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러나 갓세계물 엔딩식 감성폭발은 갑작스럽게 종결을 맞았다. 내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온 어떤 시체 하나 때문이었다.
그걸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루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시선을 슬쩍 돌렸는데. 문득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니 미친… 저거 뭐야?!”
상반신 아래가 싸그리 날아간 끔찍한 몰골의 시체. 불타다 만 창자가 길바닥에 늘어진 모습이 어렸을 때 갖고 놀던 방패연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시신의 목 위로는, 내 얼굴이 눈을 부릅뜬 채 붙어있다.
“……!”
나는 내 얼굴을 마주하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니 루시도 슬쩍 고개를 돌렸고.
곧장 히엑, 하고 숨을 삼켰다.
“으하악! 용사, 뭐냐 저거! 누가 한입 먹고 뱉었냐? 대, 대체 너 뭔 일을 당하는 게냐?!”
얘는 왜 내가 회귀할 때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을 매번 잊어먹는 걸까. 진짜 지능이 박살난 건가, 아니면 일부러 멕이려고 이러나.
뭐 어쨌든… 루시보다 혼란스러운 건 다름 아닌 내쪽이다. 갑자기 내 시체를 봐서 충격받은 걸로 모자라 저런 몰골이라니. 솔직히 사념을 수복하기도 꺼려진다.
“진짜… 거인한테 씹히기라도 했나.”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시신에게 천천히 다가갔고. 랜턴을 들어올려 천천히 가져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울었어?’
전생의 내 눈과 볼 주변이 일자로 젖어있었다.
나는 방금 전의 개뜬금 감성폭발을 상기시켰다. 설마 전생에 울다 죽어서 시간이 돌아온 다음의 나도 울었다. 이런 건가?
‘개오바지.’
전생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의 나는 모른다. 애초에 시간이 돌아온 상태인데, 있지도 않은 기억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접어두고 랜턴을 시신에 갖다댔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체력을 255, 마력을 120 포인트 수복했다.]
[힘을 0, 민첩을 28,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실전스킬 - 미미르의 눈 LV. 17을 수복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 으…!”
그리고 전생의 기억과 능력치가 모두 수복되었다.
시체는 바스라져 허공으로 사라졌고. 동시에 콸콸 쏟아지던 눈물은 거짓말 같이 멈췄다.
“…….”
내가 그 때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루시에게 다가갔다. 루시는 내 분위기가 돌변한 걸 감지했는지, 미간을 슬쩍 좁혔다.
조금 거리를 두고 대치한 나는 대뜸 물었다.
“설백이 내쪽으로 오는 걸 왜 안 막았냐.”
“아앙?”
“전생에서. 설백이 케른으로 돌아왔어. 넌 그 때 같이 있었으니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뭐, 그래. 그 계집이 시끄럽게 굴긴 하더구나.”
귀를 긁적이며 대수롭잖게 말하는 루시. 나는 부아가 치밀어 결국 검을 뽑았다.
파바바박. 망토가 갈라져 가시가 되고. 마력검이 생성되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수십 개의 흉기 한 가운데, 루시는 당당하게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막아야 했느냐? 그 계집이 한 말도 분명 옳은 말이었다.”
“옳긴 뭐가 옳아.”
“이대로 놔두면 네놈이 죽는다. 그걸 넋놓고 지켜볼 순 없다. 나라도 가세해야 한다. 그 계집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말리지 않았냐고.”
“말했잖느냐. 틀린 말이 없으니까. 그대로 놔둬봤자 네놈은 확실히 죽었다. 봐라. 죽었지? 맞는 말 했구만.”
“…….”
“이놈아. 솔직히 척 봐도 보이는 결과잖느냐. 내가 무슨 명분으로 막겠느냐.”
나는 성큼성큼 루시에게 다가갔다. 검은 물론 휘두르지 않았지만. 대신 멱살을 틀어쥐고 그녀를 들어올렸다. 눈높이가 같아진 상태에서 나는 그녀에게 이마를 맞댔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는 내가 부활하는 걸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말해야지! 날 살리려고 발악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해줘야 걔가 납득할 거 아니냐!!”
꿈틀. 마왕의 눈썹이 춤을 췄다.
“오호. 네놈을 살리려 발악하는 건 무의미하다? 까짓 거 어차피 목숨도 무한인데, 그 계집이 죽을 바엔 당연히 자기가 죽는 게 낫다?”
“그래! 그 당연한 소리를 왜…!”
씨이익. 루시의 입가가 짙은 호선을 그린다.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듯한 미소다.
눈사람이 햇빛에 녹아내리는 걸 지켜보는 꼬마. 그런 이미지가 스쳤다.
“그게 살아있는 인간이 맨정신으로 내뱉을 소리인가?”
루시가 툭 내뱉은 한 마디에 나는 사고가 정지했다.
“…… 뭐?”
“숨이 붙은 것들은 원래 죽기 싫어해야 정상이니라. 1초라도 더 연명하려고 무슨 짓이든 한다. 심지어 나도 그렇다. 지금 개소리하는 네놈만 빼고 모두 그렇지.”
“…….”
“진심으로 궁금해졌느니라.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인간으로 느껴지긴 하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시는 제 혼자 알겠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멱살을 잡은 내 손을 힘껏 때렸다. 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놓자 루시는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으음. 회귀점을 갱신해도 이미 망가진 정신까진 돌아오지 않는가? 아니면… 그 짧은 사이 흉마가 왕창 쌓일만한 일들을 겪은 것인가?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건지 원.”
기분 탓인가. 루시가 날 훑어보는 붉은 눈빛이 유난히 끈적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괴, 괴, 괴, 괴물.
타라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뇌리를 맴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그 여자랑 같이 있으면 이렇게 된다니까.”
안타까운 탄식이 섞인 그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 나는 퍼뜩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거기엔 미네르바… 똥털이 서 있었다.
* * *
“으엑. 여, 여신의 끄나풀….”
루시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내 뒤로 숨어들었다. 머리를 빼꼼 내밀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똥털을 노려본다.
“훗.”
미네르바는 그런 루시를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며 빙긋 웃었다. 루시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기색이다.
나도 덩달아 긴장한 채 갑작스런 손님을 노려봤는데. 미네르바는 한숨과 함께 말문을 텄다.
“그 때도 제 경고를 무시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잖아요. 어때요. 지금이라도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망치는 건?”
“… 그 때? 경고? 오랜만에 출연해서 무슨 개소리를 그리 찰지게 하냐.”
나는 진심으로 뭔 소린지 모르겠어서 탄성을 질렀고.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든 미네르바는 이내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아하. 기억이 없구나. 그러면 안 돼요. 잔류사념은 제깍제깍 회수하셔야죠. 기껏 사신 자매들한테 사정사정해서 넘겨준 아이템인데 써먹지도 못하긴… 하아.”
그러다 마지막엔 한심하다는 양 한숨을 내쉬며 말을 삼켜버린다.
저 말들은 다 뭐야. 설마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 미네르바와 만난 적이 있었나? 저 띠꺼운 한숨을 봐서는 농담은 아닌 듯한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는 한편. 미네르바에게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나 가정교육 중이라 바빠.”
퍼억. 종아리에 타격감이 느껴진다. 보나마나 루시가 걷어찼겠지.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미네르바도 별 신경쓰지 않고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야 재권유를 하러 왔죠. 더 이상해지기 전에 얼른 설백이란 여자를 내버려두고. 당신이 원하던 대로 어디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서 띵가띵가 노시라고요. 불사의 마왕만 제대로 통제해주신다면, 평생 놀고먹을 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리죠. 어때요?”
… 이 새끼, 나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네. 남몰래 품고 있던 비장의 숙원이었는데. 설마 전에 만났을 때 내가 저런 비전까지 스스로 밝힌 건가?
내심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권유에는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 집어쳐. 근 두 달을 부대꼈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서 그렇게는 못하겠네.”
“푸후!”
단호박처럼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오히려 내 대답을 들은 미네르바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와. 오지게 띠꺼운 여자지만 역시 웃을 때만큼은 미모가 끝내주는… 아니 미친 이게 아니고.
내가 의문스럽게 쳐다보자 미네르바는 손사래를 쳤다.
“미안. 미안해요. 그냥… 그렇게나 굴렀는데도 어떻게 이리 한결 같나 싶어서.”
저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그래. 내가 전생할 때마다 같은 소리를 지껄였을 때, 마왕이 나한테 했던 말이다.
설마 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해서 거절했냐? 기억이 없으니 영 답답하구만.
“음. 그럼 나도 그 때랑 같은 말을 해줄 수밖에 없겠네요?”
미네르바는 입술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내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특유의 느긋한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불사교는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시체를 조종하는 카사스의 수장도 성가신데.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설백씨는 중요한 국면에서 말을 안 듣네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면 좋을까요?”
똥털이 아픈 곳을 찔러온다. 나는 지긋이 추궁하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 설백한테는 다시 한 번 차분히 말해볼 거야.”
“말해본다고요? 당신은 죽지 않으니까 제 몸 간수나 잘 하라고?”
“그래. 걔도 일단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건 믿어줬단 말이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애니까 잘 얘기하면 분명 이해를 하고….”
“하아아아. 미치겠네 정말.”
미네르바는 짜증 섞인 몸짓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내 미간을 검지손가락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세에 조금 움츠리면서도 지지 않고 그녀를 마주봤다.
“잘 들으세요. 두 번까진 말해줘도 세 번은 안 말해줄 거니까.”
“무슨 약을 또 팔려고….”
“용사 박정용씨. 그 여자의 믿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뢰가 아니예요.”
“…….”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아요. 상처면 모를까.”
똑바로 직시하는 미네르바의 눈을 가만히 마주보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보다. 내일 해를 보지도 못하는 시국이긴 하지만.
“… 제가 시간도 없고 하니 이쯤 하죠. 소귀에 경 읽는 거 같아서 저도 지치네요.”
미네르바는 이내 시선을 떼더니, 미련없이 등 돌려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신기루처럼 서서히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퍽이나 신기하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내쪽을 흘깃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한결 같네. 짜증날 정도로.”
일단 험담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욕하려고 내뱉었다기 보단, 오히려 안심했다는 어조였기 때문… 이라고 하면 지랄인가? 역시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험담이다.
“갑자기 나와서 갑분싸 만들긴. 오라질.”
똥털과의 만남이 언제나 그렇긴 했지만. 여러모로 심경만 뒤숭숭해지는 대화였다.
안 그래도 슬래셔 무비에나 나올 장면들을 직관하는 바람에 멘탈이 간당간당한데 말이야. 굳이 찾아와서 사기 떨구는 건 무슨 심보냐 대체.
“가, 갔냐? 그 여자는 갔냐 용사?”
루시는 그제야 내 뒤에서 나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실없는 모습에 한숨을 낮게 흘렸다.
“오냐. 갔다.”
뭔가 진지하게 따지고 들었던 내가 한심해지는 광경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뒤숭숭한 것들을 모두 털어버렸다.
덥석. 루시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나는 말했다.
“이번에 설백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무조건 막아.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해. 무조건 막아 무조건. 알겠어?”
“으극… 노, 노력은 해 보마. 일단 머리카락 휘젓지 마라! 내가 네 애완동물이냐!”
“좋아.”
내가 쓴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쿠구구구… 하고 낮은 땅울림이 일어났다. 지평선 너머가 하얗게 빛나며 눈부신 백광을 토해낸다.
방향은 약속의 평원.
새하얀 폭발. 아스타르트 파편 소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다.
“아빠 일하러 갔다 온다.”
“아빠는… 에효. 됐다.”
나는 흑익을 사용했다. 돋아난 까마귀 날개로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나저나 기억을 가지고 시작하는 건 안정감 면에서 확실히 차원이 다르군. 이번 생에도 가능하면 죽을 때 시작점으로 돌아오도록 노력해보자.
그런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글러먹은 생각을 하며. 나는 쌍검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