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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96화 (72/280)

96화 사망유희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농담… 할만한 상황은 아니구만.”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는 건 루시의 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런 진지한 얼굴이 연기면, 쟤는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계획이… 정말 먹히지 않는다고.’

축축한 무언가가 다리를 잡아끄는 기분나쁜 착각이 들던 무렵.

두둥. 서늘한 음색과 함께 언제나처럼 메시지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전생의 내가 남긴 마지막 유품. 혹은 유언.

나는 습관적으로 품을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지만. 선뜻 열지 못했다.

직전에 루시에게 ‘실패한다’라고 단언을 받아서인가. 왠지 전생의 나한테서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따위의 소리를 듣고 나면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에라이 썅. 쫄지 마 박정용!’

나는 결국 수많은 고민 끝에 망자의 함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예상대로 거기엔 급하게 휘갈긴 내 필체의 쪽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너는 죽는다.]

나를 발끝부터 집어삼키던 무언가가 일순간 목까지 차오른다. 숨이 턱 막히는 착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예상은 했다만 정신이 얼얼하다.

‘… 이건….’

어지럽게 방황하던 내 시선은 이내, 망자의 함에 꾸깃꾸깃 들어찬 또 다른 쪽지에 닿았다.

나는 그것들에 신경을 집중했고. 곧장 펼쳐봤다.

쪽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나머지 쪽지에 세 개의 문장이 더 적혀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의심하지 말고 잔류사념이나 무조건 회수해라.]

[너도 나도 죽겠지만, 마지막엔 결국 이긴다.]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쪽지를 힘껏 쥐었다.

가능성이 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증명해줬다.

나는 찡그린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루시를 슬쩍 흘겨보고는, 히죽 웃어줬다.

“실패가 아니야.”

“뭣이라?”

“나는 실패한 게 아니라고.”

내가 쓴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쿠구구구… 하고 낮은 땅울림이 일어났다.

지평선 너머가 하얗게 빛나며 눈부신 백광을 토해낸다.

방향은 약속의 평원.

새하얀 폭발. 아스타르트 파편 소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다.

나는 주먹을 한 번 불끈 쥐고. 루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으갸악! 뭐, 뭐하는 짓이냐!”

“내가 흉마에 먹혀서 미친놈이 되면. 네가 배때지에 칼침 쑤셔서 깨워라.”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루시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잠겨 있었다.

머리를 정리하던 루시도, 이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허. 너 전생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느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런 말을 지껄인다. 뭐… 전생의 나도 이런 비슷한 말을 지껄였나 보다.

어쨌든 루시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냐오냐. 사지 절단해서라도 반드시 내 깨워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니라.”

“… 지금까지 했던 말중에 제일 믿음직하다. X발.”

촤아앙! 나는 곧장 쌍검을 뽑아들었고. 빛살처럼 달려가 케른의 서쪽 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투학! 한 번의 도약으로 주변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빠 일하러 간다!!”

“아빠는 얼어죽을.”

내 재미없는 농담에 싱긋 웃는 루시의 표정이 빠르게 멀어진다.

* * *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경비! 경비를 불러!”

“괴, 괴물들이다!”

케른의 중심 시가지에 가까울수록, 비탄에 젖은 목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한 편.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나 찢어지는 비명소리. 구원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 쓰읍.”

아무렴 내가 생판 남한테는 관심없는 성격이라곤 하지만. 저런 끔찍한 사운드를 듣고도 멀끔한 냉혈한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조급함과 불안함을 부추겼다.

‘… 잔류사념. 대가리 깨져도 사념 회복이 먼저야!’

모든 일에는 수순이 있는 법이다. 멀리 보기 위해선… 지금은 저 소리들을 무시해야 한다.

나는 케른 서쪽 관문에 들어선 직후 이자나미의 심장부터 발동시켰다.

우우웅. 육중한 울림과 함께 음울한 빛을 토해내는 랜턴. 그 빛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박차를 가하던 그 순간.

“…….”

“…….”

눈앞으로 평범한 행색의 모험가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지나쳐 골목으로 진입하는 두 사람을 흘깃 스쳐본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이내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그리고 곧장 스킬을 영창했다.

“페이탈 쏜즈!”

반쯤은 본능적이었다.

굳이 위화감의 원인을 찾으라면… 그래. 두 사람은 이 난리통이 무색하도록 무표정했다.

도망치는 사람도, 그렇다고 학살하는 쪽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무표정.

그게 내가 스킬을 갈겨버린 이유다.

“……!”

퍼버벅!

날아간 가시는 두 모험가의 사지를 관통했고. 확정타로 가슴을 꿰뚫었다. 한놈당 정확히 가시 5개씩. 스스로 만족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명중이다.

다만 소름돋는 점이 하나 있었다면….

‘이 새끼들 나를… 죽이려 했군.’

이전에도 한 번 사용했던 기습법이었다만. 이놈들은 등을 관통했던 제르미 때와 달리 가슴을 관통당했다.

이놈들도 곧바로 내 배후를 급습하려 돌아섰다는 소리다. 이것으로 놈들이 불사교도라는 게 확증이 되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찰나.

“…….”

가시에 몸이 꿰뚫린 채 나를 노려보던 놈들이 툿, 하고 무언가를 뱉어냈다.

시선이 무심결에 그것을 따라갔다. 손톱만한 쇠구슬이다. 또르르 굴러와 내 앞까지 당도한 그것은 이내 피싯,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고.

“… 이건?!”

푸화악! 엄청난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연막탄. 기가 차는군. 별 짓을 다한다 이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지랄났네 아주!”

나는 시전시간이 다 되어 사라지기 시작한 가시들을 모두 회수한 뒤. 곧장 놈들의 숨통을 마저 끊으러 달려갔다.

연막으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문득 나는 섬짓함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

쇄애액!

파공성이 울린다. 특이한 모양의 양날검이 휘둘리며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냈다.

그리고 풀썩. 검을 휘둘렀던 불사교도는 무표정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마치 인형의 끈이 떨어지듯이.

“… 후우.”

온몸에 뚫린 다섯 개 구멍으로 엄청난 출혈이 일어나고 있다. 전신을 잘게 경련하는 것이, 척봐도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럼에도 놈은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고. 표정 또한 변화가 일절 없었다.

‘저런 몸으로 이렇게 빠른 공격을?’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면, 나라도 위험할 뻔했다.

내가 육감이 뛰어난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특수스탯인 ‘히어로센스’가 발동되었겠지. 퀘스트 성실히 수행해왔던 과거의 내가 대견해지는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섬짓한 나머지 쓰러진 불사교도에게 시선을 보냈다.

“분명히 사지를 관통했는데….”

연막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내게 매서운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놈은 발치에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사이 사라져 있었다.

아차 싶었다. 설마 한 놈을 도망치게 하려고 가망 없는 놈이 시선을 끈 건가?

‘… 아니. 그런 작전을 짜는 기색도 없었어.’

물론 사전에 위급상황에 대한 협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얕볼 일은 아니다. 무슨 프로토스마냥 말도 없이 소통하는 거면 상대하는 입장에선 골이 빠개지고. 협의가 돼 있었다면 그만큼 훈련이 잘된 실전파들이라는 소리니까.

새삼 불사교에 대한 경계심이 떡상했다. 역시… 절대 만만하게 생각할 놈들이 아니다.

‘미미르의 눈.’

가기 전에, 나는 조금의 정보라도 얻어볼까 하는 마음에 죽은 불사교도를 스캔했다.

그리고 곧장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 정보]

[명칭: 케인 코커스]

[체력: 0/980 마력: 0/730]

[힘: 124 민첩: 106 지능: 33]

[상세: 아신의 뜻을 져버린 용사. 더러운 배신자에게 죽음의 철퇴를.]

놈의 상태창이 몬스터로 표시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 이런 의미였냐?”

전생의 내가 했던 ‘우리는 마지막에 승리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잔류사념이 중요하겠군. 여기서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걸음을 재촉했다. 달리는 속도는 아까보다도 훨씬 빨라져 있었다.

‘대충 이 근처인데….’

웬걸. 랜턴 빛을 따라온 나는 어느새 판자촌이 있는 뒷골목에 도달했다.

불안에 찬 빈민들의 시선들이 따갑게 쏟아졌다. 시가지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학살극의 관계자라고 생각하는 시선들이 분명했다.

“흐음.”

나는 무력하게 공포에 떨고 있는 부랑자들을 눈대중으로 훑었다.

그리고 곧 혀를 찼다.

‘히크는… 없군.’

그 사이 몸을 피한 모양이다. 도망치는 건 잽싸다.

나는 도와주지 못할망정. 빈민들에게 소문을 뿌려서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기껏 정보를 줬더니 일말의 양심도 없군. 막돼 처먹은 노친네 같으니.

‘찾았다.’

너구리 노친네를 신나게 씹으며 빛을 따라가니, 곧 잔류사념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전생의 시체를 보면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이번에도 흠칫 숨을 삼켰다.

“후우.”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랜턴을 시신에 가져갔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네 이건….”

하긴 익숙해질 리가 없지.

가슴 중앙부터 오른쪽으로 상체가 완전히 작살나고. 엎어진 라면 냄비 마냥 내용물(?)이 쏟아진 내 시체를 감상하는 기분이라니.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8, 민첩을 23,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서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 으, 으아아아악!!”

그리고 전생의 기억과 고통, 감정, 그리고 죽음. 거기서 오는 압도적인 공포. 모든 것들이 찰나에 온몸으로 쑤셔 박히는 경험이라니.

그런 게 익숙해지면 이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럼.

“누나 나 죽어어어!!”

어쨌든 정신을 차린 내가 가장 먼저 외친 말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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