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상상도 못한 정체
비탄과 비명에 잠긴 케른의 한복판. 시간은 밤을 넘어 새벽에 가까워졌다.
얼마나 불사교도를 썰어 넘겼을까. 문득 들었던 후회는,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가는 사람들 상태창이나 더 많이 봐둘걸’하는 것이었다.
“후욱… 후우….”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만일 불사교도를 사전에 미리 파악한다 해도, 겉보기로 일반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을 무슨 구실로 죽이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제논피셜(?)로는 케른 인구가 자그마치 1만이다. 일일이 신상정보를 기억하고 다니다간 정신병 걸리기 딱 좋다.
“하아… 하아… 허억.”
그냥, 산처럼 널브러진 불사교도와 일반인의 고기더미를 보고 있자니. 그런 실없는 생각이 문득 들고 말았다.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한지 아직 1시간도 안 지났는데 이 꼬라지니. 루시가 보면 땅치고 통탄할 노릇이다.
“일단 너희들은… 전부 불사교 개새끼들로 봐도 되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피가 흥건한 쌍검을 거칠게 털어내고, 시선을 따라 검을 겨누었다.
내 주위로는 어느새 수십에 달하는 인간의 스크럼이 형성되어 있었다.
“…….”
“…….”
“…….”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기질적인 눈동자들이 수십 개. 사방에서 나를 조여온다.
어느 순간, 놈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어떤 신호도 없다.
그냥 놈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뒀다는 양, 일순간에 모든 방향에서 나를 조여왔다.
“어림도 없지 개새끼들아!”
하지만 그 기계같은 단합력에 당황한 것도 처음 한 두 번이지.
이제 와서는 그런갑다 싶어 나는 단 한 순간도 놈들 앞에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세븐 소드 피어스!”
기합처럼 스킬을 영창했다. 14개의 마력검이 전방위를 향해 쇄도했다.
물론 놈들 중에는 이것을 튕겨낼만한 실력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다.
내가 요즘 ‘세븐 소드 피어스 원툴’로 싸움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다른 스킬을 잊은 건 아니다.
‘쓸 데가 생겨야 쓰는 거지!’
그래. 바로 지금 같은 대규모전투 상황이 없어서 쓰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그 자리에서 펄쩍, 점프했다.
“지뢰진!!”
마력을 있는 대로 응축해 검에 때려박은 뒤, 그대로 땅에 내리박았다.
쿠구구구구! 지축이 육중한 비명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시전자인 나조차 비틀거릴 정도였으니, 그 충격파를 직격한 불사교도들은 당연히 난리도 아니었다.
“……!”
“……!!”
서로 뒤엉키고 쓰러진 불사교도들. 무방비가 된 그들의 육체를 새파란 마력검이 가차없이 꿰뚫었다.
퍼버버벅! 14개의 마력검이 14명에게 하나씩. 정확히 심장이나 목을 찌른다.
‘쯧. 힘이 모자란가?’
일부는 그대로 절명했지만. 검이 적중했음에도 비틀거리기만 할뿐, 무기를 치켜들고 내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놈들도 있다. 방어도가 높거나 체력이 높은 거겠지.
나는 놈들이 자세를 추스르기 전에 재빨리 망토를 변형시켰다.
‘페이탈 쏜즈.’
파파팍! 길게 늘어뜨린 가시들을 전방위로 풍차처럼 휘둘렀다.
불사교도들의 망연자실한 얼굴에 피싯. 가로로 혈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
쩌저적.
그 선을 따라 놈들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레벨 업!]
놈들이 죽었다는 것은 경쾌한 팡파레가 확인해줬다.
‘좋아. 빨리…!’
한 시가 급했지만, 나는 일단 능력치 포인트를 대충 민첩과 힘에 분배했다.
능력치를 즉각적으로 올리는 것. 이것이 지금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니. 지금의 나뿐만이 아니라, 다음 생의 내게 있어서도.
“…….”
나는 홀린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시로 썰어버린 불사교도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했다.
반쪽 남은 얼굴로 퍼덕거리는 불사교도의 육체를 보며,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고….
“흐.”
웃었다.
불쾌하기는커녕, 희열의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정신 차려라. 미쳐도 싸움 끝나고 미쳐라.’
직후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웠지만. 내가 저 몰골을 보고 실실 쪼갰다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곧장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이렇게 많이…?’
먼저 놀란 것은, 내가 스크럼을 박살내는 동안 눈에 띄게 줄어든 케른 시민들의 숫자였다.
물론 줄어든 케른 시민들은 모두 주검이 되어 바닥에 누워있었다. ‘피가 강처럼 흐른다’라는 관용구를 나는 지금 실제로 목격하고 있었다.
내가 이를 악물고 학살을 자행하는 불사교도를 향해 다시금 발을 구르려는 찰나.
터어엉! 머리가 지끈 울리는 굉음과 충격. 무언가 내 마빡을 강타했다.
“커헉?!”
달리기가 멈춘 것은 물론이고, 나는 모가지가 확 꺾인 채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콰앙! 한 민가의 벽에 부딪쳐 그대로 박혀버렸다.
잠깐 삼도천에 멱 감고 나왔다. 깜빡이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린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벽에 박힌 몸을 빼냈다.
“이건….”
얼떨떨하게 이마를 매만지는 내 앞으로는 원통형의 철갑쪼가리가 떨어져 있었다. 들어올려 자세히 보니, 찌그러진 탄환이었다.
“총알… 저, 저격?”
크기가 내 손으로도 한 뼘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화약 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내 이마를 직격한 건 이게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미친 X발… 저격수까지 있다고?’
돌겠군. 냉병기로 똘똘 뭉친 원시인만 있어도 승기가 희박한 판인데.
이 총알의 정교함으로 봤을 때, 최소 지구의 과학기술 이상의 세계에서 온 용사가 불사교에 있는 듯하다.
그것도 하필이면 고레벨의 저격충이다. 성가시기 짝이없군.
‘위력은, 내 레벨이 일격사할 수준….’
나는 이마를 매만졌다. 흥건한 피가 묻어나왔다. 간담이 일순간에 서늘해졌다.
방어도가 한 순간에 바닥나고, 살갖이 뚫렸다. 진화의 흑익 방어도는 내 체력치를 살짝 상회하는데도 말이다.
망토가 없었으면 방금 그걸로 마빡에 고속도로 개통됐을 거다.
“저격은 무조건 밴이다. X벌럼아.”
나는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미미르의 눈은 발동하지 않는다. 미미르의 눈은 어디까지나 눈에 담은 대상만의 상태를 표시해주니까.
‘사냥 표식.’
하지만 내가 이번에 새로 배운 직업스킬 ‘사냥 표식’은 다르다.
찌그러진 탄환을 쥔 채 속으로 영창하자, 곧 시커먼 기운이 탄환을 감싸더니 어딘가로 재빠르게 날아갔다.
[특수 아이템 ‘대룡(對龍)저격탄 17식’ 소유자의 잔향을 추적한다.]
[추적중….]
나는 날아가는 검은 기운의 뒤를 바짝 쫓아 달렸다.
민가를 펄쩍 뛰어넘고, 기와집과 서양식 건축물이 섞인 괴상한 지붕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지붕의 굴뚝 위에서 기운이 멈추더니. 곧 불길한 해골 문양을 그려냈다.
“…….”
굴뚝 위에 잠복하고 있던 저격수는 들켰음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품을 뒤져 단검을 꺼내더니, 익숙하게 싸울 준비를 했다.
나는 그런 저격수놈을 보며 히죽,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진심이 담긴 미소를 띄웠다.
“남의 마빡에 구멍 뚫을 생각했으면. 제 마빡에 구멍뚫릴 각오도 했겠지?”
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놈에게 쇄도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엄청난 속도였다. 첫 공격에 한해 버프를 부여하는 스킬을 꽤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속도면 비주력 스킬로도 가능하겠지. 나는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일섬!”
웬만하면 전투에서 힘을 아끼지 않는 내가, 세븐 소드 피어스를 배운 이래로 사장되다시피 했던 공격스킬.
하지만 앞으로 상대할 불사교도가 까마득한 지금에선… 마력의 안배가 필수적이다.
“반갈죽 새꺄!!”
나는 푸른 마력이 이글거리는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
저격병 불사교도는 침착하게 수비에 임했다. 그가 신속하게 단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검은 이미 바닥에 닿아있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그 저격병에게서 표정이 떠올랐다. 의아함이었다.
푸화악!
물론 그 표정도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져, 곧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나는 뜨뜻한 장기가 핏줄기와 함께 지붕 위로 흩어지는 그 광경을 잠시 지켜봤다.
“…….”
하늘을 잠시 쳐다봤다. 어두운 사위를 아스라이 비추는 반달이 떠있다.
품에서 빛을 뿜는 성녀의 문장을 잠깐 쳐다봤다. 몰라보게 강화된 스테이터스를 실감해보고자 주먹을 잠시 쥐락펴락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혀를 차며 씨근거렸다.
“너무 기대되잖아. 지미럴.”
고작 저격병이 끝은 아닐 것이다.
시민의 평균 레벨이 높은 케른을 하루 아침에 멸망시킬 정도면. 불사교 쪽도 비밀병기 몇 개정돈 준비해뒀을 게 분명하다.
앞으로는 또 어떤 개성적인 미친놈들이 나를 이렇게 즐겁게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돼서 환장할 지경이다.
“에효.”
나는 지붕이 뚫어질 법한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곧장 소란의 중심부를 향해 다시 질주했다.
지금 이 순간도 시시각각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한 순간도 쉴 틈은 없다.
‘사냥 표식!’
나는 곧장 다음 사냥감을 향해 표식을 날렸고. 어느새 쿨타임이 돌아온 흑익을 사용해 날아오른 나는 곧장 그 뒤를 쫓아갔다.
파바박! 공중을 가르는 표식을 따라, 내 신형도 탄환처럼 쏘아져 나갔다.