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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106화 (82/280)

106화 원점회귀

그렇게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 푸하아.”

케른의 서부관문에서 멀지 않은 음습한 골목길의 한복판.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나는 길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카핫. 즐거운지고. 재밌는지고!”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이제는 루시가 된 그녀가 널브러진 내 앞에서 이죽거렸다.

마음 같아선 저 볼을 잡아당겨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패줄 수도 없고. 입을 틀어막는 것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난 두 팔이 잘린 채, 고장난 수도꼭지 마냥 피를 철철 쏟고 있으니까.

“그래, 용사. 이번이 몇 번째냐?”

털퍼덕. 루시가 쓰러진 내 배를 깔고 앉으며 묻는다.

나는 격통이 욱신거리는 어깨 때문에 인상을 찡그렸고,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카핫. 그렇긴 하지.”

“말 나온 김에 묻자. 나 몇 번 죽었냐?”

내 물음에 루시는 코웃음을 쳤다.

태연하게 발장난을 치던 그녀가 내 상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뭘 묻느냐. 당연히 11번….”

“내가 기억하는 거 말고.”

“…….”

“내가 못 기억하는 죽음까지 합치면 몇 번이냐고.”

“호오.”하고 루시가 감탄사를 냈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내 발전이 퍽이나 장하다는 눈빛이었다.

너도 나처럼 무아지경으로 죽어봐라. 나도 모르게 감이 좋아지니까.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인 진실도 있는 법이니라. 꼭 알아야겠느냐?”

“알아야겠어.”

“86번. 지금 죽으면 이제 87번째다.”

“……!”

눈 돌아갈 숫자에 반사적으로 입이 다물어졌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반쯤은 한숨이었다.

“존나게 죽었네. 진짜로.”

“내 말이 그 말이니라. 솔직히 처음엔 걸레짝이 된 네놈을 보면 속이 다 시원했는데. 이젠 좀 지겨울 정도다. 카하핫.”

루시는 태연작약하게 대답하며 내 위로 벌러덩 누워 발장난을 쳤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

밤하늘이다. 별이 쏟아지도록 박힌 밤하늘로 피이잉, 높은 소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펑, 퍼벙! 허공에서 장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괴물새끼 제논 쪽으로 갔나 보군.’

나는 저게 뭔지 안다. 제논이 쏘아올린 신호탄이다.

제논 쪽에 위기가 닥쳤다는 소리다. 그럴 때는 신호탄을 쏴서 알리라고 말해놨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신호탄 불꽃이 터지는 모양새가 꽤 멋지다. 꼭 불꽃놀이 같다.

“퍽이나 절경이로고. 다음에도 이런 상황이 오면 나를 데려오거라.”

마침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루시는 들뜬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양쪽 어깨에서 욱신욱신 올라오는 격통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너부터 죽일 줄 알아라.”

“엄한 데 승질내는 건 추하다 용사.”

나름 진심을 담아 협박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화풀이가 추한 건 사실이니, 나는 그냥 입을 닫았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

설백의 시신이 거기에 누워있다.

생기가 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도 목 위쪽으로는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다.

온몸은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 옷은 이미 걸레짝이 되었고. 그 안으로는 살색보다 선명한 붉은색이 더 많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뼈가 옷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도 있다.

‘그나마 이번엔 상태가 낫군.’

그건 설백도 마찬가지지만. 아스타르트의 파편과 싸우고도 양팔 밖에 잘리지 않은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음. 운이 좋았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를 돌아보며, 새삼 무력감이 뼈에 사무친다.

나는 일부러라도 설백의 머리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후우….”

속이 쓰리다. 지금까지 실패해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허탈하고 공허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공허한 마음으로 불 같이 치고 들어오는 건.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악바리와 오기다.

“야. 루시.”

“뭐냐.”

“주변에 보면 내 칼 있을 거야.”

“칼… 아. 그래. 저거 말이냐?”

루시는 어딘가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나는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주변에 널브러진 칼이면 내것 외에는 없다.

주변의 무장이 있을만한 놈들은 죄다 세븐 소드 피어스로 두개골을 쪼갰고. 그걸로 성이 안 차서 뇌를 밟아 터트렸다.

중앙 시가지. 거주지구. 상업지구에 즐비했던 저격수와 괴물. 흘러들어온 마족 누님까지.

전부 쳐죽이고, 마지막에 들른 곳이 바로 이 뒷골목이다.

‘뭐… 결국 의식은 못 막았지.’

뒷골목에 숨어있던 극소수의 잔당들이 이미 약속의 평원으로 향했고.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아챘다.

제논은 불사교도 정리가 끝난 케른으로 모두를 텔레포트 시켰지만, 그게 문제였다. 케른에는 불사교고 시민이고 할 것 없이 시체가 너무 많다.

그 시체는 곧장 카사스의 수장이 되어 의식을 진행시켰다.

‘으음… 레벨이 조금 더 높아졌으면 죽일 수도 있었겠는데.’

나는 소환된 아스타르트의 파편에게 두 팔을 뜯어먹혔다. 나도 꼴에 레벨이 좀 높아져서 놈에게 꽤 깊은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죽이진 못했다.

제논은 제나를 데리고 다시 약속의 평원으로 도망갔는데. 얄궂게도 아스타르트의 파편이 제나에게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둘 다 죽었을 거다.

‘불사교도를 혼자 전멸시킨 나도 못 막았는데. 날고 기어봤자지.’

그렇다. 불사교도를 전멸시켰지만… 못 막은 것이다.

나는 그 시점에서 알게 되었다.

‘이거. 불가능한데?’

레벨이 높아져도 의미가 없다. 레벨을 300대 후반까지 찍어본 내가 장담한다.

결국 아무리 강해져봐야 개인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나는 상업지구, 거주지구, 중앙시가지, 그리고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동시다발 살인을 한 번에 막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냐. 어떻게 하면… 아니. 애초에 막을 방법이 있나?’

그리고 그러면 결국 의식이 거행된다.

레벨이 높아지면 내가 불사교도를 전멸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의식은 못 막는다.

그건 결국 내 패배다. 나는 이렇게 놈들을 전멸시켰지만… 설백이 죽어버렸다.

어쨌든 이번 생의 결말은 이거다. 그렇다면 내가 고를 최후의 선택지도 하나뿐이다.

“루시. 칼 좀 이리로 가져와봐.”

“끙… 수호자 주제에 감히 나를 부려먹다니….”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루시는 순순히 검 쪽으로 다가갔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시가 힘겹게 시커먼 칼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는 베스타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래. 가져왔다. 뭘 어쩔 셈이냐.”

“그걸로 내 모가지 좀 쑤셔라.”

순간 루시의 행동이 움찔, 멎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의문이 어렸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괴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허?”

“두 팔이 날아가서 자살이 안 돼. 체력이 높아져서 출혈로 뒤지려면 한세월 걸린다 야.”

“…….”

“빨리 죽여. 88트 시작하게.”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렸고.

검 손잡이를 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는….

“핫. 카하하! 아하하하핫!!”

이내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것이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스릉. 그녀는 내 목을 치는 대신, 그것을 서서히 내 눈앞에 갖다댔다.

“좀 물어나 보자꾸나.”

그리고 그런 말을 꺼냈다.

“그 계집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냐?”

“아니.”

“88번이나 죽어가면서 살려야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인가?”

“아니.”

“죽음 이상의 고통을 감수하면 네놈은 대체 뭘 얻느냐?”

“천하의 불사의 마왕 혓바닥이 뭐 이리 기냐. 죽이기나 하쇼.”

내가 대수롭잖게 대답하자, 루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짜증 부리듯 검을 내 목에 까딱거렸다.

“이런 미친 짓거리를 왜 하느냐. 용사. 네놈은 지능이 없느냐?”

“…….”

“저 여자를 버려라. 지금까지도 저 여자만 버리면 살 수 있는 상황이 차고 넘쳤다. 저 여자 정도의 미모. 능력. 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느니라. 뭣하면 내 부하 하나 추천해주랴?”

“…….”

“내 너의 계약자로서 충고하는 것이니라. 목숨을 좀 더 귀하게 쓰거라. 마음에 든 장난감이 제멋대로 망가지는 꼴은 용납 못한다.”

꽤나 진심어린 충고였다. 루시의 깊게 잠긴 붉은 눈동자를 보니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멘트 분명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다.

―쓸데없는 의협심을 버리세요. 자기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세요.

―제발… 망가지지 말고 오래 살아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시험의 장막에 가기 전. 새하얀 공간에서 미네르바가 내게 했던 말이지. 아직 반년도 안 된 일이 몇 년은 지난 일 같다.

‘출세했네. 미녀들이 내 걱정도 해주고.’

격세지감에 헛웃음을 흘렸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말했다.

“넌 X발 나 같은 호구들 특징이 뭔 줄 아냐?”

“뭣이?”

“가오 잡기를 오지게 좋아한다는 거다.”

“… 알아듣게 말해라.”

나는 다시금 밤하늘을 봤다. 불꽃이 밤하늘을 연신 수놓는다. 붉게 물드는 시야 속에서 문득 설백의 슬픈 미소가 떠오른다.

그 때 분명히 설백은 울고 있었다. 맞나? 기억이 워낙 여럿이 겹치니 좀 헷갈리는군.

―네. 꼭이에요. 불꽃놀이… 꼭 같이 봐요…! 꼭이에요!

어쨌든 그 목소리가 떠오르자 일말의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역시 돌아가야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설백과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니 걔랑 데이트하기로 약속했거든.”

“… 허?”

“X발 내가 말이다. 24년 모쏠동정으로 살다가 이제 인생 좀 펴보려는데. 온 세계가 손에 손잡고 전력을 다해서 방해하잖아. 해준 것도 없는 이 줫같은 이세계가. 어?”

“… 허어어?”

“딱 두고 봐라. 내가 꼭 데이트 해야겠어. 드럽고 치사해서라도 내가 설백이랑 같이 불꽃놀이 보고 만다. 씨이벌창.”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그래.

한 100번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트라이해주겠다.

“앞으로 13번까진 거뜬하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지! 덤벼라 족같은 세상아!!”

나는 호구일지언정, 의지박약은 아니다.

카사스인지 카직스인지 카서스인지. 정체도 모를 띠꺼운 음해세력들아.

너희는 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내가 모쏠 딱지 뗄 기회를 그렇게 쉽게 버릴 줄 알았냐?

어림도 없다 이 X발럼들아.

“크핫! 다른 건 모르겠고.”

루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위태로운 몸짓으로 베스타크를 들어 내 목을 겨냥했다.

히죽. 그녀의 섬짓한 붉은 눈이 흥미로 번들거렸다.

“완전히 맛이 갔구만.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흉마에 이미 잠식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원래부터가 이런 놈이었나?”

“…….”

“아하핫. 내 150년 평생 너 같이 재미있는 인간은 처음 본다. 용사 박정용이여.”

“…….”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죽음을 버틸 수 있을꼬?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군.”

딱히 내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말을 마친 직후 힘껏 검을 내리쳤다.

단두대처럼 내려오는 검날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래 좋다. 어디 끝까지 발버둥 쳐보거라. 나는 끝까지 지켜봐 주겠느니라.”

아득해지는 순간 의식을 지배한 것은, 루시의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약속대로 칼침 놔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카하핫!”

결국 이번 생에선 의식 저지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모든 불사교도를 전멸시키는데는 성공했다.

최소한의 희망은 있다. 아직 샷건치고 인생 빡종할 정도는 아니다.

‘다음번에야말로.’

다음번에는 분명 성공할 거다. 그래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마 86번 죽은 전생의 나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그냥 이딴 생각 하지 말기로 했다.

―음.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슬슬 꿈에서 깨볼까?

문득, 그런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금세 아득해졌다.

마왕이 내리친 검이 내 목에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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