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어웨이크(AWAKE)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에 의해 회귀 고정축 강제 개변이 시행되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3일, 02시 44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서부 관문]
얼떨떨하게 패널을 내려보는 내 앞에서, 루시가 천천히 맞닿았던 입술을 떼어냈다.
기분 탓인가. 핏기 없는 루시의 하얀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는 듯했다.
“카핫. 한 방에 모가지 컷! 나도 아직 녹슬지 않았구만.”
별안간 루시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저건 또 뭔 소리래. 나는 즉각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고. 루시는 내 눈빛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번쩍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목이 뎅겅 날아간 내 시체가 대자로 뻗어있는 환장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질문은 나 말고 네놈 시체한테 가서 하거라.”
“…….”
“에고. 난 좀 쉬어야겠다. 88번째 반복하려니 피곤하구만.”
뭔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쏙 들어가 버렸다. 루시가 저렇게 배째라는 식으로 나와버리니 이젠 뭐 놀랄 기운도 나지 않는군.
나는 얼떨떨한 그대로 내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무럭무럭 음울한 빛을 뿌리는 잔류사념에 허리춤의 랜턴을 가져갔다. 반쯤은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8, 민첩을 19,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서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으… 으오오오 부활완료!!”
나는 몰아치는 기억의 홍수에 몸을 웅크렸고. 우렁찬 기합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상쾌하군. 이번만큼 부활 후 상쾌한 기분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 시외버스 탈 때부터 참고 있던 화장실을 버스 내리자마자 해결한 느낌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아따 개쌍놈의 쌔기들! 싹 잡아 족치니 아주 속이 다 후련하네!”
전생에서 드디어. 드디어! 놈들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케른의 중앙시가지와 거주지구, 상업지구, 그리고 뒷골목의 소수잔당까지. 총 20명의 저격수. 30개체의 변이된 괴수. 그리고 패잔병 고위마족 누님. 나머지 짜잘이들이 대략 550명 정도. 죄다 잡아 죽였다.
징글징글하게도 많았다. 흉마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인간성이 마멸될 정도의 엄청난 학살극이었다. 그런 지리멸렬한 살육전을 11번이나 반복했다.
그 결과 지금의 내 레벨은….
[명칭: 박정용]
[별칭: 163417413번째 정식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348]
[체력: 2800/2800 마력: 1550/1550 신체상태: 약한 광증]
[힘: 395 민첩: 612 지능: 61 히어로 센스: 19]
[남은 능력치 포인트: 0]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패널의 수치만 봤을 때는 ‘숫자가 무식하게 늘어났네’ 정도의 감상이겠지. 그러니 단적으로 쉬운 예시를 들겠다. 일단 지금의 나는 소년만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할 수 있다.
날아오는 저격총 탄환을 마하 3의 속도로 손날치기를 해서 튕겨낸다거나.
드래X볼이나 나X토처럼 뿌슝빠슝, 눈으로 보이지 않는 속도의 공방을 펼치거나.
살기를 흩뿌려서 지면이 요동치게 만들거나, 약한 놈들의 다리를 풀리게 만들 수도 있다.
앞의 두 개는 어쩌다 보니 내가 직접 해봐서 예를 든 거고. 살기 흩뿌리기도 농담이 아니다.
진짜 그런 스킬이 생겼다.
[스킬 정보]
[명칭: 흉인(凶刃) 살포]
[효과: 반경 50미터 이내, 자신의 레벨 -200 개체에 한해 대규모 경직 효과 발생.]
[상세: 수라장을 헤쳐오며 전투의 극한에 다다른 자만이 체득하는 기술. 강대한 힘은 흉흉한 살의의 칼날이 되어 약자를 압도한다. 스킬 레벨이 오르면 효과 범위가 넓어진다.]
이 스킬은 내가 레벨이 300이 넘어가는 순간 저절로 생긴 스킬이다.
아무래도 레벨이 300이 넘어가면 용사든 현지인이든 무조건 생기는 스킬인 것 같은데. 나는 이 스킬을 배우자마자 반사적으로 변경백과 적랑을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은… 내가 만난 시점에 레벨이 적어도 300 이상이었어.’
두 사람을 적으로서 대면했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다.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다리가 저절로 풀리는 감각. 그게 바로 이 스킬 때문이었다.
이건 확실하다. 내가 전생에서 이 스킬 밥 처먹듯이 써봐서, 특유의 느낌을 잘 안다.
‘뭐, 덕분에 재미도 좀 봤고.’
불사교 조무래기들은 실력 편차가 심하다 보니 이 스킬에 무력화되는 놈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덕분에 최근 몇 번 트라이에서는 거의 필수스킬이 되었고. 내가 보유한 스킬 수에 비해 레벨이 너무 높아져서 포인트가 썩어넘치다 보니, 이미 진작에 20레벨 만렙까지 찍어놓은 상태다.
원래는 효과범위가 고작 반경 5미터였다. 지금은 10배나 늘어 50미터나 된다.
“에이씨…. 진짜 아까워 죽겠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어서 그랬다.
아깝다는 건 잃은 레벨이 아니다. 애초에 이미 불사교도를 때려잡아서 올릴 수 있는 레벨은 거의 한계인 상황이다. 일반 불사교도는 50명 잡으면 1레벨이 오를까 말까한 수준까지 와버렸다.
내가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레벨업 리미트 상황이 온 것이다.
‘적랑. 그 사람만 전투에 참가해 줬다면…!’
내가 새삼 안타까워진 건 적랑의 부재였다.
이제 레벨이 300대 중반 정도인 나조차 케른의 불사교를 혼자서 궤멸시킬 정도의 힘이 있다.
그런 나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적랑이 있었다면. 그러기만 했다면 내가 개고생을 할 이유도 없어진다. 지금처럼 수없이 죽어가며 트라이를 할 일도 없었을 거다.
물론 내가 이렇게 강해지지도 못했겠지만. 애초에 나는 인간병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옘병맞을.
‘이번이 88번째랬던가….’
나는 전생에서 루시가 들려줬던 어마어마한 숫자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땐 죽어가던 와중이라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나도 진짜 앵간히 미친 새끼구나 싶다. 끽해야 못 기억하는 죽음이 한 10번 더 있겠거니 했건만. 88이라는 숫자는 상상도 못했다.
‘아까 그 상황도, 아마 반복됐겠지.’
분명 루시는 전생 때처럼 나를 몇 번이고 말리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을 게 뻔하다. 기껏 여기까지 왔다. 투자한 게 아쉬워서라도 반드시 구해내고 말겠다는 오기가 들기 마련이다. 노빠꾸 노퓨처, 예스 상남자.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나는 그런 새끼다.
“와. 나 여기서 벌써 100번도 넘게 뒤졌네?”
미네르바한테 홀라당 속아(사실 속이진 않았다) 이세계에 온지 이제 고작 세 달 남짓.
하수구와 할센베르크에서 22번. 하얀 폭발에 휘말려 34번. 그리고 여기서만 87번. 이미 내 데스카운트는 143에 이르고 있었다.
뭐, 지금 내가 기억하는 죽음은 그 중에서 서른 몇 번뿐이지만. 그것도 졸라리 많긴 하다.
“음… 뭔가 방법이 없나….”
이번만큼은 케른으로 우라돌격을 중지하고. 진지하게 작전타임을 가져보기로 했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적랑의 소재를 알 수 있을만한 방법을 말이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아침 해를 맞아보겠다’ 같은 허세충만 쌉소리까지 내뱉었던 과거의 나였으나. 이제 와서 개추하게 적랑코인 떡상을 노리는 건 당연히 이유가 있다.
‘이거 나 혼자는 때려죽여도 불가능해.’
그걸 이제야 확실하게, 뼈저리게, 가슴 깊숙이 인지했다.
전생을 거듭해 레벨을 올려서 놈들을 압살한다는 작전 자체는 대성공했다. 결국 나는 진전의 생에서 불사교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부 쳐죽였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깨달았다. 내가 놈들을 전멸시켰어도 결국 아스타르트의 파편은 소환되었다. 설백은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이전 생도 마찬가지였어.’
설백이 어디에 있는지는 큰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약속의 평원에 있든, 나를 지키러 케른에 찾아왔든. 결국에는 불사교도와 카사스의 수장 놈이 농간을 부려 아스타르트의 파편이 소환된다. 마치 그렇게 되는 게 운명인 양.
거기까지 가면 게임셋이다. 난 아직도 그 소름끼치는 괴물 새끼를 이기지 못한다.
애초에 설백이 끔찍한 짓을 당하고 죽어버리니, 이겨도 의미가 없다.
‘최소한의 소환 조건도 만족하지 못하도록, 학살을 초장에 틀어막을 수만 있다면….’
놈들이 소환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인간의 목숨이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아냈다.
그게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최소 수치가 나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하지 못할 숫자인 건 확실하다. 안 그랬으면 내가 88번이나 꼴아박았을 리가 없다.
분명 공략의 방향성 자체가 잘못됐다. 그게 내 결론이다.
“으으음….”
하지만 역시 적랑의 소재를 알만한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내 후달리는 지능으로 한참을 고민해본 결과. 기껏해야 ‘전에 케른에서 만났던 걸 생각하면, 적어도 멀진 않은 곳에 있다’라는 사실이 도출되었다.
괜히 생각한다고 시간만 날렸군. 입맛을 다시며 12번째 출격 준비를 하던 그 순간.
―야. 거기 너.
나는 퍼뜩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 뒤에서는 변신이 풀려 녹초가 된 루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눈썹을 튕겼다.
“뭐냐. 왜 꼴아보냐.”
“… 방금 나 부르지 않았냐?”
“이제 환청까지 들리느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로. 쯧쯔.”
그러나 루시는 불쌍하다는 행색으로 혀를 찰뿐이다.
뭐지. 진짜 환청이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다시 케른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내 말 아직 안 들리냐? 으음. 143번이나 죽었으면 슬슬 들려야 정상인데?
143번의 죽음.
다소 경박한 인상을 주는 남자 목소리는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 그런 말이 들려오자, 환청이라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뭐야. 언놈이여?!”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 채 미친놈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 목소리가 들릴 법한 것은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진짜 미친놈 특수스킬 ‘환청’이 자동발동 되고 있는 건가. 귀신에 홀린 느낌에 눈을 끔벅이던 찰나.
―여기야. 칼 임마 칼. 시커먼 쪽. 베스타크를 주목해주십쇼 용사님.
방정맞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후려친다.
나는 속는 셈치고 허리춤의 베스타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눈을 부릅떴다.
“… 뭐야 이거.”
베스타크의 날붙이 표면에서 불길한 붉은 문자열이 기어다니고 있다. 겪어본 적 없는 이상현상에 나는 숨을 삼켰고.
[요검 베스타크가 특수한 마기를 흡수해 성장을 완료했다.]
[요검 베스타크에 잠들어있던 고대의 에고가 각성했다.]
두둥. 서늘한 음색과 함께 등장한 패널이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줬다.
―묻겠다. 그대가 나의 주인인가?
직후 장중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내가 아직 환청 들을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음을 증명해줬다. 워낙 갑작스런 상황에 한 동안 멍하니 검을 주시했다.
그러자 진지하게 물어왔던 목소리가 파핫,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더니.
―솔직히 마검 됐으면 이 드립은 쳐줘야지. 인정? 응 인정.
산통 깨는 몇 마디를 더 주워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