르겠다.
나는 온통 허여멀건한 그가 왜 ‘백랑’이 아니고 ‘적랑’으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야수 같은 흉광이 눈에 깃들고. 적의 피를 한가득 뒤집어쓴 시뻘건 뒷모습은… 확실히 늑대를 비롯한 맹수를 떠올리게 했다.
나와 히크, 그리고 살수들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적랑의 살육을 지켜봤다.
“그, 그럼, 우리도 자네가 지시한대로 따르겠네.”
히크가 곧장 살수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시가지의 네 방위를 향해 멀어졌다.
히크는 그들을 따라가기 직전 내게 말했다.
“관문의 경비는 맡겨주게. 적랑님에 비하면 힘이야 하잘 것 없지만. 우리는 쪽수가 있으니 쉽게 밀리진 않을 걸세. 위급해지면 즉시 기별을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 아… 예.”
“서로 살아서 다시 만나지.”
히크가 고개를 슬쩍 까딱인 후 망설임없이 뒤를 돌았다. 그가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어, 저기!”
“… 음?”
히크가 뒤를 돌아본다. 의아함을 담은 그 눈빛에 순간 어깨를 떨었다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호구 특. 서로 잘못한 거 있어도 웬만하면 먼저 사과한다. 이번에도 그럴 작정이었다.
“전엔 미안했습니다. 몸에 빵꾸난 살수랑 조수한테도 그렇게 좀 전해주십쇼.”
“… 천만에. 오히려 내가 미안하군. 그 때 믿어주지 못해서 말이야.”
히크는 히죽 웃더니 다시 발놀림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나타날 때 그랬듯, 새벽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며 살수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나는….
“쿨럭! 커헉! 쿠헉!”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기침과 토혈을 쏟아냈다.
삐빅, 삐빅. 아찔한 눈앞으로 연신 같은 상태창이 튀어나와 내게 경고했다.
[경고 - 마력 고갈]
[상세: 마력 고갈로 체력이 빠르게 감소한다. 체력이 바닥나면 생체 역류로 체내가 폭발한다.]
‘결, 국. 왔군.’
내가 히크에게 불사교 척살을 팽개치고 관문의 경비를 맡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이미 임계 직전이었다. 사슬이 언제 풀릴지 이제 나도 모른다.
“아직…!”
우드득.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진 신형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팔 다리가 부들거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기우뚱 엎어졌다.
콰직. 지면에 주먹을 처박고, 가까스로 쓰러지는 걸 면했다.
“안 돼….”
아직은 안 된다.
이대로 내가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시선을 조금 멀찍이 뒀다.
적랑은 놀라운 속도로 살육을 벌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정말 10분 안에, 케른의 모든 불사교도가 시체를 조종할 건덕지도 없이 고깃덩어리가 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앞으로 내가 마력 고갈로 죽을 때까지 채 3분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른 상연회의 모두가 붙는다 해도 3분 안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버텨… 제발…!’
내가 쓰러지면 그림자 사슬이 해제되고, 적랑이 불사교도를 판별할 기준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불사교도의 학살이 시작된다. 난전이 되고 수많은 목숨이 사라진다. 어쩌면 일부 불사교도는 히크의 포위망을 뚫고 케른을 탈출할지 모른다. 그러면 또 강림 의식이 시작된다.
뭐 이후에 어떻게 되든. 이미 죽은 나는 89번째 트라이를 시작할 거다.
“안 된다고… 이, 씨… 팔….”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라고. 옘병싸맞을 몸뚱아리 같으니.
여기까지 왔다. 무수한 내 시체를 넘고 넘어서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이제 진짜 코앞이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아니.
“죽고… 싶지… 않아….”
나는 마력 고갈의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깜빡거리는 시야를 적랑에게 고정했다. 집념에 가까운 오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온다고 87번이나 죽었다. 얼마나 멘탈이 박살나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여기서 더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
‘제, 제발…!’
죽음은 많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괴물로 변해가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것마저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면. 더 이상은 죽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느끼는 ‘죽음의 공포’란 그것이다.
“누, 누가 좀….”
누구라도 좋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조로아스터, 미네르바, 사신 자매들… 모 사이비 교주 이X희만 빼고 정말 아무나 괜찮다.
“… 도와줘….”
이렇게까지 굴렸으면 X발. 제발 이번만 내 편 좀 들어 달라고.
지금까지 철저한 무교였지만. 지금 날 도와주는 신이라면 내가 죽을 때까지 믿어볼 테니까. 제발. 제발 한 번만! 나도 좀 먹고 살자고!
“커헉.”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쿨럭. 기침과 함께 다시금 피가 쏟아졌다.
온몸의 혈관이 뜨겁다. 폭발할 것처럼. 곧 폭발하는구나. 오싹한 직감이 뇌리를 후려쳤다.
‘한… 놈이라도… 더…!!’
하지만 그래도 그림자 사슬을 해제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해제해도 도망은커녕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는 거. 예라이 썅팔, 개띠꺼운 불사교도를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겠다.
노빠꾸 노퓨쳐 막장인생 박정용의 고유 스킬. 쇠고집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 그랬던가?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한테만 찾아오는 거라고.
“네. 도와드릴게요.”
퍼버버버벙!
간드러지는 미성이 엄청난 연쇄폭발에 밀려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쏟아진 수십 개의 무언가가 일제히 폭발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가공할 풍압에 나는 종잇장처럼 날아다녔고. 신전 벽에 부딪친 다음에야 간신히 제동이 걸렸다.
“…. 으어?”
나는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뭐, 뭐… 야….”
눈앞이 초토화 돼있었다.
시가지의 불사교도가 일거에 흩어진 편육이 되었다. 사방을 가득 메웠던 폭발은 정확히 불사교도들만 노려서 그들을 헤집어놨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용님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날아왔어요. 죄송해요 정말로! 사장님한테 혼나느라 전단지를 늦게 봤지 뭐에요!”
그러자니 머리 위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이 들리기 전에 얼핏 들렸던 바로 그 목소리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얼빠진 탄성이 즉각 터져나왔다.
특유의 헤실거리는 웃음이 걸린 얼굴을 본 다음에야. 내 빡대가리가 목소리의 주인을 매치시켰다.
나는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 세스나.”
세스나다. 그녀가 내 위에 둥둥 떠있다.
발밑이 기계적으로 변형되어 새파란 플라즈마를 방출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걸로 날아다니는 듯싶었다.
게다가 그 사이 어디서 구한 건지, 원피스가 아니라 진짜 메이드가 입을 법한 고스로리 차림을 하고 있다.
“하.”
나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직후에 농담을 내뱉은 걸 생각하면, 웃은 게 아닐까 싶다.
“너… 메이드 로봇이라며. 별 게 다 된다?”
“아.”
철그럭!
택티컬하게 변형된 양팔의 미사일 사출구를, 멋쩍은 듯이 가리는 물빛 머리칼의 로봇.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몸에서 미사일 나가는 여자는… 싫어하세요?”
그 황당하고 실없는 모습이 시험의 장막 때 기억 그대로였다. 나는 몸상태도 잊고 헛웃음 실실 흘렸다.
와. 진짜 세스나 맞네.
“아니… 존나 최고야….”
나는 아까 맹세했던 대로 세스나교의 신자가 되기로 했다.
전투로봇 메이드 만만세다. 그녀는 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