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꼰-
―야 용사야. 대답 안 해도 된다. 어차피 네가 주인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 어… 음. 그, 그래.”
베스타크의 ‘고대의 에고’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그 이후로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입을 떠벌거렸다.
―후까시 좀 잡아보고 싶었어. 혹시 씹덕감성 극혐하냐? 그럼 개드립 안 치고.
“…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냐? 하핫. 말 좀 통하겠는데? 이런 데서 한국사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형님이라고 불러 인마!
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란 나머지 입을 뻥긋도 못 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놈이 ‘인정? 응 인정’이니, 씹덕감성이니, 후까시니… 한국인이나 알법한 속어나 유행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 놀라운 점은….
“야.”
―음?
“너 어떻게 한국말 쓰냐?”
한국어가 들리고 있다.
자동번역되는 이국의 언어가 아니다. 고대의 에고는 지금 한국말로 내 머릿속에서 날뛰고 있다.
잠깐만.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럽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정리… 정리를 좀 해보자.’
마녀의 기사 한이 사용하던 베스타크. 거기에는 고대의 에고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 이건 나도 옛날에 아이템 설명을 봤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미미르의 눈 스킬레벨이 부족해서 상세 확인을 못 했었지.
그 고대의 에고가 갑자기 깨어났다. 원인은 알림창 내용으로 추측해보면, 아무래도 반복되는 죽음 때문에 흉마가 쌓인 것. 정확히는 그 특수한 마기를 검이 흡수했기 때문인 듯하다.
좋아. 여기까진 일단 이해가 된다. 입력 완료.
‘그리고 다음은….’
깨어난 고대의 에고는, 살짝 철지난 한국의 급식체를 한국어로 구사하기 시작한다.
“크크루삥빵뽕?”
잠깐만. 다시 뇌정지가 왔다.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었더니 내 뇌속의 언어체계가 붕괴하는 느낌이다.
머리를 쥐어싸매고 고뇌하는 나에게, 다시금 고대의 에고가 무심하게 말했다.
―왜긴 쌔꺄. 한국인이 당연히 한국말하지. 일본어 하겠냐?
역시나 한국말이었다. 게다가 본인 입으로 한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어 운운하는 말투에는 불쾌감까지 서려있다. 굉장히 실감나는 한국인 스탠스다.
결정타는 그 직후였다.
―야. 근데 아까부터 말이 짧다? 니 몇 살이냐?
고대의 에고가 나이를 앞세워 서열정리를 시도했다.
… 이 새끼 한국인이 확실하다.
* * *
“아니… 그래서 고대의 에고님. 정체가 뭡니까 대체.”
결국 서열정리 당했다.
‘고대’의 에고인 만큼 나이로는 상대가 안 됐기 때문이다. 이 세계 역사 속 희대의 배신자, 마녀의 기사가 쓰던 검인데. 일단 나이를 백단위로 처먹고 시작하니 게임이 되냐. 지미럴.
내가 아니꼽기 짝이없는 존댓말로 묻자, 고대의 에고님(?)은 곧장 대답했다.
―이름을 묻는 거냐, 아님 궁금한 게 따로 있는 거냐?
“이름도 궁금하고 뭐… 여러 가지로 궁금한데요. 어, 일단 저는 박정용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이라면 수호. 한수호다. 청주 한 씨에 이름이 수호야. 프로텍트. 지킨다 할 때 그 수호. 오케이?
이런 미친. 성이 '한'씨라서 마녀의 기사 한이었던 거냐? 어이가 없네 옘병.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예… 그, 그럼 한수호님. 아니면 그냥 에고소드님이라고 부르면 될깝쇼.”
―형님으로 부르라니까 인마! 우리 사이에 뭔 딱딱하게.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말 섞은지 5분 됐수다. 붙임성이 지나치게 좋은 에고소드 형님일세.
나는 섬뜩한 붉은 문자열이 스멀스멀 기어가는 검신을 가만히 쳐다봤고. 이내 한숨과 함께 질문을 재개했다.
“예. 그럼 형님. 형님 뭐 하시는 분이세요?”
―뭐 하냐고? 뭐하냐 하면… 음. 나 소개할만한 게 뭐 있나?
고대의 에고… 아니, 수호 형님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말이다. 원래부터 이 칼에 들어있었던 건 아니야. 나 원래 사람이었어.
“예에… 그건 한국인인 거 보면 알겠구요. 그럼 어쩌다 칼에 갇히셨습니까?”
―갇힌 거 아니야. 내가 원해서 베스타크에 의식 파편을 봉인한 거지. 디아나한테 부탁했더니 해주더라.
“아하. 디아나한테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우뚝 멈췄다.
디아나라니. 너무 익숙한 이름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는데. 설마 내가 아는 그 디아나냐?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질문하는 얼굴이 무의식중에 검과 바짝 붙었다.
“그… 디아나라면, 설마 그 디아나요? 마녀 디아나?”
―마녀 디아나? 아 그래. 막간엔 그렇게 불리기도 했네. 나는 ‘공포의 대왕 디아나’라고 불리던 시절이 더 익숙해서. 그 땐 나도 ‘대왕의 하수인’이니, ‘타락한 용사’니 하는 별명으로 불렸었지.
“…….”
뭐지 이 대화. 방금 형님의 말을 듣고 터무니없는 가정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타락한 용사’라고 불렸다는 한수호 형님.
마녀 디아나를 옆집 친한 여동생처럼 대하는 태도.
그리고 마녀의 기사가 사용하던 검에, 자기 의지로 봉인되었다는 발언.
설마. 이 한국인의 정체는….
“혹시 형님… 마녀의 기사 본인이세요?”
―어, 맞아. 그렇게도 불렸어. 근데 이상하다. 당시엔 되게 마이너한 별명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오히려 대표적인가 보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르듯이 내뱉어본 가정이었지만.
의외로 쌈박한 긍정과 함께 특유의 TMI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어… X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포맷돼 버렸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최초로 소환됐던 그 배신자 용사가… 한국인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윙윙 맴돌았다.
그 중 하나로는 전직 시험 때 신세를 졌던 사신 자매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잘 대해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랑 비슷해서?
―마녀의 기사 한.
―우리는 그 사람을 믿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냥 진짜 외모가 비슷한 거였냐?’
나는 황당한 나머지 헛숨을 들이켰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
하긴, 이곳에서 한국인의 외모는 무척 희귀한 편이다. 황인이라면 생각보다 꽤 있지만 중동이나 아랍풍에 가까운 이목구비다. 동북아시아 계열은 진짜 드물다.
내가 설백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스스럼없이 대한 것도, 오랜만에 본 비슷한 외모에 대한 반가움이 한몫 했을 정도니까. 말 다했다.
‘… 우리가 코쟁이들 외모로 구별 못하는 거랑 비슷한가?’
실제로 내가 저 한수호라는 사람과 얼마나 닮았을지는 몰라도. 체격이나 나이만 비슷하면 이쪽 사람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긴 할 테다.
나는 황당함에 못이겨 연신 콧소리를 냈고. 이내 그에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왜 마녀의 기사 ‘한’입니까. ‘한수호’나 ‘수호’였으면 어감 때문에 추측이라도 할 텐데. 기출변형도 정도가 있죠 행님.”
수호 형님은 그 말에 ‘아’ 하는 탄성을 흘리더니. 잠깐의 침묵 이후 굉장히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자 봐라. 나는 사람들한테 이름을 ‘한수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단 말이야.
“예. 그래서요?”
―근데 여기는 외국에서 그렇듯이 앞이 이름이고 뒤가 성이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한’인줄 알고 성이 ‘수호’인줄 안 거지.
서순 문제였다.
그래. 이름 순서. 지구에서도 외국인들이랑 자주 있는 해프닝이긴 하다.
황당한 나머지 머리를 박박 긁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뽑아냈다.
“아니 이런 미친. 그게 이유라고요?”
―그게 이유야. 거창한 거 없어. 그냥 세간이 착각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가오 빠지게 해명하기도 좀 그래서 냅뒀다.
적당히 가오 챙기며 사는 최종보스 최측근의 진솔발언.
방금 그 대답으로, 나도 살짝 이 양반과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복잡한 기분으로 하릴없이 뒷머리만 긁적였다.
‘충격이… 가시지가 않는구만.’
나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케른 시가지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걷는 와중에도 온 신경은 베스타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도 마녀의 기사, 수호 형님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사항들을 물어봤고. 수호 형님은 내빼는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대화에 응해줬다.
역사 속 최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답지 않게, 의외로 스무스한 대화였다.
―오오, 그래. 뭐든 물어보라고. 미리 못 박아두지만 내가 뭐 전투에 직접 도움을 주진 못해. 나 그냥 훈수충 겸 나X위키니까 질문 열심히 해서 뽕 뽑아라.
―좋아. 나에 대한 사항은 이정도면 됐고. 그럼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나 좀 들어볼까? 그래야 조언을 좀 해주지. 형이 그래도 모든 용사들 통틀어서 짬킹이야 인마.
―야. 88번 죽은 거 가지고 뭘 그리 엄살이야.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요. 나 때는 인마. 마왕 하나 잡아보겠다고 사흘 내내 죽고 그랬어 인마. 너는 복받은 거야. 용사 지원 시스템 같은 것도 있고 말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 그지?
대화를 해보면서 이 양반에 대해 깨달은 점 몇 가지.
일단 ‘흑화 용사’라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성격이 시큼털털 시원시원하다.
자기 살아생전의 기억이 많이 누락돼서, 오히려 본인 얘기는 별로 못 듣는다.
몇백 살 먹은 거 치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
그리고 마녀 디아나는 물론이고 수호 형님도 불사의 몸이었다. 추가적으로 당시에는 용사 지원 시스템이 없었다.
그 외 자잘한 걸론, 나이를 100살 단위로 처먹어서인지 꼰대 끼가 좀 있다는 것. 그래서 막노동 뛸 때 친했던 김씨 아저씨가 자꾸 떠오른다는 것.
뭐 이 정도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착한 듯하다.
아 그래.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남았군.
내가 줄기차게 이어지는 형님의 꼰대 멘트를 끊기 위해 ‘형님 때는 없었다면서 용사지원 시스템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그 대답이 이랬다.
―당연히 알지. 내가 만든 건데.
“…… 예?”
나는 오늘, 이 대륙에 만연한 용사 육성 RPG의 GM을 만났다.
―내가 구상하고. 디아나가 틀을 구축하고. 일부 아신들이 나를 믿고 파라이소에 적용시켜줘서 만들어진 게 용사 지원 시스템이다. 혹시 사신 자매는 만났냐? 걔네가 해줬는데. 귀여운 애들이었지. 응.
너무 놀란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나였고. 베스타크는 우우웅, 낮게 울리며 다시금 목소리를 토해냈다.
―한국인은 게임의 민족이자너~.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