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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11화 (87/280)

111화 (코 쓱)

모든 불사교도들의 속박이 끝나고. 체감상 몇 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나는 여신의 신전 앞으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흐릿한 시야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별빛이 희미해진 하늘은 어느새 연한 남색이 되어 있었다.

밤이 물러간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다.

“버티는 것만 치면… 최장기록 갱신이네. X벌.”

나는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600개를 상회하는 사슬을 유지하는데 정신력을 죄다 쏟아서 가물가물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도전에서도 날이 밝는 걸 목격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 최장 기록이 맞다.

이건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단순히 전면전이라면 오히려 지금보다 시간이 짧게 든다. 아스타르트 파편이 소환되든, 내가 죽든, 불사교가 전멸하든. 결착이 나는 데는 원래 3시간 안팎이면 충분하다. 날이 밝을 여지는 없다.

“허억… 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숨이 거칠어진다. 땀은 온몸에서 쏟아지다 못해 콸콸 흐르고 있었다. 괴롭다. ‘기 빨린다’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지금 절절히 실감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미미한 백색광이 내 몸을 뒤덮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플릭이 내게 축복을 걸어주고 있었다.

“크훕… 쿨럭! 쿨럭!”

그리고 그 플릭의 얼굴은 나 이상으로 헤쓱해졌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해져 있는 상태였다.

원래 좀 불쌍해 보이는 비주얼이긴 했지만. 저렇게 시체가 움직인다 싶을 수준이었나?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이걸로… 돼, 됐습니다. 추, 추, 축복을… 걸었습니다.”

나는 쇳소리처럼 흘러나오는 플릭의 말을 듣고서야 퍼뜩 목소리를 뽑아냈다.

“그… 제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런데요. 지금 이게 몇 번째 축복이었습니까.”

“저, 저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 일단 100번은 확실히 넘은 것 같습니다. 하핫….”

100번이라. 그 엄청난 숫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플릭이 영혼을 토해내는 기침을 재차 연발한 뒤였다.

“원래 축복이란 게… 헬창들 푸쉬업 하듯이 하루 100번 쌉가능하고 그렇나요?”

“수, 수습 시절 대민지원 나가도 하루 50번 이상은 안 해본 것 같습니다만… 조, 조금 지치긴 하는군요.”

조금 지친 게 아니라, 당신 면상 보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저거 역시 미래까지 끌어다 쓰던 거였잖아. 나 때문에 저 꼬라지 된 게 맞았다.

나는 식겁해서 그에게 손짓했다.

“이제 됐어요 사제님. 좀 쉬십쇼. 진짜 위험하다 싶으면 제가 말 걸게요. 나보다 지금 댁이 위험해 보여요.”

“아, 아닙니다… 용사님께서 이, 이렇게 고생을 하고 계신데… 제, 제가… 조금이라도 돕게 해주십시오.”

“아니 사제님. 이미 충분히 많이 도와주신 거 같은데….”

“케른의 사, 사제로서… 저, 저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는 플릭을 가만히 쳐다봤다.

플릭은 안 그래도 빼빼 마른 몸으로 비틀거리면서도, 눈은 어느 때보다도 굳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나에 대한 선망과 존경이 잔뜩 어린 모습이었다.

‘처음이랑 완전 딴 사람이네.’

플릭의 태도가 지금처럼 헌신적으로 돌변한 것은 시가지로 돌아온 직후. 사방팔방에 결박해 놓은 불사교도와 괴물들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부터였다.

그는 패닉에 빠진 주민들의 진정과 피난을 적극적으로 주도했고. 지금은 이렇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때 되면 내게 축복을 걸어주고 있었다.

따로 설명을 해준 적은 없지만, 아마 깨달은 것 같다.

내가 지금 케른에 벌어진 참극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사방이 적막하다. 이미 웬만한 시민들은 플릭 덕분에 모두 피난해서 아무도 없다.

차라리 그게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오해가 안 풀려서, 나를 살인귀인줄 안다. 괜히 그놈들 있어봐야 방해만 된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건 플릭과 나. 그리고 꽁꽁 묶여 나뒹구는 불사교도뿐이다.

“그나저나 정말… 괴, 굉장합니다 용사님. 도시 전역에 걸쳐 수 백 명을 동시에 속박하는 마법이라니…. 이, 이런 짓은 웬만한 카발리어들도 못할 겁니다. 제, 제 생각보다도 훨씬 강하신 분이셨군요.”

플릭은 얼떨떨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내가 케른 전역에 걸쳐 둘러놓은 그림자 사슬과, 거기에 묶여있는 불사교도들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런데… 카발리어가 뭐였지? 아 그래. 이 나라 정치인 겸 장군이었지. 그런 잘난 사람들과 비교해주니 영광인 건가? 모르겠다. 머리가 멍해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히히, 오줌발싸다.

“그, 그런데… 이,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용사님.”

“어쩌다니… 뭘요?”

“계, 계속 저렇게 묶어놓기만 해서는 저희 쪽에서 탈진하고 자멸하게 될 텐데요.”

플릭이 의외로 예리한 부분을 치고 들어온다.

하긴 본인도 지금 똥빠지게 고생하고 있으니, 이래놓고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서… 데헷.’ 같은 소리라도 해봐라. 저 인자한 얼굴에서 분노의 파이어 브레스가 뿜어져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게. 어쩐다.’

솔직히 지금 나는 걸어다니는 것조차 힘들다.

온 정신을 600개에 달하는 사슬 유지에 쏟고 있다 보니, 조금만 신경을 분산시켜도 와르르 무너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림자 사슬은 마력 효율 자체가 그리 좋지 않은 스킬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사용하지 않았던 거고. 그런 스킬을 이렇게 다중으로 사용한 상태에서, 저놈들을 내가 직접 처단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아직 움직일 힘이 있을 때, 케른에 존재하는 모든 시체들을 곤죽으로 만들어놨다는 점이다. 덕분에 카사스의 수장이 농간을 부려서 시체와 전투를 하는 거지발싸개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용사님… 이, 이제 저희는 어쩌면 좋습니까?”

내가 깜빡거리는 시야로 멍하니 땅을 쳐다보고 있자니. 플릭이 내게 질문해왔다.

나는 플릭의 얼굴에 흘깃 시선을 뒀다가 목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

“그거 저도 궁금하네요. 이제 어떡합니까 행님.”

자동번역 되는 이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플릭은 못 알아듣는 일종의 비밀 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떡하긴 인마. 기다려야지.

대답은 즉시 나왔다.

플릭은 갑자기 외계어를 중얼거리는 내 행색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수호 형님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기다린 다음이 궁금한 겁니다. 지원군이… 적랑이 오면 뭔가 뾰족한 수가 생겨요? 결국 놈들을 죽이지 못하는 상황인 건 똑같잖습니까.”

―그 때는 죽여도 되지. 너든 지원군이든 아무나 정해서 싹 쳐죽여버려.

“예? 아니 왜요?”

―한 놈이 화신체한테 못 가게 막고. 한 놈은 죽이고. 묶어놓고 패면 되는 거 아니냐. 일단 여기 있는 불사교 놈들을 싹 정리하고. 나중에 의식을 해제할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과연. 뭔 대단한 계획이 있나 했더니 역할을 분담해라 이거지. 나는 형님의 말을 듣자마자 낮은 한숨을 흘렸다.

형님은 그 한숨이 신경 쓰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뭐 문제라도 있냐?

“예. 그 케른에 묶어놓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가 않다니?

“케른에 입구가 동서남북으로 총 네 개 있어요. 그러니까 네 방향을 동시에 틀어막지 않는 이상 못 나가도록 막는 게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그 발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전생의 나는 그것도 실험해본 적이 있다.

약속의 평원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통로는 케른의 서부 관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살 저지를 아예 포기하고, 내 회귀점이기도 한 서부관문 앞에 죽치고 앉은 다음. 설백을 찾아오는 불사교도를 틀어막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장판파의 장비처럼.

‘하지만 실패했지.’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놈들이 동서남북으로 동시에 탈출을 시도해서였다.

서부관문으로 우르르 몰려왔던 불사교도는, 내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네 부대로 산개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케른을 탈출해 버렸다.

이건 도저히 인간의 의사소통으로 가능한 단합력이 아니다. 무슨 알파고한테 조종당하는 로봇부대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그거라면 아까 네가 말한 카사스의 사도들 특기지. ‘군체 제어’라는 흑마법이다. 여러 사람들의 정신을 동시에 지배해서, 네 말마따나 알파고처럼 일괄 제어하지.

나는 형님에게 현 상황의 부조리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고. 우리 짬킹 흑화 용사께서는 그 해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나X위키를 자청할만한 정보력이다.

나는 형님의 말을 듣고 곧장 상념에 잠겼다.

‘군체 제어. 흑마법….’

그렇다면 시체를 조종하던 그것도 흑마법의 일종이었나? 어쩐지 언데드와는 느낌이 다르다 싶었더니, 다른 게 맞았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베스타크에 시선을 가져갔다.

“흑마법은 그냥 마법이랑은 다른 겁니까 행님?”

―근본이 좀 다르지. 지금 인류의 마법은 제1대 마왕이 쓰던 거를 개량한 거고. 흑마법은 디아나가 쓰던 네크로맨서 일족의 마법이야.

디아나. 마녀 디아나가 사용하던 마법이라고? 그걸 저 새끼들이 왜 써. 기술제휴라도 맺었어?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혼란에 빠지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형님이 선수를 쳤다.

―음. 거기엔 바다보다 깊은 사정이 있는데. 스포일러를 좀 해주자면 디아나가 믿고 따르던 친구놈 중 하나가 ‘헥터 카사스’라는 이름이었어. 이 이상은 디아나의 사생활이어서 말해주기가 좀 그렇네?

“…….”

―어쨌든 정용아. 지금 중요한 건 개노잼 세계관 설명이 아니잖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해야지 않겠냐?

“그… 그야 그렇죠. 아니, 그러니까 한 말이잖수. 그 군체 제어 때문에, 나랑 적랑 둘로는 케른 봉쇄가 어림뽕짝도 없다니깐요.”

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나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고. 한숨과 함께 쿨럭, 기침이 터졌다.

후두둑. 바닥으로 새빨간 선혈이 흩어진다. 내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어.”

망연자실하게 그것을 쳐다보자니. 곧 심장이 욱신, 조여왔다.

눈앞으로 패널 하나가 올라왔다.

[상태 이상 - 마력 고갈]

[마력이 임계 이하까지 저하되었다. 체력이 빠르게 감소한다.]

“프, 플릭 사제….”

나는 황급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부르는 것을 그만뒀다.

플릭은 진작에 기절해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사경을 헤매는 게 보였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이내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끝났군.’

앞으로 생명력을 전부 사용해서 사슬을 유지한다 해도… 채 10분을 유지할 수 없다. 직감적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마력이 고갈되고. 생명력이 끝까지 저하되면 아마….’

나는 국경 인근 마을에서 폴룩시우스 마왕과 싸울 때를 떠올렸다.

마왕 폴룩시우스가 사용하던 마력을 제거하는 펄스. 그걸 지속해서 얻어맞은 용사들은 그 자리에서 펑, 풍선처럼 터져 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엔 폭사 엔딩이냐. 기분 나쁜 사망 콜렉션 탑5 안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떠올랐다.

“후우. 다음에는… 적랑을 이쪽에서 찾으러 갑시다. 형님이 방향을 알고 있으니까 희망은 있네요. 아무튼 혼자보단 아무래도 둘이 막는 게 훨씬 낫겠죠 뭐.”

―음?

나는 체념이 담긴 유언을 쏟아냈고. 동시에 수호 형님이 의문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베스타크가 이내 우우웅, 떨려오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야. 내가 언제 지원군이 한 명이라디?

“…… 예?”

―적랑?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난 한 번도 이쪽으로 오는 지원군이 한 명이라고 한 적은 없다?

그 폭탄 발언에 의문의 탄성을 흘리는 건 내쪽이 되었다.

심장이 벌컹거리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원군이 한 명이 아니라고? 그러면 여러명이란 소리인가?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지금 나를 도와주러 와줄만한 사람이 그 외에 또 있을 리가… 까지 생각한 그 순간.

기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네인가? 불사교의 습격을 모두 예측했다는 엘더리치 슬레이어 박정용 군.”

철그렁. 섬뜩하면서도 귀에 익은 격철음과 함께,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닿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목소리….’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까스로 돌려 뒤를 쳐다봤고. 거기에는 뇌리에 인상깊게 박혀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묵빛을 발하는 건틀렛. 흉터로 가득한 얼굴과 야수 같은 눈빛. 그리고 사자 갈기 같은 백발이 시선을 한껏 사로잡았다.

“…… 적랑.”

문자 그대로 내 심장을 빼앗았던(물리) 남자라 그런가.

X발, 남정네 보고 가슴이 이렇게 뛰기는 또 처음이다.

“미안하군. 좀 늦었다네.”

그리고 수호 형님의 말대로였다. 모습을 드러낸 건 적랑 혼자만이 아니었다.

스스슥. 적랑을 중심으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커먼 신형들. 온몸을 칠흑으로 감싼 흑장속과 검은 단검으로 무장한 살수들이 10명 가량. 기억에 있는 복장을 목격한 나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렀다.

“테러 규모를 보니 우리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서 말일세. 근처에 파견임무를 수행하시던 적랑께 자네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네.”

직후 그렇게 말하며 등장한 노인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노인을 알고 있다. 케른상연회 특급 살수들을 거느린 케른의 밤주인. 히크 토시오르였다.

그는 천천히 살수들을 이끌고 내쪽으로 다가왔고. 이내 주저앉아 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입가에는 미약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순백의 마왕.”

뜬금없이 튀어나온 소리에 눈썹을 움찔했지만. 이내 히크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상기시켰다. 나는 피식 웃었다.

히크가 내민 손을 맞잡고 힘차게 흔들며, 격한 긍정으로 암호의 답어를 내뱉었다.

“용사의… 전추.”

히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돌아가 적랑의 옆에 나란히 섰다.

나는 모여든 그들의 면면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이 극적인 상황에 감격한 나머지, 없는 힘 쥐어짜 우렁차게 외쳤다.

“지에에엔장! 믿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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