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세 명이 오리라
참고로 거주지구의 최대 난관은 이미 위치를 다 아는 저격수도 아니고. 조무래기 불사교도도 아니다. 설백의 설득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현재 시점에선 엄청나게 쉬워졌다.
왜 그렇냐고? 간단하다.
“정용님! 몸이 이렇게 만신창이… 가 아니네?!”
시가지를 돌파한 내가 자잘한 기스 하나 없었으니까. 그녀가 내게 굳이 붙어있고 싶어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저 모 북두만화의 주인공처럼 당당한 풍채로 설백의 앞으로 걸어가서, 척. 시가지를 삿대질하며 말하면 된다.
“설백. 불필요. 불사교 대가리 박살. 나 혼자 충분. 귀환, 요구.”
“…… 네, 네에… 아, 아무튼 부디 조심하세요! 정용님.”
“오냐.”
그렇다. 설백이 애초에 나한테 붙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쓴 이유는, 내가 걱정돼서다.
설백은 정의감이 강하고 정이 많을 뿐이지 지능이 낮은 게 아니다. 걱정거리를 초전박살내면 그녀는 생각보다 쉽게 납득하고 돌아간다.
그래. 이것도 결국, 어떻게 보면 내가 약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설백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거주지구도 클리어!”
어쨌든, 거주지구는 생각대로 쉽게 정리가 끝났다.
거주지구는 말 그대로 케른 주민들의 거주를 위한 집이나 여관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곳 하나만큼은 정리하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다.
‘놈들의 동선이 너무 뻔하니까.’
어떤 여관에는 몇 명. 어떤 집에는 몇 명. 이런 식으로 분할되어 건물마다 숨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면상 외우기도 쉬울뿐더러 대략적인 분포를 파악하기도 훨씬 용이하다.
거주지구의 모든 불사교도를 사슬로 제압하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허억… 허억… 혀, 형님… 지, 지금까지 혹시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음… 한 300명 죽은 거 같은데? 그 중에 100명 정도는 처음에 네가 죽였다. 알지?
“하이고 X발… 예에. 알고 말고요.”
아스타르트 주식회사의 대주주인 건 영 찜찜하지만. 그래도 아직 300명 밖에 안 죽었으면 희망이 있다. 일일이 죽이는 게 아니고 기회 봐서 속박마법만 걸면 되다 보니, 시간이 훨씬 단축되고 있었다.
나는 시시각각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옮겨 상업지구로 향했다.
“끄아아악! 괴, 괴물이다!”
“마족이다! 살려줘!!”
그리고 상업지구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비명소리. 나는 혀를 차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망할… 하필 누님도 상업지구에 있네.’
상업지구는 안 그래도 카사스의 수장이 배치한 괴생물체들이 집중 포진한 곳이다. 거기다 마족 누님이 지금껏 안 보인다 싶었더니 이번에는 상업지구를 배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베스타크가 부르르 떨려왔다.
―쫄지 마 인마. 어차피 지금 목적은 저놈들 죽이는 게 아니잖아.
“아. 하긴….”
―기회 봐서 속박만 하면 돼. 죽이는 것보단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되지.
수호 형님이 내 초조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시기적절하게 말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그 말에 불안감을 떨쳐내고 다시금 힘있게 지면을 박찼다.
한 달음에 학살 현장 중앙에 도착한 나는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그림자 사슬!!”
촤르르륵!
사방에서 어둠이 뱀처럼 뻗어나가 괴물과 불사교도들을 사정없이 옭아매기 시작했다.
* * *
“크으… 어서 이걸 풀어라… 이 비겁한 놈…!”
“푸하아… 하아… 미, 미쳤다고 풀겠냐… 어, 어떻게 묶었는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격한 숨을 몰아쉬었고. 내 앞에는 시커먼 사슬에 속박된 마족 누님이 온몸을 비틀며 바동거리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격해진 숨. 그리고 사슬로 단단히 결박된 육감적인 몸.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갑옷… 오우야. 이렇게 보니 이거 모양새가 좀….
―이 상황에 주니어가 뇌를 지배하누.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냐?
“으허흠! 그, 그럴 리가 있겠슴까.”
나는 퍼뜩 몸을 일으켰다. 작업을 마친 상업지구를 벗어나며 하나 남은 물의 에테르를 들이켰다. 새파란 물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삭감된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켰다.
알싸한 청량감 속에서 나는 착잡함을 느꼈다.
‘… 이제 어쩌냐.’
물의 에테르가 바닥난 병을 보고 가만히 생각했다.
총 600명에 달하는 개체를 한 번에 속박하고 있어서 그런가, 마력의 소모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수 초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쏟아져 나갔다. 그러면 나는 본능적으로 리미트를 직감한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짜냈다.
“… 아, 앞으로 길어도 10분. 곧 마나 오링납니다 행님.”
―10분… 음. 원군이 오려면 그것보단 훨씬 더 걸릴 거 같은데. 혹시 남은 불사교도가 더 있냐?
“기억 상으론 뒷골목 쪽에 소수 침투조가… 20명 정도 더 있을 겁니다.”
―그러면 얼른 마력 회복 수단을 확보해야겠군… 혹시 주변에 포션 같은 거 팔만한 데가 없나?
“제가 알기론 없수다.”
내가 마력을 회복할 수단은 물의 에테르뿐이다.
애초에 이쪽 세계에선 포션이 웬만한 보석보다도 귀해서, 이거라도 있는 게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포션 같은 게 매대에 하나라도 보였으면, 내가 진작에 상업지구를 먼저 클리어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겠지.
―흠. 그러면 마력을 회복할만한 수단은 뭐 하나도 없나? 그건 좀 곤란한데.
“포션 외에 마력 회복 수단이라… 아.”
나는 걷다 말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어떤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정말 우연찮게 눈에 들어왔다. 상업지구에서 거주지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한 건물. 낡고 허름해서 잘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익숙한 거리의 풍경에 기시감을 느껴 우연히 바라본 그곳은… 여신의 신전이었다.
신전. 플릭. 사제. 축복과 축성. 회복.
그래. 회복. 머릿속에 번개가 한 줄기 콰릉, 내리쳤다.
나는 퍼뜩 신전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플릭 사제니이이임!!”
콰앙! 문을 부술 듯이 열었다. 부서졌다. 상관없다. 깽값이라면 나중에 얼마든지 물어주겠다.
나는 부서진 나무문을 대충 아무데나 던져두고 신전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거기엔….
“전능하신 프로피샤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프로피샤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프로피샤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제단 구석탱이에서 웅크린 몸을 달달 떨고 있는 플릭이 보였다. 실성한 얼굴로 염불처럼 신 찾는 모습이 퍽이나 처량하다.
미안하지만 지금 현실도피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다. 나는 곧장 플릭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턱, 움켜잡았다.
“이봐요 사제님. 정신 좀 차려봅시다!”
“히에에엑! 으아! 아으… 으아? 다, 당신은….”
경기를 일으키던 플릭은 이내 내 얼굴을 시선에 담았고. 천천히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플릭이 점점 울먹거리나 싶더니. 그 자리에서 내 손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으… 프, 프로피샤여… 미, 미천한 저를 위해 구, 구원자를 내려주심에 감사….”
이 양반 거의 정신이 나갔네 이거.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한 번 흘리고. 플릭의 싸대기를 한 대 힘껏 후려갈겼다.
쫘악! 쫄깃한 소리가 신전 가득 울려퍼졌다.
“크하악! 이,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아프냐? 그래. 아프라고 때린 거니까 아프겠지.
나름 힘조절 한다고 했는데, 기본 스테이터스가 이미 인간을 초월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다. 그 증거로 플릭은 억울함을 가득 담은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용사님! 수, 순간 프로피샤 곁에 갔다 왔습니다!”
“사제로서 좋은 경험하셨네. 답례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쇼.”
“예? 부, 부탁이라니….”
“간단한 거예요. 잠깐 저 좀 따라다니면서 축복만 계속 걸어주시면 됩니다.”
내가 싱글거리며 부탁을 마쳤고. 내 부탁을 가만히 상기해보던 플릭은 이내 얼굴이 헤쓱해졌다.
“따, 따, 따라 다니라니… 바, 바, 밖에… 말입니까?”
“예.”
“사, 사, 살인귀들이 밖에 득시글거립니다 용사님! 지, 지금 나가면 뼈도 못 추립니다! 요, 용사님은 강하시니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힘이라곤 일천한, 지방직 파견 사제에 불과….”
“그래서 제 부탁을 거절하시겠다?”
“그, 그것이….”
플릭은 말을 잇지 못햇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을 움츠리는 플릭. 얼굴로는 이미 100번 정도 거절한 모습이다.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휴, 휴우….”
“하지만 제 오른손은 이해하지 못한대요. 그렇지 오른손아?”
“…?”
“응 맞아 정용아. 난 저 겁쟁이 사제를 혼내주고 싶어.”
원맨 지랄쇼를 마친 나는 다시금 손을 번쩍 올렸다.
부탁이 거절당했으니 이제 협박을 해야지 뭐. 나는 플릭의 볼에 손바닥을 조준하고, 다시금 손을 내리쳤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의 풀스윙이다.
“히이익! 가, 가겠습니다! 갑니다 가요!”
우뚝. 내 손이 플릭의 볼과 맞닿기 직전에 멈췄다. 장풍 마냥 손바닥에서 광풍이 불어닥쳐 플릭의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플릭은 비뚤어진 안경을 얼떨떨하게 고쳐썼고. 싱글거리는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나는 몸을 일으키고 곧장 플릭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빨리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흐, 흐흑… 프로피샤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플릭은 울먹이며 내 뒤를 뒤뚱뒤뚱 따라붙었는데. 가는 내내 뒤에서 꿍얼댔다.
나는 한 번 더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가볍게 제압해 버렸고, 얌전해진 그를 대동한 채 뒷골목으로 진입했다.
잔당들의 위치는 전생에서 파악이 끝났다. 어두운 거리를 가로지르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꺄아아악! 엄마아아아!”
마침 불사교의 마지막 소수 잔당들이 한 부랑자 소녀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놈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스킬을 외쳤다.
“그림자 사슬!!”
촤르르륵! 잽싸게 쏟아져나간 어둠이 놈들을 옭아맨 채 쇠사슬이 되어 굳어졌다. 20명에 달하는 불사교도들이 일거에 행동불능이 되었다.
끝났다. 놈들이 묶이는 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표정에 힘이 탁 풀렸다.
“아아…!”
털썩. 부랑자 소녀도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았다. 그녀가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 그 아래 눈물로 범벅이 된 회색 눈이 인상적인 꼬맹이.
… 당연한 말이지만, 모르는 애였다.
“아, 아저씨… 누구?”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심히 거슬리지만, 일단 딴지는 안 걸기로 했다.
나는 훌쩍 등을 돌리며 한 마디를 남겼다.
“취미로 용사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뒷골목을 다시 빠져나왔다.
플릭에게 눈짓하자 그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내게 축복을 걸어줬다. 그 짧은 사이에도 뭉텅이로 빠져나간 마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크. 병신 같지만 멋있었다 정용아.
이젠 내 독백까지 가로채버리는 수호 형님.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방금의 나는 존나게 멋있었다.
개멋진 내 눈동자에 건배.
… 그리고 방금 마주쳤던 소녀의 강렬한 회색 눈동자에도,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